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마지막 군웅할거 군벌지 인물전
BC 700여년 경부터 수많은 통일과 분열을 반복한 중국 그렇기에 우리의 대스타이자 동아시아 베스트 오브 베스트 셀러인 삼국지연의의 작가 나관중은 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천하는 나뉜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된다
길게는 춘추전국 위진남북조 오대십국같은 몇백년간의 분열시대, 짧게는 초한쟁패, 삼국지, 5호16국, 수말당초 원명교체 명청교체기 같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청말 군벌들의 지도
이렇게 수많은 혼란기중 그 끝을 장식한 시대가(적어도 지금까지는) 바로 청말 군벌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 나타난 수많은 호걸들을 특히 삼국지를 좋아하는 개방장과 우리 개청자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가장 먼저 살펴볼 인물은 아직도 중국에서 한간(간신 and 민족 반역)으로 악명을 떨치는 인물이자, 한국사에도 잠깐 등장해서 우리들에게 인상을 깊게 남긴 인물인 위안스카이.

바로 이 사람이다. 중국 역사에서 배신하면 남부럽지 않게 이름을 남긴 이 사람이 도대체 뭘 배신했길래 그러는건지는 우리들의 나무위키를 찾아보면 가장 처음 등장하는 말이 바로 이 문장이다.
1889년엔 황제를 배신했고, 1911년엔 제국을 배신했으며, 1915년엔 공화국을 배신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
레지널드 존스턴
이렇게 배신자로 유명한데다가 군벌로 제일 처음 이름을 남긴,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또,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총독 노릇을 하던 자이기 때문에 군인으로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이 사람 사실은 신식교육은 커녕 청나라 시절에 구식 무과조차 급제하지 못한 전형적인 정치관료이다.
신기하게도 위안스카이(원세개)는 같은 가문인 삼국지의 원술(중국은 본관개념이 없기때문에 성이 같으면 같은 집안이라 본다.)과 같이 대대로 명문가 집안인데다가, 할아버지는 흠차대신(그 유명한 아편전쟁의 임칙서와 청나라 마지막 재상이라 할 이홍장이 흠차대신을 겸했다.) 조운총독을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와 숙부 또한 할아버지의 군대에 종군한 금수저중의 금수저라고 할 수 있겠다.

안그래도 공부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하는데, 진사시에서 3번을 낙방하면서 집에서 빈둥빈둥거리기만 하는 위안스카이를 도저히 보다 못한 그의 숙부는 그를 친구인 우창칭의 막사에 추천하여 인맥을 통해 들어갔는데 그의 나이 23살 인생에서 다시 없을 전환점이 발생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비극이라 할 만한 사건인 임오군란이 바로 그 사건이었다. 구식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을 견디다 못해 반발하여 나타난 사건이었고, 특히나 고종 입장에서는 아버지이지만 정적이라 할 수 있는 대원군이 그들과 동조한데다가, 정치적 파트너이기도 한 중전 민씨(후에 명성황후)를 살해했다고 까지 하니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청에게 군대를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마침 우창칭이 6개의 부대를 가지고 참전하여 빠르게 진압후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으로 압송했다. 이 과정에서 우창칭과 본대는 철수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남아 통상대신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청은 아편전쟁 이후로 크게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했고 특히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갑신정변에서도 위안스카이는 크게 활약했고 그 기간동안 기존에는 85퍼센트의 무역 비율을 갖던 일본에 비해서 크게 뒤쳐지던 무역규모를 90여배 증가시켜 비슷한 규모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당연히 일본은 이 과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고 이윽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당시의 청나라 전함인 정원함
청국은 아직 제대로 근대식 무기를 갖추지 못해서 일본에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편견과 달리 당시 청나라의 전함은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정원함과 진원함이 있었다. 또 명중률 12퍼센트의 일본과 비교해서 중국의 해군도 명중률 20프로를 달성하는 등 겉보기에는 전력이나 군인의 질에서 크게 뒤지지 않게 보였지만 정원함, 진원함은 동아시아 최대의 장갑을 가졌지만 속도는 15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고 포탄의 발사속도 또한 매우 느려서 일본에서 10번 발사하는동안 1번 발사 하는 수준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최정예 수준에서의 얘기기도 하고 개화수준에서 크게 차이가 났고, 전쟁 준비에서도 차이가 났던 이 전쟁은 결국 일본이 승리하게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겨우겨우 도망쳐서 청나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은퇴후 비스마르크와 만난 이홍장
이홍장은 청일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어 은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광서제는 캉유웨이, 량치차오와 같은 개혁파 인물들과 손잡고 메이지 유신과 비슷한 변법자강운동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홍장이 키운 북양군벌을 그대로 물려받은 위안스카이는 군부의 우두머리로 부상하게 된다. 광서제의 이러한 노력이 있음에도 아직 청의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사람은 바로 서태후였고, 광서제는 위안스카이를 사냥개로 삼아 서태후를 위시한 보수세력을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이런 황제의 의도를, 그리고 청나라의 개혁을 배신하였다. 그는 그대로 서태후의 측근에 달려가 황제의 결심을 밀고했다. 이로 인한 쿠데타로 개혁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광서제는 자금성에 유폐되어 결국 암살당했다고 여겨진다.(머리카락에서 비소가 발견) 이 것이 위의 3배신중 첫번째 배신이었다.
결국 광서제는 젊은 나이에 죽게 됐고 어린 황제,그리고 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즉위하게 되었다. 마침 이 때 위안스카이의 끈이라고 할만한 서태후도 죽게 되서 푸이의 아버지인 짜이펑이 섭정을 맡게 되었다.새로 섭정이 된 짜이펑은 군부를 손에 잡은 위안스카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를 축출하기로 결심했고 위안스카이도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아직 황실의 권위가 강하기 때문에 마치 삼국지의 사마의 처럼 웅크리고 지냈다. 이 과정중 위안스카이에게는 두 번째 행운이 일어나게 되는데

