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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소레와 후지산 데스까

시베리안보이
03.17
·
조회 123

“소레와 후지산데스까?” 중학교 이후로 열어보지 않은 머릿속 서랍을 뒤적이며 찾은 단어들을 조합한 문장이었다. 문장이 제대로 완성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옆에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던 남성분이 고개를 돌림으로써 그의 고막에는 제대로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처럼 홀로 에노시마 섬을 여행하는 듯한 그는 나를 쳐다보며 그렇다 대답하곤 본인의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는 내가 찍은 사진과 같은 구도로 찍힌 사진이 보였다. 내 사진과 비교해 다른 점은 후지산이 보이는가 아닌가였다. 그는 곧 “구름에 있어서 잘 안 보이지만, 저기에 분명 후지산이 있다”라는 듯한 말을 하며 두 손가락을 이용해 화면을 확대했다. 그는 다시 손으로 섬에서 가장 높은 부분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 식당에 가면 후지산이 더 잘 보일 거라고 했다. 나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괜찮다는 마음이 있어, 고맙지만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대답하고 파도가 부딪치는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어릴 적,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부모님 생신이면 편지를 써 드렸다. 집에서 비교적 대화를 자주 나누던 어머니에게는 ‘생신 축하드린다’, ‘사랑한다’ 등의 간단한 문장을 적었다. 반면 “다녀오겠습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다녀왔습니다”, “다녀오셨습니까” 이 네 마디 말고는 전혀 말을 나누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꼭 이 문장을 덧붙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를 존경하는 거 알고 계시죠? 제 마음을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는 그 문장을 방패 삼아, 20년이 넘게 아버지와 별 대화를 안 했다. 마치 저 멀리 후지산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처럼, 마음이 있기만 하면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몇 년 전 러시아에서 유학할 때였다. 어느 날 생각지 못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있는 단체 채팅방에서 여전히 별말을 안 했다. 보이지 않아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걸,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을 때 생존 신고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매일 아침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진영이, 새봄이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되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그럼 이에 대해 다른 가족 구성원은 각자의 방법으로 본인도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모티콘으로, 동생은 숫자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이때야 서로 안녕히 존재함을 확인하기 위한 안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처음 며칠간은 보내기 쉽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드려 메시지 칸을 채워도 정작 전송 버튼을 누르기는 망설여졌다. 그래도 이름 모를 창피함(?)을 참고, 꾸준히 전송 버튼을 누르며 안부를 전했다. 몇 년간 그렇게 아침마다 저 세 문장을 보내다 보니, 어느 날은 기계처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는 내가 아닌 아버지가 파주에서 홀로 개인 사업을 하고, 동생은 호주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으니 떨어져 지내는 다른 사람의 안녕을 알 수 있었으니까. 보이지 않아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을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을 감수하던 것처럼 불편함을 이기고 꺼내서 보내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다음 날 지역을 이동해 후지산이 더 잘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이 생각보다는 높아서 쉽진 않았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내던 부끄러움보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더 가벼웠기 때문에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꼭대기에 도착해 바라본 하늘은 어제와 같이 쨍쨍했고, 구름은 많지 않았다. 맑은 하늘 아래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는 후지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확실히 눈으로 보니 알 수 있었다. 후지산은 굉장하다는걸. 전날보다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내 머릿속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보다 시원해졌다. 그리고 내가 또 머릿속 어느 서랍에 넣어둔 채 잊고 있는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물결쳤다. 그게 안부든, 문장이든, 혹은 원하는 삶이든.
 

p.s 아참,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와도 대화를 잘한다. 몇 년간 꾸준히 보낸 아침 문자 덕분인지, 아버지의 호르몬 변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생일 혹은 명절에 전달하는 카드에는 굳이 그 문장을 덧붙이지 않는다. 깔끔하게 생일 축하한다 혹은 건강하라 등 간단한 문장만 적어 전달한다

 

이상 모든 회원님의 취미를 응원하며, 글쓰기를 마치오리다.

태그 :
#에세이
댓글
침크빈
03.17
진영이 새봄이에서 동생이 둘인듯 하였는데
새봄이는 반려동물인가요?
시베리안보이 글쓴이
03.18
맞아요 저의 집 강아지입니다요.
무플방지위원회수석연구원
03.19
글월이 뭉친 탓에 가독성이 나우 낮다는 것만 빼면, 퍽 좋게 읽었소
시베리안보이 글쓴이
03.19
읽어주셔서 고맙소이다. 소중한 피드백 겸허히 받아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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