< 삼린이를 위한 삼국지 용어 이야기 > - 칠종칠금과 만두
관우가 죽고,


장비도 죽고,

유비는 큰형님다운 호방함으로 모든걸 불태우고 형제들 곁으로 돌아가시니,

불타고 있는 촉의 미래 [이릉대전]
세상 사람들은 촉이 끝장났다고 여겼다.
국가(위나라)에서는 촉(蜀)엔 오직 유비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죽고 촉은 여러 해 동안 조용하고 아무 소리가 없었으므로 (촉에 대해선)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다.
- < 위략 > -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촉나라엔 아직 포기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필히 신하로서 헌신을 다하고[고굉지력(股肱之力)],
충성과 절개(忠貞)를 지키는 것을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 < 삼국지 촉서 > 제갈량전 -
그러나 모든 촉인(蜀人)의 생각이 제갈량과 같진 않았을 것이다.
촉은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으니,
기어코 촉나라의 남부, 남중(南中)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보시다시피 이곳 남중은 공식적으론 한나라의 영토긴 했지만,
중앙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변방인지라
중앙의 영향력은 굉장히 낮고 각 지역의 토호들이 강세인 곳이었으며,
이곳의 주민들도 한족의 비율은 낮고, 여러 소수 민족들이 뒤섞여 사는 곳이었다.
(이족, 백족, 합니족, 장족, 태족, 묘족, 회족 등)
중원에선 이들을 그냥 다 ‘남만(南蠻)’이라 퉁쳐서 칭하였는데,
실제론 뭔가 통일돼 있는 독자적인 세력은 아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 사람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도는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제갈량의 입장에선 어차피 북벌을 준비하기 위하여
후방의 안정과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에,
직접 반란을 진압하고자 남중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이회, 마충 등 당시 유능했던 지역 담당관들 덕분에 수월히 남중을 평정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모든 역사서의 일관된 진술인데, 일부 역사서와 소설 < 연의 >에선 추가적으로,
제갈량이 남중의 유력 호족(연의에선 남만왕)이었던 맹획을 굴복시키는 과정인
‘칠종칠금(七縱七擒)’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칠종칠금’이란 맹획을 7번 풀어준 뒤 7번 사로잡았다는 이야기인데,
간단히 소개해 드리자면 다음과 같다.


▶ 1차전 : 맹획군 3대장이 당당히 촉군에 맞섰으나 패배.

맹획이 이들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구원하려 오나 마찬가지로 패배.


▶ 2차전 : 수비전략으로 바꾼 맹획은 노수를 끼고 토성을 쌓고 버티나,

촉군에게 붙잡혔을 때 후한 대접을 받았던 아회남&동도나가 맹획을 배신하여 패배.


▶ 3차전 : 맹획은 동생 맹우를 거짓투항 시킨 뒤 기습하려 했으나,

맹우가 술먹고 꿀잠자는 바람에 패배.



▶ 4차전 : 촉군이 퇴각한 줄 알고 살짝 나가봤다가 패배.


▶ 5차전 : 타사대왕과 독천을 끼고 수비. 촉군은 남만전 이후 제일 큰 위기에 빠졌으나,
평소 맹획에게 원한이 있던 옆동네 동주(호족) 양봉이
맹획에게 투항하는 척 속여, 타사대왕은 죽이고 맹획을 사로잡음.

그리고 남만에서 온건파였던 맹획의 형 맹절이 제갈량에게 길을 알려주어
촉군 안전히 독천을 돌파. 맹획 패배.



▶ 6차전 : 맹획의 부인 축융이 선전하고, 목록대왕이 맹수를 부려 촉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함.

이에 제갈량이 커다란 가짜 호랑이를 만들어, 맹수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게 하여 패배.
(버전에 따라 제갈량의 부인인 황씨가 가짜 호랑이를 만든 걸로 나오는 것도 있음.)


▶ 7차전 : 올돌골의 등갑병이 등장.
등갑은 등나무를 기름에 10번 이상 절이고 말려서 만들어 화살이나 칼이 안 박힌다고 함.