우창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이 반란이 바로 신해 혁명이고, 미국에 있던 쑨원은 즉시 귀국하여 이 반란을 타고 명실공히 중국의 대 인물로 급부상하게 됐다. 신해혁명만 가지고도 글을 쓸 수 있지만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오른쪽 어린이)와 아버지 짜이펑
이에 짜이펑은 정말 정말 혐오하는 위안스카이였으나, 당시 반란을 막을 수 있는 군대 자체가 의화단 사건 이 후 피해를 입지 않은 사실상의 위안스카이의 사병이라 할 북양군벌뿐이었고, 그를 곧장 복귀시켰다. 그러나, 후광총독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권토중래중이던 위안스카이는 짜이펑을 믿지도, 그리고 그의 명령을 받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은 그에게 흠차대신이라는 명예와, 실제 청나라의 모든 육해군을 맡기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위안스카이는 그 명령을 받기로 했다.

신해혁명 직전의 청나라의 군대
베이징의 1진, 텐진의 4진, 산동의 5진등 5만여명의 대군이, 청나라 최강부대인 북양군벌이 철도를 타고 속속 남하했다. 반군의 위세는 대단했지만 진압군의 병력, 질을 보았을 때, 진압군이 이들을 분쇄하지 못할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차일피일 싸우기를 미뤘고, 어느새 반란은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던 와중에 난징의 혁명정부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편지를 한통 전해받는다.

응 안싸워~~~ 나는 총통할거야
1.청 황제는 퇴위하지만 외국의 군주로 대우하며 존칭은 그대로 사용한다.
2.황실경비는 400만냥으로 민국정부에서 지급한다.
3.황제는 퇴위하고 이허위안으로 옮기고 궁인들은 그대로 부린다.
4.종사와 능묘는 유지하며 민국의 경비를 배치하여 보호한다.
5.아직 미완성인 도광제의 묘는 민국정부가 완공한다.
6.황제의 사유재산은 민국정부가 보호한다.
7.금위군은 민국 편제에 편입하고 정원과 보수는 유지한다.
청의 조정에서는 협정으로 황제가 통치권만 잃을 뿐 황제는 여전히 남을 것 이라고, 그러면서도 난징의 정부에는 공화국을 얻게 될 것이며, 황제는 이름만 남길뿐이라는 아주 교묘한 협약을 이뤄냈다. 푸이는 이를 회상하며, 어느 뚱뚱한 노인이 자신과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아주 꺼이꺼이 슬프게 울었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슬펐는지 모르겠지만 한 설에 의하면 위안스카이는 그대로 퇴근해서 집에서 변발을 자르고 가가대소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진시황이 처음으로 황제를 칭한 이래 2000여년 이어오던 황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임시 대총통 작위를 양보받는 형식으로 임시 2대 대총통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북경에서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만나게 됐는데 노련한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만남에서 쑨원을 높게 평가하며 그가 말할때마다 하오하오하며 긍정했고 설령 자기랑 맞지 않는 말도 고민해 보겠다는 말을 하며 구워 삶았다. 레닌의 평가에 의하면 마치 시골 아낙네와 같이 순진한 쑨원은 그와 만난 후 그의 동지들에게 '위안스카이는 비록 방법이 구식이지만 명석하고 능력이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나라를 다스릴 사람은 이 사람이 적격이다'라고 평가했고 완전히 위안스카이를 믿게 됐다.

