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성군, 고려 현종 5화 [두 번 도망치지는 않겠다.]
들어가기에 앞서...
방장님,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편은 하이라이트라서 이전 편보다 분량이 많네요..
스압 죄송합니다..
5편. 두 번 도망치지는 않겠다.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하공진과 양규의 죽음으로
고려는 겨우 한숨 돌렸으나
현종은 거란의 요구에
전혀 응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란의 황제 성종은 겨우 체면을 지켜냈지만
자칫 압록강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황제는 순간 등골이 서늘하였다.
황제는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왕의 입조(직접 오라는 뜻)를 요구하였다.
고려는 두 차례 모두 왕의 건강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황제의 노여움이 온 황궁에 진동했다.
황제의 사위 소배압에게는 형이 있었다.
그는 형의 최후를 기억한다.
그의 형은 일찍이 고려 원정에 나섰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 돌아왔다.
그는 형의 그 당당한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공적에 취한 형은
추태를 부리다 결국 황실의 노여움을 사
처형당했다.
소배압은 형 소손녕의 최후를 기억한다.
그에게 강동 6주는 필히 돌려받아야 하는 땅이다.
거란이 물러간 후 약 7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현종은 평야에 위치한 개성의 둘레에
굳건한 성벽을 축조하고 송악산에도 산성을 올렸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백성들을 구휼하고
정규군의 수를 대폭 늘렸다.
또한 비참했던 몽진의 경험을 토대로
지방의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잿더미 위에서의 초라한 다짐이
점차 현실화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한 편,
그가 두 번이나 거란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서
또 다시 그들이 몰려 올 것은 분명했다.
현종은 다가올 침입에 대비하여
서북면을 담당할 총사령관을 올려보낸다.
일흔의 나이를 넘긴 강감찬이었다.
<강감찬 동상>
1018년 겨울,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정예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넌다.
흥화진에서 출병하여 매복한 강감찬군은
압록강을 건너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7년 전 흥화진의 신화를 이어나가는 승전이었다.
그러나 소배압의 거란군은 이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기마군의 장점을 살려
곧바로 개경을 향해 진격했다.
고려의 주력군을 피해 곧장 개경으로 내달리니
현종은 또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개경의 주둔 병력은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앞서 강감찬은 적이 곧장 개경으로 진격할 것을 대비해
길목 곳곳에 미리 별동대를 배치해뒀었다.
고려의 별동대는 적의 행군을
지옥의 행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거란의 병졸들은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다.
앞서갔던 부대가 도륙된 시신으로 발견되거나,
식량 보급을 담당한 후방 부대가 오지않아
길을 돌아가보니 식량은 이미 사라져있고
처참히 살해된 시신만이 즐비했다.
정신적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도
소배압의 군대는 개경으로 행군을 이어나갔다.
거듭된 고려 별동대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거란의 정예군은 기어코 개경 코 앞에 당도했다.
강감찬은 개경을 구원하기 위해
휘하 장수 김종현에게 1만의 기병을 이끌게 하고
빠른 시일 내로 개경을 구원할 것을 명한다.
추가로 동북면의 정예 병사 3천 3백을 개경으로
보낼 것을 명하는데
동북면의 병사들은 호랑이 사냥 등 수렵을 업으로 하는
당대 최정예 병사들이었다.
개경을 향한 거란과 고려의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긴박한 추격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소배압과 거란군은 추위와 굶주림, 공포를 이겨내며
개경에 당도했다.
지난 원정으로 미루어보아
이번에도 개경만 함락시키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란
믿음에서였을까.
개경의 신료들은 또 다시 혼란에 빠졌다.
7년간의 요새화 과정이 있었다고 해도
절대적인 수비 병력이 부족한 상황.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상당한 규모를 유지한 채
진격해온 거란군을 상대할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신하들은 현종의 결정만을 기다렸다.
현종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인근의 백성들을 성 안으로 들이고, 성문을 굳게 닫으라.”
그것은 두 번은 도망치지 않겠노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지난 침략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개경의 백성들은
왕이 남아 함께하기로 했다는
예기치 못한 소식에 사기가 한껏 올랐다.
삶의 터전에 들이닥칠 위협 앞에선
귀천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
개성의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적을 대비했다.
