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장군 김홍일 [3부] (完)
들어가기에 앞서,
좀 오래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머리 비우고 만드는 침성모 시리즈와는 달리
이렇게 위대한 인물을 다루는 글은
제 필력으론 버거워서 계속 미뤄왔더랬죠..
3부. 기억될 장군, 김홍일
1950년 6월 28일
김홍일은 한강 이남에 당도했다.
제대를 유지하며 후퇴하는 장병들은 보이지 않고,
초췌한 행색의 패잔병들만 눈에 띌 뿐이었다.
뗏목에 타기 위해
장교 약장을 떼어버린 이들도 있었다.
김홍일과 당번병은 눈에 띄는 곳에
‘미군 참전’ 현수막을 내걸고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협조를 구해
물과 주먹밥을 준비해 나눠주며 장병들을 붙잡았다.
몸과 마음이 지친 이들을 격려하며
일정한 제대가 모일 때마다 새로운 소속을 부여했다.
하나의 분대, 소대, 중대가 갖춰졌다.
현 육군 1군단은 이렇게 시작됐다.
<총참모장 채병덕>
다음날. 육군 본부.
맥아더는 마음이 착잡하다.
그는 방금 막 총참모장 채병덕의 작전계획을
듣고 나온 참이다.
적들의 대규모 공세 상황에서
대응 전략을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조선 남한 장정 200만을 모두 징집해서 훈련시키면
그들이 적들을 격퇴할 것이오!”
라는 막연한 대답뿐이었다.
맥아더는 파이프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부하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 중얼거렸다.
“저 인간 구제 불능이군….”
이곳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게 뻔했기에
맥아더는 한강의 전황을 보러 나섰다.
<한강 전선을 시찰 중인 김홍일 장군(우측)>
패잔병들만 가득했던 한강 이남에는
어느새 나름의 체계를 갖춘 방어 병력이
한강 전역의 주요 거점에 배치되어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포탄이 빗발치는 한강을 둘러본 직후,
맥아더는 김홍일과 대면했다.
그는 방어 계획에 관해 물었고,
김홍일은 작전에 관해 설명했다.
김홍일의 계획을 듣는 동안
맥아더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현실적이고 필요한 작전이었고
이는 미국 장군단도 납득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김홍일은 맥아더에게
각종 화기의 보급과 미 공군 투입을 통한
한강 철교 폭파를 요구했고,
요구가 이루어진다면
약 1주에서 2주의 방어가 가능하리라 전망했다.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한강의 맥아더>
맥아더는 김홍일의 요구를 곧바로 이행했다.
보급에 힘입은 김홍일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최종적으로 3개 사단을 구축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한국전쟁 발발 당시 국군은 총 8개 사단이 있었다.)
한강에서 버텨내는 하루는 후방 병력들에게
하루 이상의 가치를 벌어다 주었다.
한강에서의 1주간의 방어전을 통해
국제연합(UN)은 한국의 항전 의지를 확인했으며
전격적인 UN군 참전이 이루어졌다.
이 때 버텨낸 일주일은 이후
낙동강과 인천의 기적으로 되돌아왔다.
<퇴역 후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김홍일>
한강 방어선 작전 이후
김홍일은 미국과의 작전에 있어
마찰을 빚어왔고, 끝내 야전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미국의 지휘를 받는 모양새에서
적지 않은 불만을 가져왔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
물러나게 되었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다.
한국전쟁의 초기에만 한정된 활약으로 인해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했다.
만약 이 초라한 글을 읽고 나서
그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해 찾아보는
이들이 있다면 흠잡을 부분 없이
완벽히 정의로운 길만을 걸어온
그의 삶에 감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서울을 잃은 귀관의 책임은 막대하다.
죽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에게 속죄해야 한다.
선두에 서서 병력을 통솔하라."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채병덕은
국방장관 신성모의 명령서를 보며 손을 떨었다.
채병덕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
적 병력에게 소속을 물어보다
그들의 총에 전사했다.
완결까지 오래 걸렸는데 처음부터 봐주신 분이 있다면
죄송하단 말씀과 또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더 흥미롭게 적고 싶었는데
제 부족한 필력을 탓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홍일 장군님. 그리고 횐님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