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용어 설명회 > 금범적과 담소자약
오늘은 오나라의 미친놈 한 명을 소개해드리려 한다.

방울소리. 감녕 되시겠다.
감녕은 해적이었다.
어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직업이 해적(수적)이었다.

감녕은 어릴 때부터 기개가 있었고 유협(游俠)을 좋아하였으며,
무뢰한을 불러 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
사람들과 만나거나 그 성의 지방 관원과 만날 경우에,
융성하게 접대하면 곧 그와 즐겁게 교제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하에 있는 자들을 풀어 그의 재물을 빼앗았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물론 감녕이 그냥 이러고만 돌아다녔으면
저질 쓰레기 도적놈으로 끝날 인생이었는데,
감녕은 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감녕의 무리들은 활과 화살을 지니고 등에 깃털을 꽂고 허리에 방울을 차고 다녔다.
백성들은 방울소리가 들리면 즉시 감녕임을 알았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감녕이 뭍에 나올 때는 수레와 말을 펼쳐놓고 물 위엔 빠른 배를 연이어 놓았으며,
시종하는 자들은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어 마치 길에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정박할 때면 항상 비단으로 배를 메어놨다가 떠날 때 이를 잘라 버려서 사치함을 보였다.
- < 오서 > -
일단 꽤나 관종에 스타성이 있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해적단의 규모도 꽤 크고 비단으로 사치할만큼 위세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감녕의 해적단을 ‘금범적(錦帆賊)’이라 불렀다.

익주 파군(현재 충칭 부근) 출신 감녕 해적단은 비단 돛을 펴고
위대한 항로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도적질 모험을 떠났다.

그렇게 크게 한탕 해가던 감녕은
나이를 점점 먹어가니 새로운 꿈이 생겼는데

이제 슬슬 감녕도 안착하고 싶어진 것이다.
뭐 백날천날 떠돌이생활 하긴 힘들테니 말이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유표를 찾아가 임관을 요청했는데

당연히 받아줄리 없었다.
유표의 가오문제도 있겠거니와,
도적집단을 함부로 받았다간 역으로 닦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감녕은 언제나 일손이 부족한 최전방의 황조를 찾아갔지만

황조는 한 술 더 떠서 감녕을 베껴먹을 생각만하고 절대 벼슬은 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름 손오군에서 잘나가는 장수였던 능조를 쏴 죽였음에도

대우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를 황조의 오른팔이었던 소비는 상당히 안타깝게 보고 있었는데,