하지만 제갈량이 화공으로 올돌골과 등갑병을 통째로 불태우며 패배.
이처럼 제갈량과 맹획의 ‘칠종칠금’은 꽤나 흥미롭고 감동적인 얘기인지라,
삼국지를 읽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일화 중 하나이지만,
지금까지도 그 진위 논란이 뜨겁게 이어져 오고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정사’라 불리는 역사서 < 삼국지 >엔 칠종칠금의 내용은 등장하지 않고,
초반에 이회와 마충의 도움을 받아 남중을 정벌한 내용까지만 짧게 기술되어 있어,
이 기록만으로는 당시 정확히 어떤 일이 있던 건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정사에 없으면 없는 일이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는데,
“기록이 남아있는게 없으면 없는 일”로 치부하는 건 굉장히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정사’의 경우 대체적으로 사건들이 굉장히 짧게 요약되거나 생략된 경우가 많아,
주석이나 다른 역사서와의 교차확인 없이는 그 본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 ‘칠종칠금’의 경우도, 정사 < 삼국지 >에는 정확한 묘사가 없지만,
다른 역사서인 < 자치통감 >과 < 한진춘추 >, < 화양국지 > 등에선 ‘칠종칠금’이 언급되어 있고,
심지어 그것을 < 삼국지 >에 주석을 단 배송지가 인용하여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칠종칠금’이 사실일 수 있다고 보는 분석도 꽤 있는 편이다.
물론 배송지 등 ‘칠종칠금’을 믿는 후대 역사가들이 소설 < 연의 >에 나온
남만의 그런 신비로운 일화들을 전부 믿었다는 뜻은 아니고,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놔주고 일곱 번 사로잡은 것’ 그 자체만은 사실일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칠종칠금’을 암시하는 또 다른 기록이 있는데, < 양양기 >를 보면,
남중을 정벌하러 갈 때 제갈량이 마속을 따로 불러 전략에 대해 논의하였고,
이 때 마속은 제갈량에게 “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마음을 공략하소서.” 라고 간언을 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여 맹획을 사면하고 남중을 복종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칠종칠금’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 내용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남만인의 마음을 레이저로 공략 중이신 제갈승상)
한편, < 삼국지 집해 >에서는, 뭐 1~2번 정도야 놔줬다가 다시 사로잡을 수도 있겠으나,
그 짓을 일곱 번이나 했다는 건 동의하기 힘들다고 본다.
촉군은 멀리 원정을 왔기 때문에 속전속결이 중요한데다가,
‘칠종칠금’에 쓰일 시간이나 비용이 굉장히 과도할 것이기에,
뛰어난 내정가인 제갈량이 이를 결코 허락했을 리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시간과 비용’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촉나라는 남중 정벌 이후 북벌이라는 국운을 건 중대한 계획이 있었는데,
만약 북벌 중에 남중이 계속 반란하여 다시 정벌하러 내려가야 했다면,
그것보다 위험성이나 비용 낭비, 자원 손실이 높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정벌하러 내려갔을 때 최대한 반란이 다신 일어나지 않도록
아주 단단히 단도리를 쳐놓을 필요성이 있었는데,
‘칠종칠금’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맹획이 7번이나 촉군과 싸우면서,
나중에 반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남중의 유력 호족들을 촉군 앞으로 알아서 끄집어내 주었으니,
제갈량 입장에선 거의 자동사냥급으로 편리한 토벌일 수도 있었다.
만약 이들을 제갈량이 직접 색출하여 토벌해야 했다거나, 이들이 북벌 도중에 반란을 일으켰다면,
상대적으로 드는 시간과 비용이 당연히 더 컸을 것이기에,
칠종칠금이 오히려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유리할 수도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렇듯 ‘칠종칠금’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그 내용이 거의 신화적이기 때문인데,

실제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된 윈난성(운남)을 가보면,

리장타워로 떠납니다
윈난성은 고도가 높아 상춘기후가 유지되는 곳으로,
촉군이 겪었던 남만은 아마 이런 인디아나 존스에 나올법한 정글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맹호병이니 독천이니 그런 것들을 거르고
‘칠종칠금’ 자체로만 판단했을 때는 어느 정도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게 남중을 평정한 제갈량은 출사표를 쓰고 기산으로 나아가게 된다.
< 에필로그 > 만두(蠻頭)와 만두(饅頭)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강이 심하게 요동치어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는데,
이에 대해 남만인들에게 묻자, 강을 달래기 위해선 49명의 머리를 바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제갈량이 “우린 이미 수많은 남만인을 죽였는데, 또 죽일 순 없다.”면서,
남만인의 머리를 본 따 밀가루로 가짜 ‘만두(蠻頭:남만인의 머리)’를 만들어 강에 바치니
강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 때 만들었던 음식을 곧이곧대로 ‘남만인 머리(蠻頭)’라고 표기하기는 좀 섬뜩하니,
‘오랑캐 만(蠻)’자를 ‘속일 만(瞞)’자로 바꾸어 표기하다가,
후대에 와선 ‘만두 만(饅)’자를 만들어, 위 음식을 ‘만두(饅頭)’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가 실제로 있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 일화가 실제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때 만들어진 만두(饅頭)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두하고는 다를 가능성이 높은데,
중국에서의 만두(만터우)는 안에 아무 소가 안 들어가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먹는 속에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방식의 만두는
중국에선 교자(餃子:자오쯔)나 포자(包子:바오쯔)로 불린다고 한다.
※ < 삼린이를 위한 삼국지 용어 이야기 > 목록
- [ 제1편 : 계륵과 양수 ]
- [ 제2편 : 북벌, 출사표, 그리고 하후무 ]
- [ 제3편 : 백미와 읍참마속 ]
- [ 제4편 : 인생은 가후처럼(1부) ]
- [ 제5편 : 인생은 가후처럼(2부) ]
- [ 제6편 : 반골과 자오곡 ]
- [ 제7편 : 오하아몽과 괄목상대 ]
- [ 제8편 : “료 라이라이!” ]
- [ 제9편 : 칠종칠금과 만두 ]
- [ 제10편: 손제리와 이궁의 변 ]
- [ 제11편: 왕좌지재와 빈 찬합 ]
- [ 제12편: 진창성의 학소, 그리고 한신 ]
- [ 제13편: 추풍오장원 ]
- [ 제14편: 상방곡과 사공명 주생중달 ]
- [ 제15편: 꿀물과 호랑이(1부) ]
- [ 제16편: 꿀물과 호랑이(2부) ]
- [ 제17편: 꿀물과 호랑이(3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