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목소리
도둑맞은 목소리
-박완서 작가의 <도둑맞은 가난(1975)>을 읽고
**위 작품은 반전이 있는 정말 짧은 분량의 단편소설입니다
**결말이 포함되어 있으니
작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은
작품을 읽고 제 글을 보시길 바라요.
#1. 미국 드라마 <더 오피스>에서 손꼽히는 명대사
“신분 도용은 장난이 아니야, 짐! (Identity theft is not a joke, Jim!)”
#2. 대학교 신입생 OT의 기억
신입생 중에 새내기인 척을 하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정체를 밝힌 순간, 가상의 ‘친구’와 제일 친해졌던 동기는 당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도둑맞은 가난>에서 주인공은 상훈에게 자신의 소명인 가난을 도둑맞습니다.
주인공에게 가난은 경제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고리타분하고 시척지근한' 냄새로 표현되는 가난이 ‘눈이 실 만큼 독’했지만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면 안 된다’고 의지를 다집니다.
가난을 친근하게 동반하는 삶의 태도는 그녀가 가족에 저항하며 쟁취한 것입니다.
상훈의 정체는 충격임과 동시에 기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감정에 완전히 무지한 채 그녀의 생활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내뱉어서 괘씸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한 건 용서할 수 있다 치더라도 가난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이 그녀가 분노한 핵심은 아닐 겁니다.
그녀의 가난을 충분히 풍요로운 도련님의 삶을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전락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정하는 시선으로 가난한 자를 거둬주면 응당 그에게 고마워할 거라는 고압적인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상훈도 손쉽게 얻은 경험은 아닙니다.
그도 몇 달간 공장에서 일했고 주인공과 외풍이 드는 집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쉬웠던 어려웠던 외부인이 이기적인 목적과 관조하는 태도를 갖고 타인의 경험에 접근하면 위험합니다.
그가 ‘연탄 아끼려고 남자를 끌어들이는 생활’로 가난을 왜곡할 때
‘억센 푸성귀처럼 청청한 생기’와 어려운 사람들끼리 도와야 한다고 훈계하는 목소리는 들어갈 자리는 사라집니다.
긍지와 목소리를 도둑맞은 결과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가난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타인의 경험을 살아본 상훈의 시도는 타인과 완전히 유리되어 살아가는 것보단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시도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다채로움을 망각하고 단순히 자신의 잣대로 타인의 삶을 평가해버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는 탐욕을 보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