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스포일러 리뷰
-이 영화는 처세에 관한,그리고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괴리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초반에 자신의 과거를 진술하면서 회상이 시작되었을 때,유럽 유학을 하던 오펜하이머는 향수병에 시달리며 실험을 못해서 학교 생활에는 적응을 못하고 양자물리학의 상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버클리로 이직한 후의 그는 정치색을 너무 드러내지 말라는 동료의 충고도 무시하고,그렇다고 입당하라는 말도 무시합니다. 정말 유약하고, 맘대로 하는 사람이고,스스로도 햄버거 가게 하나도 운영하지 못할 만큼 소통이 빵점인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처음에는 보안을 유지하라는 그로브스의 말도 듣지 않으며 사고를 치고,반대로 동료들을 조율할 때는 정치인이라고 까입니다.하지만 자리에서 서서히 리더십을 갖추고, 나름 능청스럽고 유연하게 구는 법을 터득합니다. 특히 혼자 단독행동을 하는 텔러를 달랠 때,그만의 리더십이 탄생합니다.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텔러에게 "굳이 섞이지 말고,나랑 개인적으로 만나서 말하자"며 아싸가 아싸를 다루는 법을 터득합니다. 짬짬히 동생을 데려오라는 무리한 요구도 관철시키는 등,그가 꽤 능숙해졌다고 보입니다. 제법 능숙해져서 그로브스와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정도도 되죠.
그는 과학자들을 조율해서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시킨 순간의 환호를 느끼고, 일본을 폭격할 것을 주창한 뒤 먹히자 자신이 처세술이 제법 늘었고,좀 짖궂게 굴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휘둘러도 다들 좋아해 주고 먹힐 거라고 착각한 겁니다. 또한 핵 만능주의를 막기 위해 명성을 도구로 써야 한다는 의무감도 갖죠. 때문에 스트로스에게 망신을 주었고,이는 업보로 돌아옵니다.훨씬 많은 책임을 졌을 트루먼을 세련되지 못하게 설득해 화만 돋굽니다.
두 시간대를 오가는 것의 장점은 영화의 초반부에는 오펜하이머가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굴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모습들만 모여서 보이고,중반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과정에서 성장하며 리더십을 갖추고 과학자들을 조율하지만 부분부분 처세가 좋지 못한 부분이 나옵니다. 결국 그 업보를 가혹하고 지나치게 돌려받고,핵경쟁을 후회하는 장면이 마지막이 됩니다.
진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미움받을 짓만 했지만,스스로 똑똑하니 괜찮겠다고 자만한 것이죠.
그의 진짜 오만은 과학자로서 인류를 파괴할 무기를 만든 것보다 자신 정도면 처세를 잘 한다는 오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순수한 과학자라고만 자부했을 때는 누구보다 정치적이었으며,스스로 정치인의 물이 들었다고 착각했을 때는 처세가 부족한 과학자였습니다.
-입자는 확률입니다.핵분열과 핵융합을 할 때 중성자는 구름처럼 떠다니다가 다른 중성자나 원자핵과는 부딪힐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이는 오펜하이머가 살면서 마주친 다른 인물들과의 수많은 상호 작용으로 드러납니다. 영화의 플롯 내에서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방식이 그의 삶 자체가 파란만장한 탓도 있지만,정말 예측할 수 없습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인 아인슈타인은 조언하는 역할로 잠깐씩만 나오지만 몹시 중요한 대화를 나눴고, 진 태틀록과 방금 전까지 뜨겁게 사랑하다가 아내인 캐서린과 결혼합니다.진을 잊은 듯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대사를 수행 중에 갑자기 다시 진을 만나고,다시 이별을 선언합니다. 두 번 정도 잠깐 마주치고 생각 없이 막 대했던 데이비드 힐은 그의 구세주가 됩니다. 누구보다 끈끈한 파트너였던 그로브스는 생각보다 그의 결백을 증명하는데 도움이 못 됩니다. 생전 처음 본 로저 롭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를 물어뜯습니다.대수롭지 않게 불렀거나 교분을 나눈 이들은 그에게 치명적인 의혹을 가져다 줍니다. 충돌의 값과 연쇄의 값이 비례하지 않습니다.중성자인 오펜하이머는 지금 충돌한 사람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랐고,그들도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던 채로 엄청난 에너지가 생성됩니다.
