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국지에 안나온 DLC 수춘삼반 3 : 제갈탄의 난
- 제갈탄의 난(257년) -

마지막 세번째 반역을 일으킨 제갈탄은
조비 대부터 관직에 있었으며 조예를 거쳐 조방 대에 이르러서는
대장군인 조상이 정권을 잡자 핵심 인물로 올라선다.
조상일파가 중앙에서 개판을 치고 있을 때 상서의 자리에 있다가
양주자사로 임명되어 위나라의 핵심 방위지역인 수춘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 덕분에(?)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일파가 쓸려 나갈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사마의도 제갈탄을 견제하는 한편 계속 기용하였고
왕릉의 난 → 관구검의 난을 거치며 위군 내의 영향력을 공고히 한다.
누군가 ‘역사는 인류의 오답노트’라 했던가
앞서 본인과 친했던 인물들이 사마씨에게 썰려나가고
이에 반기를 들었던 관구검이 반란을 실패하는 걸 보며
많은 걸 느꼈던 제갈탄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양주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풀며 민심을 얻기 시작한다.

한편, 사마소는 조정을 장악하고도 여전히 제갈탄을 불안히 여기던 와중
제갈탄이 양주 일대에서 민심을 모으려 하고 있단 소식을 듣게 되고
군사였던 가충을 수춘에 사자로 보내 제갈탄의 의중을 떠보기로 한다.
가충이 수춘에 도착하여 제갈탄에게
‘혹시 낙양에서 왕위가 조씨에서 사마씨로 넘어간다면 어떨 것 같냐’고 떠보자
제갈탄은 '나는 이미 위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를 저버리고 황실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다.
듣고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위 황실에 목숨을 받칠 것'이라 답한다.

가충이 이 말을 듣고 낙양으로 돌아와 사마소에게 전하며
‘제갈탄이 더 준비 하기 전에 그를 쳐서 더욱 큰 화가 생기는 걸 막아야 한다’
조언하자 사마소는 이를 받아들여
제갈탄에게 사공 지위를 내리며 낙양으로 올 것을 명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 눈치챈 제갈탄은 당연히 이를 받아 들일 리 없었고
바로 거병을 일으켜 당시 양주자사로 있던 악진의 아들, 악침을 급습해 참살하며
수춘에 주둔하게 되는데 이렇게 제갈탄의 난이 시작된다.

제갈탄은 확실히 관구검의 난에서 배운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주로 북방에서 활약하다 회남지방으로 온 관구검이
주변 민심과 군벌의 지지없이 섣불리 난을 일으켰다면
제갈탄은 오랜 세월 회남지방에 머물며 명성을 쌓았음에도
재물을 풀어 더욱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또 관구검과 달리 오나라와 동맹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
오히려 지원군을 요청하여 사마씨와 맞서려 했다.
하지만 오답 노트를 끝까지 보지 않았던 걸까?
제갈탄은 수춘을 점령한 후 공세로 전환하지 않고
주변에서 둔전을 하며 모은 병력과 식량을 비축하고 성문을 걸어 잠근 뒤
오나라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수춘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당시 오나라는 손준이 요절하여 사촌동생인 손침에게 권력이 넘어간 상태였는데
손침은 제갈탄의 요청에 호응하여 관구검의 난 당시 투항했던 문흠, 문앙, 문호와 함께
전단,전역, 당자, 주이 등을 여강에서 출전시킨다.
당시 제갈탄이 끌어모은 군세와 오나라 지원군을 합하면 20만이 넘는 대군이었기에
사마소도 위나라의 가용병력을 전부 끌어모아 종회, 가충을 군사로 삼고
왕기, 주태, 석포 ,호분 등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는데 이 군세도 20만이 넘었다 전해지니
일개 반란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위나라의 내전에 가까운 규모였다.
우선 문흠 부자가 미리 군을 끌고 수춘에 합류하였고
뒤이어 도착한 위나라 토벌군이 당연하게도 수춘을 포위하였다.
이때 가충은 사마소에게 '수춘을 둘러싸는 해자를 만들고 망루를 높게 쌓아 공격하면
역으로 적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여 쉽게 이길 수 있다' 진언하였고 사마소는 이를 채용한다.

가충의 계책으로 문흠과 제갈탄은 수춘의 포위망을 쉽사리 풀지 못했고
이에 전부독(대도독)에 임명된 주이가 이끄는 오나라 본대가 수춘을 구원하기 위해 북상하지만
왕기까지 갈 것도 없이 석포, 주태에게 연이어 패배를 거듭하며 패퇴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퇴각하던 중에 호열의 공격을 받아 물자와 식량까지 잃은 주이에게
손침은 다시 병력을 주며 진격하라고 명령하는데
주이는 ‘식량을 잃어 더는 싸울 수 없다’며 거절하였고
결국 오나라로 돌아가 손침에게 참수당한다.

믿었던 오나라의 주력군은 수춘 근처도 못오고 패배하였고
종회의 이간계로 인해 왕기를 막고 있던 전단, 전역, 당자도 위나라에 투항하자
258년, 식량이 바닥난 문흠과 제갈탄은 다시 한 번 위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뒤, 문흠과 이후 전략에 대해 논의하다 의견 차이로 다투게 되자
가뜩이나 옛날부터 사이가 안좋았던 제갈탄은 결국 문흠을 죽여버리고 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문흠의 아들이었던 문앙과 문호마저 위나라에 투항했고
사마소는 그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성 주변을 돌게 하며 투항을 유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니
제갈탄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군은 총공세를 가했고
제갈탄은 결국 남은 군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싸웠으나
결국 호분이 이끄는 군세에 궤멸당하고 제갈탄도 전사하게 된다.

이렇게 251년부터 258년까지 이어진, 장장 8년에 걸친 수춘삼반은 막을 내리게 되고
실제 목적이야 어찌됐든 ‘조 황실의 부활과 사마가문의 단죄’를 명분으로 내걸고 일으킨 반란들이
오히려 사마의 → 사마사 → 사마소로 이어지는 정권에 힘을 실어주면서
조위(曹魏)를 멸망시키고 서진(西晉)을 세우게 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왕릉, 관구검, 제갈탄 모두 반란을 모의해놓고
막상 과감한 실행력을 보여준 뒤 뚜렷한 군사적 목적(ex 낙양점거)없이
수비로 일관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 아닐까 추측해보며
반대로 광활한 양주의 영토와 수도와의 가까운 거리를 이용해
대군을 이끌고 빠르게 남하해 반란 토벌을 마친 사마씨의 행보는
그들의 결과가 왜 달랐는지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