소비는 감녕을 불러 넌지시 동오로 떠나라 제안한다.
황조의 도독 소비가 수차례 감녕을 천거했으나, 황조는 감녕을 쓰지 않고
사람을 시켜 감녕의 부하[客]를 유혹하니, 부하들이 점차 (황조에게로) 도망갔다.
감녕은 떠나가고 싶었으나 붙잡힐까 두려워, 홀로 걱정하며 나갈 바를 몰랐다.
소비가 그의 뜻을 알고 감녕에게 술자리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그대를 천거한지 여러 차례였으나, 주인이 쓰질 않고 있소.
해와 달은 계속 넘어가고 있으니,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이제 마땅히 먼 곳으로 가 도모하면, 그대를 알아주는 이를 만날 것이오.”
- < 오서 > -
그렇게 소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동오로 넘어간 감녕은 드디어 그렇게 원하던 벼슬을 얻는다.
소비의 말대로 감녕의 쓰임새를 잘 아는 훌륭한 지휘관들이 손권군엔 있었으니,
이에 감녕은 오나라로 귀순했다. 주유와 여몽이 모두 그를 천거했다.
손권은 감녕을 옛 신하와 같이 우대해 해주었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감녕은 감격하여 손권에게 큰 선물을 바친다.
감녕이 손권에게 계책을 말하였다. …
“응당 황조를 먼저 취하셔야 합니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바로 엊그저께까지 황조 밑에서 굴러먹던 놈이니, 쳐들어가긴 얼마나 쉬웠겠는가?
피의 복수 시간이었다.
감녕의 말에 손권은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과연 황조를 체포했고 그의 병사들을 모두 붙잡았다.
손권은 곧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當口)에 주둔하도록 했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그리고 은혜도 잊지 않고 갚았다.
황조를 격파한 후 손권이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감녕은 좌석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피눈물을 흘렸다.
"소비는 저에게 은혜를 베푼 자입니다.
소비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길가에서 죽어 장군 휘하에서 목숨을 바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비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장군께서 특별히 그의 머리를 저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손권은 감녕의 말을 듣고 물었다.
"오늘 그대를 위해 소비의 죄를 묻지 않았다가,
소비가 달아난다면 어쩌겠소?"
그러자 감녕이 말하였다.
“ … 그렇다면 저의 머리를 대신 상자에 넣겠습니다.”
손권은 소비를 사면해 주었다.
- < 오서 > -
이렇게만 보면 ‘오 ㅅㅂ 존나 멋있는 놈 아니야?’ 싶을 수 있다.
물론 감녕이 이런 멋있는 대목들이 간간히 있긴 한데...
해적질하던 시절 성격을 못 버리고 염병을 떨 때도 많긴 했다.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던 아이가 잘못을 하자 여몽에게 도망가 의탁했다.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까 두려워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감녕이 예물을 가지고 여몽의 모친께 절하고 함께 당(堂:거실)으로 오니,
이에 여몽은 아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아이를 죽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배로 돌아가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그러곤 뱃사람들에게 닻줄을 내리라 명한 뒤, 옷을 벗고 배 안에 드러누웠다.
여몽은 대노하여 북을 치고 병사를 모아 배 위의 감녕을 공격하라 하였다.
감녕도 이 소식을 들었지만, 일부러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 여몽의 모친이 맨발로 달려나와 여몽을 말렸다.
“지존(손권)께서 너를 골육같이 대우하고 너에게 대사를 위임했는데,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감녕을 공격하여 죽이고자 하느냐?
설사 지존께서 널 힐문하지 않더라도,
감녕이 죽게 된다면 너의 이런 행동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여몽은 본디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어머니의 말을 듣고 마음이 풀려,
직접 감녕의 배로 가서 웃으며 감녕을 불렀다.
“흥패(감녕의 자), 어머니께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니 빨리 올라오시오!”
감녕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경을 저버렸소.”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살인도 살인이지만 거의 하극상에 가까운 감녕의 패기가 놀랍기 그지없다.
여몽이 참은 이유는 뭐 효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릇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여몽은 대국적인 판단으로 감녕을 참아준 듯하다.
감녕은 난폭하고 살생을 좋아해 이미 여몽의 뜻을 잃었고,
또한 손권의 명령을 어기기도 해서 손권이 노하였다.
하지만 여몽이 번번이 청원하며 말하길,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감녕같은 장수는 얻기 어려우니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라 했다.
이에 손권이 감녕을 후히 대하며 감녕이 계속 쓰임을 얻게 되었다.
- < 삼국지 오서 > 여몽전 -
여몽이 매번 감녕을 참아주고 비호해 준 가장 큰 이유.
어쨌건 이 새낀 실력은 진짜였던 것이다.

여몽은 주유 밑에 있던 시절부터
감녕의 활약을 봐왔기에 감녕을 버릴 수 없었다.
적벽에서의 승리 후 오나라는 그 기세를 타고 조인이 지키는 남군을 공격한 적 있었다.

하지만 조조군이 참패한 직후라도
조인이 워낙 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놈이라 주유도 고전을 하였는데,
이 때 감녕은 조인(남군)의 후방에 있는 이릉으로
별동대를 우회시켜 조인의 어그로를 끌자고 제안한다.