-물리학과 뉴멕시코를 합치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인생에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그는 둘을 합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한 일과 그 둘을 합친 결과물이 낳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광기의 광풍으로 가장 불행해지고 말았습니다.
-트리니티 실험 시퀀스가 스펙터클이 부족하다는 평에는 공감이 어렵습니다.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스피디한 편집이 몰입감이 강합니다.특히 전문용어들이 오가고 전문가들이 관련 절차들을 텍티컬하게 수행하는 모습이 나오며 소위 '뽕맛'을 충분히 채웁니다.시덥잖은 농담을 하거나 진심을 털어놓으며 과학자와 군인들의 속내도 느끼며 드라마를 보강하기도 하죠.화염의 크기가 어마어마하지 않을 뿐, 충분히 사람이 육안으로 보기에 부담스러운 빛과 느끼기에 압도적인 소리를 체감시켜서 성공 후 오펜하이머가 느꼈을 위압감도 잘 전달하며 장르적 쾌감을 넘어 심리 드라마로서의 몰입을 높이며 넘어갑니다.
-일본에 원폭을 날리는 과정에서의 오펜하이머의 반응은 정말 지극히 그 개인의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한국 관객 입장에서도 불편하지 않습니다.그는 거의 유일하게 히틀러의 자살 이후에도 원폭을 주장하는 과학자이며, 결국 관철합니다. 동족인 유태인을 죽이는 나치가 더욱 피부로 와닿고, 일본은 인지는 하고 희생을 줄이려면 결국 원폭을 쓰는 게 옳다고는 생각하지만 와닿지는 않죠. 일본에 투하한 이후 축하할 때 그가 느끼는 중압감의 가장 적절한 부분은 "애써 의연한 척은 되지만 ,계속 두려움이 떠나지 않는 정도"를 잘 표현합니다. 그도 전화나 서면 정도로만 보고받았으니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자각은 있고 끔찍한 결과를 상상하면서도,결국 자기 앞의 일들을 수행합니다.얼마나 끔찍할지를 상상하면서도 자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는 쇼맨십을 보여줍니다. 그 후로 그는 나아가면서도 두려워하는 이중성을 보여줍니다. 일본에 핵을 떨군 것 자체보다, 그로 인한 후폭풍에 오펜하이머도,다른 이들도 더 관심이 많습니다. 히틀러가 항복했을 때도 과학자들은 쓰지 말 것을 토론하며 미래를 지향했고, 미 군부도 파시스트보다도 소련을 더 두려워하며 그 뒤를 봅니다. 오펜하이머 역시 피가 묻은 것에 죄책감은 있지만, 그 후로 더 많이 생길 지 모를 피에 더 많은 자책을 안으며 진행되기에 일본에 동정적이지도 않지만, 굳이 당해 마땅하다고도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오펜하이머의 환상이나 상상을 구현하는 장면들에 대해서,얼굴 가죽이 벗겨진 분장 등에 혹평이 많습니다.다만 저는 이 아날로그 집착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오펜하이머는 디지털 이미지나 영상물이 없던 시절 사람입니다.그가 상상하는 물리학 반응이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피폭의 모습은 결국 그가 그 시절에 본 아날로그한 사물이나 영화 같은 것들을 기반으로 할 테니, 디지털로 만들지 않는 것이 적절합니다.지극히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다루는 영화니까요. 또한 지도에 물이 고여서 파동이 퍼지는 모습으로 연쇄적인 핵 경쟁을 상상하는 부분에서는 영상미도 수려합니다.
평생 도움이 안 될 쓸데없는 전공인 방사선학과가 도움이 되더군요.핵융합과 핵분열의 원리 정도는 기억하다 보니 의외로 이론 관련 대사가 이해가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