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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만에 돌아온 중국의 마지막 군웅할거 군벌지 인물전 -2-

에프제플린
01.06
·
조회 597
출처 : 자작

https://chimhaha.net/story/217574

1편은 여기서 참조하세요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천하는 나뉜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된다

 

아직도 대만과 중국 본토로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가장 최근의 중국 혼란기라고 할 수 있는 군벌지 시리즈. 1년 7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다음의 두 사람이다.

 

량치차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차이어 - 나무위키

 


출신지는 호난성 삼국지로 치면 형남이지만 촉과 더 남부의 맹획의 세력에 해당하는 운남-사천의 군벌인 차이어와 그의 스승이자 당시 중국에서 당대의 지식인이자 개화인으로 손꼽히는 량치차오다.

먼저 설명은 스승이자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량치차오 부터
 

사실 량치차오는 이 글에 걸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군벌지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또 다른 대사상가이자 혁명가인 쑨원과 달리 무력을 손에 넣은 적도, 세력이 있던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얘기하지 않고는 이 시대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려서부터 천재소리를 듣던 이 소년은 15세에 이미 향시에 급제했는데 이 때 시험 감독을 하기 위해  베이징의 감독관으로 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그의 딸과 결혼하며 북경으로 올라가게 된다. 만일 시대가 평화로웠다면 그는 명재상으로, 혹은 대사상가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실패한 개혁가, 시대를 못만난 미래인으로 평가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그의 스승이자 뜻을 같이한 동료인 캉유웨이와의 만남 이후이다.

external/upload....

이미 당대의 석학으로 유명했던 캉유웨이는 량치차오보다 15세 연상으로 훈고학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존재였고, 또한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량치차오는 그에게 서양의 학문을 배우면서, 유교만 알던 이전과 달리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학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는 말을 남길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는 이런 사상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던 제국주의의 시대가 되었다. 
청일전쟁 - 나무위키
중체서용(중국의 전통을 이어받되 서양의 기술을 사용한다)을 기치로 삼은 양무운동은 청일 전쟁 이후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 사태를 본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즉각 황제에게 상소를 냈다. 그들은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변법파를 조직했고 서구처럼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며,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같이 완전한 개혁을 주장했다. 
 

14년 전 조선의 갑신정변과 비슷했지만, 청나라의 황제인 광서제는 이를 수용했고 적극적으로 뜻을 모아 무술변법에 착수했다. 오직 황제의 심부름꾼을 뽑는 거나 마찬가지의 학문평가와 같은 과거제를 폐지했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군대를 근대화 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청나라의 수구파들에게 당연스럽게 반대를 샀다. 특히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중국 3대 악녀로 까지 불리는 서태후는 103일 채 반년도 되지 않는 기간만에 광서제를 유폐하였고, 변볍을 주도한 지식인들을 무참히 처형했다. 힘은 미약하지만 하려는 일은 너무나 컸던 미숙한 혁명파들은 황제의 신임만 믿고 갈등을 빚은 가운데 무참히 실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갑신정변처럼 위안스카이가 큰 영향을 발휘했다. 그를 발탁한 황제에 대한 배신으로 그는 강력한 정치력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량치차오와 캉유웨이는 살아남아 일본으로 망명했다.

 

가장 쓰레기 같았던 학원 선생 | (백업)유머 게시판(2020-2021) | RULIWEB

-넌 제자고 난 선생이야!

둘의 관계는 그대로였지만 점점 사상은 멀어져 갔다. 입헌군주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캉유웨이는 광서제를 버릴 수 없었다. 언제고 청나라로 복귀하여, 청나라를 위한 개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멸망해가는 청나라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미봉책에 가까웠다. 이미 40이 넘은 나이부터 그는 서서히 개혁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량치차오는 달랐다. 그는  보다 개혁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마침 일본에 있던 또다른 대사상가 쑨원에 대해서도 캉유웨이는 난신적자라고 말하는 반면 량치차오는 그와 만나며 그를 인정하게 됐다.
 

쑨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가인 쑨원과 청나라 관료출신의 량치차오는 뜻이 달랐다. 한쪽은 급진적인 혁명으로 한쪽은 위에서부터의 개혁을 통한 개혁으로..

량치차오는 쑨원을 너무 급진적이고 시기상조라고 비판했고, 쑨원은 량치차오를 유유부단한 낙관주의자로 생각했다.

