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싱을 아십니까? (개같은 유사과학에 대하여)
안녕하십니까.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이상향에 살고계신 여러분들.
저도 21세기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청자로서
조회수 1879만회의 침투부 걸작, 유사과학 월드컵을 보며 낄낄대는 삶을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 영상을 보며 웃질 못합니다.
그 빌어처먹을 유사과학놈이 저희 집구석 안방까지 기어들어왔거든요!
여러분, 어싱을 아십니까?
저는 알고싶지 않았습니다만, 이젠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저희 가족은 할머님과 같이 살고있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꽤나 신문물에 적응이 빠르신 분이셔서 자제분들이 사주신 갤탭으로 유튜브를 곧잘 보십니다.
“TV는 광고천지에 재미가 없는데 이건 광고도 없고 골라 볼 수가 있어서 좋구나!” 라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 하기도 했습니다.
딱히 걱정할 것도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관심분야는 신부님이나 스님들의 인생강의,
요리법이나 인간극장같은 다큐들이었거든요.
제가 알고리즘도 철저히 관리해 렉카같은 이상한 채널들은 뜨지 않았고요.
그런던 어느날, 온오프라인상으로 중장년층 사이에 맨발걷기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집 근처 공원에 맨발로 걷는 분들이 늘고, 유튜브에도 관련영상이 유행을 탔습니다.
유행에 민감한 저희 할머니도 자연스레 흐름에 올라타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꽤나 효과도 보셨습니다. 플라시보일 수도 있지만요!
할머니가 좋아하시고 아프다는 말씀도 적어지시니 저희 가족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응원해 드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몰랐습니다.
맨발걷기는 트로이의 목마에 불과했다는 것을요.
늦가을이되고 밖에서 맨발로 걷는게 힘들어지자 그놈은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의 알고리즘에 어싱이란 것이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싱이 대체 뭐냐?
영어로 지구! earth에 ing를 붙인 단어입니다.
맨발걷기는 우리의 몸을 땅에 '접지'했기 때문에 좋은것이라는 이론..입니다.
활성산소를 어쩌구 음전하를 어쩌구 20년전 미국 어쩌구 이론을 집대성한 서적에 과학적인 근거를 어쩌구 하이구 세상에나.
그야말로 유사과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글이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더랍니다.
생명과학과를 나온 저로선 치를 떨게 만드는 헛소리지만 할머니께 4년간 배운 전공지식을 전수해드리기가 그리 쉽겠습니까?
그래 아무렴 어떠냐 플라시보인지 뭔진 몰라도 효과를 보고 계신 것이 중요한거지.
라며 좋게좋게 넘어가려 했습죠.
그런데 이 어싱을 이용한 겨울철맨발걷기의 대안이란 것이 아주 골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겨울엔 맨발로 걸을 수 없으니! 구리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접지를 하면된다!나 뭐라나요?
그리하여 출시된 어싱지팡이!(14만원) 어싱신발!(18만원) 일반신발을 어싱신발로 만들어주는 어싱 스트랩!(4만원) 어싱양말!(한켤레3만원)
이때를 기회로 우후죽순 쏟아져나오는 제품들은 물론이요,
이 가격을 부담할 수 없는 이들은 위한 DIY 튜토리얼들이 유튜브에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이놈들에게 ‘채널추천안함’형을 선고했으나 이미 할머니는 깊은 인상을 받으신 뒤였습니다.
알뜰하신 할머니께선 사는건 필요 없고 이것들을 만들어달라 졸라대셨지요.
이것들은 말이 안된다고 말씀드려봤지만 맨발걷기로 효과를 보신 할머니의 건강을 향한 집념은 꺾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제가 져드려야지요.
‘플라시보 이 개같은놈, 일 똑바로 안하기만 해봐라’ 라고 되뇌이며 할머니가 픽하신 튜토리얼 영상을 보고 저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 졌습니다.
왠 아저씨가 콘센트 접지단자에 구리선을 엮고! 그 구리선을 구리판에 달고! 맨발을 대며 만족스럽게 껄껄대고 있더랍니다.
구리는 저항이 없어용 헛!헛!헛! 이지랄로 웃으시며 말이죠.
그 순간 저는 그 아저씨께 접지단자말고 구멍에 직접 젓가락을 꽂아주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습니다.
유튜브는 뭐하나 모르겠습니다.
감전자살 튜토리얼이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말이죠.
저는 까무러치듯 난리를 쳤고, 그래도 감전위험에 대한 설명엔 수긍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싱에 대한 환상이 사리지신 건 아닌 것 같더군요.
사실 머리가 식고보니 그 환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손자된 입장에선 맞는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나이는 드시고 몸은 안좋아지시는데 건강해지실 수 있다는 희망을 뿌리뽑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도 그래서인지 그려려니 하시는 눈치더군요.
결국 저는 타협을 선택하고 위드유사과학을 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공수한 뽕나무가지에 구리선을 달아드렸고
(뽕나무가 그렇게 좋다지 뭡니까)
지금은 과학사에서 파는 구리판에 구리선을 연결하는중으로 추운 겨울에도 그놈의 어싱이란 것을 하실 수 있게 해드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콘센트 접지단자엔 연결 안했고요,
수도관에 연결하는 꿀팁영상이 있길래 배웠습니다.
고맙지만 그 채널이 더 이상 추천되는 일은 없을겁니다.
여러분, 여러분 모두 가족친지분들께 관심가지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의 부모님, 조부모님, 일가친척이
유사과학에 속아 거액을 지출하시거나 감전사의 위험에 처해 계실지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을 목격하셨지만 설득이 힘들다면 차라리 저처럼 DIY로 효자타이틀이나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비타어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