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이 영화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 다니엘스라는 두 영화감독 콤비의 존재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낯이 볶아오네요…
‘헤어질 결심’ 이후 영화민수의 2022년 두 번째 만점작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저는 이 영화를 봐야한다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물론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 영화도 존재하다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영화민수께서 강하게 언급하신 작품들이기 때문이었죠.
영화민수 덕분이 아니었어도, 다른 매체를 통해 이 영화를 접해서 어찌되었든 간에 관람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를 알려준 매체를 대단히 감사해 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대단히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는 맥시멀리즘 영화입니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형식 과잉’일 것이겠지요.
알파버스라는 우주로부터 온 남편 웨이먼드의 원조(援助)로 우주와 우주를 옮겨다닐 수 있는 이른바 ‘버스 점프’를 습득하게 된 에블린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을 만든 악당 조부 투바키이자, 딸인 조이의 악행을 막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무엇이 많겠지만,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를 정리하자면, 간단하게 가족, 또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에블린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절대로 자존심이 꺾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시아인들을 향한 인종차별로부터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 애인을 갖고, 점점 그런 차별들이 개방적인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모르는 에블린은 그런 차별의 변화와 깊이 얽혀있는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던 도중, 웨이먼드로부터 다른 운명의 다른 자신을 볼 수 있게 된 에블린은 그 모든 것과 모든 곳을 한꺼번에 경험한 뒤, 즉 세상 변화의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 경험한 뒤에 진정하게 딸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영화 초반에서 에블린은 온갖 물품들에게 장난감 눈알을 붙이는 남편 또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우주를 제쳐오고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조이를 막기 직전, 그런 남편 또한 이해하게 됩니다.
가운데 하얀 구멍이 뚫린 검은 베이글과 장난감 눈알은 반전되는 형태죠.
장난감 눈알로서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사람 또는 사물을 다루는 방식인 사랑을 배우게 되고, 자신의 이마에 장난감 눈알을 붙인 채, 조이를 사랑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중우주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마치 군상극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는 ‘화양연화’, ‘라따뚜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유명 영화들을 오마주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이 얽혀 있습니다.
그런 하나 하나의 이야기들도 독특한 감수성으로 기이한 파토스를 관객으로부터 불러일으키게 되죠.
특히 에블린과 조이가 아무런 생명체가 없는 유니버스의 절벽 위에서 돌이 되어 침묵의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은 개성적이고 또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과, 모든 곳을, 한꺼번에’라는 영화의 기본 설정을 보면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서 영향을 매우 강력하게 받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이렇게 글을 많이 써내려가지만 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한 것이 없다고 봐도 됩니다.
영화의 형태처럼 이 감상문도 너무 낭자하게 흩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이 미숙한 글처럼 어지러이 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들이 흩어져 있어도 결국 하나의 주제로 모든 것들이 수습되는 영화입니다.
그런 면에서 얇은 은박지 수십 장이 뭉쳐져 만들어진 밀도 높은 쇠구슬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어요.
이미 보실 분들은 다 보셨겠지만, 혹시 못 보신 분들은 꼭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