또한 민족에 대해서도 당시만 해도 오직 한족만의 국가, 만주족으로부터의 독립과 복수를 생각하는 쑨원과 당시의 모든 민족을 중국인으로 포함하고자 하는 량치차오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과도 같았다.

 

쑨원은 일본에 있으면서도 항상 중국에의 투쟁을 했지만 이 젊은 순진한 혁명가는 비밀결사 단체와의 연계를 통한 암살과 사회혼란을 추구할 뿐 성공한 바는 없었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의 눈은 캉유웨이와 쑨원에서 량치차오로 모아지고 있었다.

이와중의 중국본토는 드디어 혁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신해혁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해혁명이 발생했다. 순식간에 청나라는 붕괴했고 지난 글에서 말한 것처럼 공화국은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갔다. 그럼에도 량치차오는 귀국할 수 있었고 당시의 환영은 쑨원을 능가했다고 까지 한다. 그에게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술변법의 해묵은 감정이 있었음에도 이 명망높은 정치가를 어찌 할 수 없던 위안스카이는 그를 환대했다. 아니, 오히려 쑨원과 비교하여 훨씬 온건한 량치차오를 이용했다. 개혁파인 쑨원과 량치차오는 서로 힘을 합쳐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지 못하고 위안스카이를 위해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이 와버렸다.

당시의 개혁세력 상황은 대통령제의 중국국민당의 쑨원, 의회내각파이자 최대 야당인 국민당의 당수인 쑹자오런, 입헌파의 량치차오로 삼분해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순진한 쑨원과 세력이 없는 량치차오를  가볍게 여겼지만 의회의 다수파인 쑹자오런을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그를 암살했다.  더불어 의회를 무력화하고 대총통인 위안스카이의 뜻대로 차관을 빌렸다.

중국 국민당은 여기에서 위안스카이에 법으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본거지인 남부에서 봉기했다. 이것이 계축 전쟁이다. 자세한 내용은 쑨원 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이 와중에도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를 비판했음에도 정치인으로써 의회에 남았다. 어떻게든 의회 안에서 해결을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의 야망은 이게 끝이 아니었고.. 

 

결국 황제에 오르고 만다. 여기서 량치차오는 끝내 그와 완전히 결별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또 다른 영웅이 나오게 된다.

운난성의 도독인 차이어는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량치차오의 제자가 되었고 변법운동의 실패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 공부에 투신한 이후 중국에 돌아와 원난의 도독직을 맡았다. 23세에 불과한 그는 일본에서 배운 근대적인 군사지식과 훈련방법을 총동원하여 당시 중국 최고의 근대화 군대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북부의 위안스카이 정부, 남부의 쑨원정부와 멀리 떨어진 운남은 안정적으로 경제성장과 행정권의 안정에 성공했다. 

이렇게 운남성을 관리하던 차이어는 량치차오가 내각총리로 추천함에 따라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러나 노회한 위안스카이는 이 위험한 젊은이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홍헌제제가 터졌고 (1915년 8월경), 차이어는 베이징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톈진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스승인 량치차오와 함께, 역적 토벌의 책임을 내세우며, 우리의 역량이 설령 부족하더라도, 4억의 인민의 인격을 위해 목숨걸고 싸우고자 했다.

차이어는 량치차오와 의견충돌이 있는 것처럼 속인 후 위안스카이에 투항했다. 베이징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스승인 량치차오는 서생이라 정치를 모른다. 책벌레의 생각은 바꿀 수 없고, 아무것도 할줄 모른다고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원난성의 병력을 모으기 위해 원난 군관 인청환을 출발시켰다. 그럼에도 눈치로 살아남은 정치력 9단의 위안스카이는 이 위험한 젊은이를 결코 믿지 않았다. 급시에 병력을 동원해 차이어의 집을 급습하였지만 이미 모든 증거를 텐진으로 빼돌린 차이어의 집에서는 종이한장 발견되지 않았다.

11월 22일 차이어는 만성적인 지병인 인후염을 핑계로 일본으로 휴가를 승인받고, 12월 2일 일본으로 떠났다.

그 후 12월 19일 홍콩, 베트남을 돌아 운남성으로 갔고, 량치차오 또한 그들과 함께 운남성으로 향했다.  



분량조절 실패로 자세한 전쟁은 다음편에…

도움받은 책
-중국군벌전쟁(권성욱)-
-량치차오 평전(셰시장)-
-음방실자유서(량치차오)-

댓글
이덕호
01.09
재밌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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