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부족한 지식으로 이만큼 왔네요
아무쪼록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재미 위주로 적으려했는데
등장하는 이들이 워낙 위대한 사람들이라
절로 경건해져서 그러지 못 했습니다..
4편. 힘 없는 왕의 몽진
1010년 겨울, 개경의 궁궐 만월대.
겨울이 깊어갈수록 뼈를 시리게하는
추위는 그 기세가 점점 강해져만 갔다.
산짐승이 추위를 피해 굴 속으로 숨 듯
만월대의 적막한 공간에 모여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즉위한지 겨우 1년 남짓의 꼭두각시 왕 현종과
적병의 남하 소식에도 궁궐에 남은 신하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마저 항복을 간청하며 조아리자
현종은 황망하기 그지 없었다.
고뇌에 잠긴 현종을 사이에 두고 신하들의 설전이 오갔다.
“통주가 깨졌으니, 더는 방도가 없소.”
“그러게 내 진작에 항복을 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듣리는 말로는 서경도 적병에 넘어갔다고 하니 이를 어찌하오.”
소란에 못 이겨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약 20여 년 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있었다.
겁에 질린 신하들과 고뇌에 빠진 임금.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킬 서희와 같은 신하는
정녕 없는 것인가..
그때 한 늙은 신하가 나서 현종에게 아뢰었다.
“전하! 아직 흥화진(강동 6주의 하나)의 양규 장군이 굳건히 버티고 있사오니
머지않아 흩어진 군병들을 수습하여 적의 배후를 치고
전하를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항복을 삼가시고 옥체를 보전하소서.”
예순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노신(老臣) 강감찬(姜邯贊)이었다.
불편한 적막을 깨고 현종은 말하였다.
“강감찬 공의 말을 따르겠소.”
한편, 흥화진에서는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양규는 3천의 병력으로 거란의 40만 대군에 맞서고 있었다.
흥화진이 끝내 깨지지 않자
요 성종은 거짓으로 강조의 편지를 만들어
흥화진의 양규에게 항복을 권한다.
흥화진의 양규는 답서를 적어
요나라 진영으로 보내니,
“나는 왕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은 받지 아니하노라.”
그러자 요 성종은 흥화진 근방에 절반의 병력을 남겨두고
남은 절반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남긴 거란의 20만 대군이
승전보를 울리는 일은 없었다.
흥화진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성에서 출발한 현종의 몽진은
결국 전라도 나주까지 이르렀다.
나주에 당도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현종의 곁을 지키고 있는 신하는
겨우 50명 남짓이었다.
(고려는 조선과 다르게 아직
중앙정부의 힘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건국은 각지 호족 세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고려의 왕은 지방에선 그리 권력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이해를 위해 전쟁민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 드는 거에요.”
-전쟁민수 임용한
하물며 현종은 강조에 의해 옹립된,
철저히 정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도구였으니
꼭두각시 왕을 향한 호족들의 비아냥은
개방장의 돌림과는 궤를 달리 하였다.
심지어는 아랫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군사가 몰려온다고 외치게 한 뒤
당황하는 현종 일행을 보며 히죽거리는 이도 있었다.
거란의 군대는 개성에 진입하여
살인, 약탈, 방화, 강간을 일삼았다.
고려의 수도는 일순간에 폐허로 전락하였다.
현종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거란과 강화를 시도하였다.
하공진은 거란의 진영으로 가 말했다.
“고려의 땅은 남쪽으로 수천 리에 달하니,
우리 임금은 이미 까마득이 남쪽에 있을 것이오.”
하공진의 말에 요 성종은 고려의 항복을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다.
요 성종이 군을 돌리기로 한 이유는
후방에서 다시 고려군을 규합하고 있는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존재와
하공진 스스로가 볼모로 나서
고려 국왕이 직접 거란의 수도로 와 머리를 조아릴 것을
보증했기 때문이다.
훗날 하공진의 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된 요 성종은
끊임없이 하공진을 회유하지만,
하공진은 요 성종을 약올리며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뿐이었다.
분노한 요 성종은 하공진을 처형시킨다.
목숨과 맞바꿔 고려를 살린 충신의 최후였다.
한편 거란의 군대가 철군한다는 소식은
북방의 흥화진에까지 들려왔다.
결사항전을 이어나가던 양규는
이들을 결코 온전히 보낼 생각이 없었다.
끊임없는 게릴라전으로 거란의 후방을 위협했던 양규.
그가 구출해낸 고려인만 3만여 명에 이르렀다.
계속된 구출 작전 수행 중
요 성종의 본대가 근접하여 포위를 시도하자
양규는 망설임 없이 부대를 이끌고 타격한다.
그의 부대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절히,
마지막 한 명까지 거란의 군대에 맞서다 전사했다.
양규의 부대가 굳이 철군하는 적군을 상대로
퇴각 없이 처절히 싸웠던 이유는
구출해낸 고려인 포로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뒤를 이어 흥화진의 수비병력들이 출병하여
압록강을 건너는 거란의 군대를 공격했다.
이때 압록강에 수장된 거란의 병졸들이 아주 많았다.
<겨울의 압록강>
전후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에게 직접 조서를 써,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하였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의 벼슬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잿더미가 된 개경에서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온 백성의 원망과 절규가 들려오는 듯 귀가 먹먹했다.
그러나 전쟁은 권력자 강조를 제거해주었고
진정한 충신이 누구인지를 알게해주었다.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
비로소 자유를 찾은 현종은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고려를 다시 세우리라.
속으로 되뇌었다.
-다음 에피소드-
개인적으로 양규에 대해서는
횐님들이 꼭 따로 찾아봐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위대한 장수입니다.
4편까지 왔네요.
응원 감사합니다.
한편으론 부족한 지식에 잘못된 정보를 드릴까봐
걱정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