감녕이 이릉을 차지하게 되면, 남군이 완벽하게 포위되는 셈이니
조인은 반드시 이릉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올 것이고,
이 때 주유가 남군을 차지하고 조인을 정리하면 된다는 구상이었다.
주유도 물론 이 전략이 매우 옳다고 여겼지만,
오나라 군대는 이제 막 조조의 대군을 막아낸 터라
없는 살림 모아모아 조인을 치러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이 작전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감녕은
“그럼 병사를 조금만 데려가면 되잖아?”하며,
아주 소수의 병력만으로 이 작전을 성공시킨다.
남군에서 조인을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감녕은 주유에게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가서 그 성을 얻은 뒤 들어가 성을 지켰다.
당시 (감녕의)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고
(이릉에서) 새로 얻은 병사를 합치니 겨우 1천 명이었다.
조인이 곧 5, 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 간 계속된 공격을 받았는데, 적이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 화살을 쏘았다.
이에 병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오직 감녕만은 태연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감녕은 수백의 병사만으로 이릉을 탈취하고
이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여 오군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 일화로 인해 ‘담소자약(談笑自若)’이라는 고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이후로도 촉군과 형주에서 일촉즉발 대립을 했던
‘익양대치’때도 관우에 대항하여 큰 활약을 하였고,

이어지는 유수구 전투에선 거의 드라마틱한 전공을 세운다.
조조가 유수로 출병했을 때, 감녕은 전부독(前部督)이 되어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손권은 특별히 쌀과 술, 많은 안주를 하사했다. 감녕은 이것을 수하 1백여 명에게 내려 먹도록 했다.
… 이경(二更)이 되었을 때 감녕과 군사들은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적을 쳐부수러 갔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조조가 병사[步騎]를 40만이라 칭하며 유수로 출전하니,
손권이 7만으로 응전하면서, 감녕에게 3천명을 주고 전부독으로 삼았다.
손권이 비밀리에 감녕에게 명령을 내려 밤에 위군(진영)으로 난입하게 하였다.
감녕이 수하의 건장한 병사 1백 명을 골라, 빠른 길로 조조의 진영 아래로 가서,
녹각(鹿角)을 불며, 보루를 넘어 진영에 들어가 수십 급을 참수했다. …
돌아와 손권을 알현하니 손권이 기뻐하며 말했다.
“늙은이를 너무 놀라게 한 것 아니오? 오로지 경의 담력만 지켜봤소.”
그리고 비단 1천 필과 칼 1백 자루를 하사하며 말했다.
“맹덕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에겐 흥패가 있으니, 족히 상대해볼만하다!”
북군(北軍:조조군)은 한 달여를 머무르다 곧 물러났다.
- < 강표전 > -
이 유수구 전투 직전에 전설의 합비 꼴아박기가 있었던 터라,

오군이 위군을 상대로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는데,
감녕의 이 전공 덕분에 크게 기세를 되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재밌는건 이 빛나는 전공을 세운 뒤 감녕은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료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데,
아마 이 전투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인생대로 갈 때마저도 참으로 호방하게 가신 듯하다.
그럼 끝으로, 정사에 적혀있는 감녕의 인물평으로 이 글을 맺도록 하겠다.

감녕은 비록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지만, 호방하고 쾌활하며 계략이 있었다.
그는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병사들을 존중하며 유능한 인물을 후대하였기에,
병사들 또한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 < 삼국지 오서 > 감녕전-
※ < 삼린이를 위한 삼국지용어 설명회 >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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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편: 북벌, 출사표, 그리고 하후무 ]
- [ 2-2편: 백미와 읍참마속 ]
- [ 3편: 인생은 가후처럼(1부)][(2부)]
- [ 4편: 반골과 자오곡 ]
- [ 5편: 오하아몽과 괄목상대 ]
- [ 6편: “료 라이라이!” ]
- [ 7편: 칠종칠금과 만두 ]
- [ 8편: 손제리와 이궁의 변 ]
- [ 9편: 왕좌지재와 빈 찬합 ]
- [ 10편: 진창성의 학소, 그리고 한신 ]
- [ 11-1편: 추풍오장원 ]
- [ 11-2편: 상방곡과 사공명 주생중달 ]
- [ 12편: 꿀물과 호랑이(1부)][(2부)][(3부)]
- [ 13-1편: 사마의와 조상, 그리고 흥세산 ]
- [ 13-2편: 고평릉 사변 ]
- [ 14편: 금범적과 담소자약 ]
- [ 15편: “승상은 유부녀를 좋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