그리고 또 한명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일본에서 복귀하는데 입헌파이던 량치차오의 귀국길에 환대는 쑨원보다 더 화려하면 화려했지 모자라지 않았어. 당연히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도 구워 삶는데 성공했고 그는 자신과 광서제등이 위안스카이에 당했던 것도 잊은 채 그 노인에게 빠져 버렸다. 입헌파와 공화파의 거두인 쑨원과 량치차오는 군벌인 위안스카이에 맞서 견제하는 대신 서로가 견제하는 일이 벌어지게 됐

이 와중에 위안스카이를 진짜로 위협하는 존재는 그 들 보다 훨씬 어린 혁명가 쑹자오런이었다. 중국 역사상 첫 선거인 제헌국회 선거를 앞두고 쑹자오런은 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당인 국민당(이 후의 쑨원의 국민당이 이 당의 후신을 자처하기 때문에)을 만들었고 압승을 하여 국회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할 것을 두려워한 위안스카이는 상하이에서 그를 암살했다. 이런 정치적 협박에 위안스카이를 두려워한 다른 의원들은 모두 용돈정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고 중화민국은 위안스카이 천하가 되었다.

쑨원은 그제서야 자기가 속은걸 깨닫고 2차혁명을 일으키지만 경력으로나 세력으로나 쑨원과 그의 동료인 황싱은 기껏해야 협객 정도에 불과했고 위안스카이에 빠른 대처에 완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1913년 이제 정식 초대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젠 황제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위안스카이의 아들인 위안커딩은 능력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아버지가 황제가 되면 자기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여 독일의 황제가 민주제보다는 군주제가 낫다고 했다던가. 위안스카이가 읽는 신문을 조작해서 위안스카이만의 신문을 만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뽐뿌질을 넣었다.

당시 북양군의 위안스카이 측근은 북양의 용,호랑이,개로 불리는 왕스전, 돤치루이, 펑궈장 3명이 있었는데 이 중 왕스전은 필두격이었지만 측근의 역할에 충실하여 정치적으론 영향이 적었고 돤치루이와 펑궈장은 위안스카이의 즉위에 반대했는데 가까이에 있는 돤치루이는 육군총장직에서 사직시키고 남경의 펑궈장에겐
"우리 가문은 59세 이상 산 사람이 없고 내 나이가 이미 50후반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황제가 되겠냐?" 는 발언을 하며 예의 그 정치력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뒤에선 내가 황제가 된다는데 왜 부하놈들이 이래라 저래라야 같은 소리를 하며 불만을 성토했다고 한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으로 개칭하여 황제에 올랐고 이것이 바로 홍헌제제다. 앞서 제국을 자기손으로 무너뜨리며 공화국을 세운 장본인이 다시 공화국을 배신하고 제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사진의 왼쪽에서 두번째 노인이 위안스카이.

이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게 당대의 주유라고 평가 받기도 하며 위안스카이 본인도 가장 두려워 하던 차이어였다. 차이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차이어 인물열전때 하고 이 차이어와 탕지야오, 차이어의 스승인 량치차오등은 호국전쟁을 개시하며 토원의 기치를 들었다. 결국 밖으로는 호국전쟁, 안으로는 퇴위요구에 의해 결국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얼마 안 있어 속을 앓다가 그의 말대로 60을 못넘기고 58세에 죽어 버렸다. 그의 죽음으로 중국은 군벌시대를 활짝 열게 됐다.
이 시대의 간웅이 이렇게 허무하게 갔다. 사람들은 그를 원술이나 동탁같은 악당으로 여겼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객관적이지 못한 판단이기도 하다. 결국 시대의 승리자인 쑨원의 국민당, 그리고 그 이후의 공산당은 그를 당연히 호의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위해 변명을 한다면, 위안스카이가 아니었다면 이미 청은 의화단의 난때 망했거나, 또는 신해혁명 당시에도 어설프게 대처하다가는 제2의 태평천국의 난이 됐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쑨원, 량치차오, 황싱등 당대의 사상가들을 감화시켰고, 뒤로는 황제, 제국을 배신하며 탁월한 처세술, 권모술수를 갖추었다. 리홍장이 죽고 그의 군벌을 그야말로 그대로 흡수했으며, 정치경력으로나 명성 실력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정치가에게 밀리지 않았다. 짜이펑에게 밀릴때는 철저하게 숨었고, 발톱을 드러낼때는 철저하게 상대를 공격했다. 초기 2년은 그가 발톱을 감추고 있는 시기였지만 이후 40년 가까이 있을 혼란기에서 가장 안정적이었고, 무상 교육 확대, 사법제도, 전족 금지같은 당대의 과제를 통과시켰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조조나 사마의의 그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실패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청조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민중의 지지를 버리고 권모술수만으로 상대를 대했다.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명목으로 각종 이권은 일본에 넘겼고, 말기에 보여준 홍헌제제는 그야말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만약 그가 있던 시대가 이런 개화의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 또한 한 나라의 개국군주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쨋거나 지금의 중국이 원하는 영웅은 그가 아니었다. 결국 가장 높은 곳에 올랐던 위안스카이는 그렇게 통한속에서 갔다. 이젠 어느 누가 그를 이어 받게 될까.
앞으로 몇화 정도 더 써볼 생각입니다. 이 내용은 권성욱 저) 중국군벌전쟁의 내용을 토대로 썻습니다. 관심이 생기면 저 책을 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