현종은 기어코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소배압과 거란군은 당황했다.
이전의 개성과는 달리 항전의 의지가 하늘을 찌르는
굳건한 요새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경을 치기만하면 끝날거라는 희망이
힘 없이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현종의 명령으로 인근의 백성들과 식량은
모두 개경의 성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황,
거란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빈 집과 곳간들 뿐이었다.
척후병들은 연일 고려의 구원군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왔다.
소배압은 군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소배압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은
그들이 지나쳐왔던 수많은 고려군이었다.
그들은 이미 너무 깊게 들어와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려군이 주둔한 거점을 피해
험한 길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물러나는 적병을 보며
개경의 백성들은 환호를 터뜨렸다.
가끔은 소수의 결정이 역사를 바꾼 때라든지,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있는데
저는 현종이 도망치지 않고 거기서 버텼다는 것을
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가, 역사를 움직인 순간.
정명섭.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강감찬은 각지에 퍼져있는 별동대에게
집결 명령을 내렸다.
적에게 지옥의 행군을 선물했던 별동대원들은
강감찬의 지령서를 펼쳐 들었다.
‘집결명령, 귀주, 신속을 요함.’
소배압과 거란군은 맹렬한 고려의 겨울을 뚫고
행군을 이어나갔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귀주를 지나야만 했다.
<거란의 배수진>
소배압과 거란군의 귀향길엔 중대한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고려의 20만 군병들이었다.
소배압은 귀주 평원에서 배수의 진을 펼쳤다.
그들 역시 결사의 의지를 불태웠다.
거란의 병사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강을 건너 도망쳐도 적의 땅이다.
고향의 가족들을 보려면 저들을 넘어야한다.’
그러나 이미 적에게 가족을 잃은 고려의 병사들은
결코 그들을 온전히 보낼 생각이 없다.
양 측의 군대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온 힘을 다해 맞부딪쳤다.
투지가 불타오르는 고려군 이었지만
상대는 중원을 휘저으며 수많은 성을 깨뜨렸던
요 제국의 정예군,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황은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혼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자칫하면 거란이 승기를 잡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날, 귀주에선 두 번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이때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난다.
앞서 강감찬의 명을 받고 개경 구원을 위해 출정했으나
집결명령에 응답하지 않아 행방불명 상태였던,
김종현의 1만 기마대가
혼전의 귀주 평원에 출현한 것.
두 번째 기적도 함께 찾아오는데
남쪽에서 김종현의 기마대가 등장하자
전투 내내 불어오던 북풍이
남풍으로 바뀌며 거란군에게 역풍이 되었고
거센 비도 함께 쏟아진 것이다.
<기적같이 등장한 김종현의 1만 기마대>
비바람과 함께 등장한 김종현의 1만 기마대는
순풍을 타고 거란의 후방으로 돌격하였다.
이 돌격에 수많은 침략군이 처단되었다.
(2009년 KBS역사스페셜에서 해당 기상현상을 기상청에 문의했고
활강형 한랭전선과 비슷하다는 응답을 받았다.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을 당시 측정한 풍속은 20m/s 이상에 달했다.)
<포위섬멸전>
전의를 잃은 거란군은 전열에서 이탈하여
저마다 살 곳을 향해 도망쳤다.
고려군은 거란의 패잔병들을 사냥감 몰 듯 몰아
한국사 역대 가장 큰 규모의 포위섬멸로
길고 길었던 거란의 침입에 마침표를 찍었다.
10만의 거란병 중 살아 돌아간 자는 2천 명에 불과했다.
겨우 목숨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넌
소배압은 요 성종의 노여움을 사 파면 당했다.
현종은 직접 강감찬을 마중나가 극진한 대우을 하였다.
군왕의 체면은 신경쓰지 않고
영웅에 대한 극진한 대우를 하니
훗날 이순신 장군에게도 이러한 임금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려를 다시 세우고 절망 속에서 일어나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전성기 요 제국의 침입을 이겨낸
현종, 그의 나이 27세였다.
-다음 에피소드-
저가요..
원래 이번 편을 둘로 나눠서
6편에도 실을 생각이었는데요
이번 편에 다 적어서
다음 편엔 많이 적을게 없을 거 같아요..
죄송해요 그래도 고려 사랑하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