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장소
저는 지금 30대 중반의 힙저씨입니다. 과거에는 씬에 기웃거리기도 했었고, 열렬한 리스너로 CD도 많이 사 모으고, 공연도 찾아다니고 SM58로 홈레코딩도 해봤던 힙합 팬입니다. 지금은 출퇴근길에 신보를 들어보고 주말엔 LP도 들으면서 취미활동을 이어나가는데요. 공연이나 페스티벌은 육아를 하면서 거의 마음을 접었습니다. 나중에 애가 크면 다시 갈 지도 모르겠지만요.
힙합은 이래야 돼! 라고 말하는 게 힙합꼰대의 정석이긴 합니다만, 쇼미더머니가 두자리 수로 넘어가는 동안 한국힙합씬은 꽤 많이 성장하기도, 꽤 많이 변질되기도 한 것 같아요. 아쉬운 게 있다면 힙합은 항상 젊은 층의 소비를 이끌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같이 나이 먹는 팬들은 발 디딜 곳이 점점 적어진다고나 할까요. 예전엔 라빠들의 가사를 볼 때면 ‘우와 멋있다!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다!’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요새는 그런 우상성을 지닌 라빠 친구들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보석집 같은 크루가 컨셔스랩(진부한 표현입니다만)에 있어, 가사의 의미를 찾아듣는 맛이 있는 게 요새 좋은 음악을 고르는 개인적인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QM님도 이제는 어떻게 보면 중견(?)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이 먹은 팬들도 들을 수 있는 랩들이 더 많아지게 해줘서 한편으로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올해는 그런 의미에서 이현준 ‘번역 중 손실’과 팔로알토 ‘Dirt’를 가장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씬에 이름을 올린 많은 래퍼들이 뿜어내는 공급을 20대 초반의 잠깐 유행처럼 좋아하는 힙합팬이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 느낌입니다. 10년 이상 이어진 쇼미더머니가 시청률이 낮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겠지요. 저도 예전처럼 막 열심히 보지도 않거든요. 최근 들어 각 대학교 에타에도 올라오듯 축제 때 래퍼 부르면 부정적인 댓글이 달리듯이 더욱 힙합에 대한 반발심리가 많아지는 기분이랄까요? 항상 주된 소비층은 1020에 머물러 있고 그들의 취향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며, 절대적인 N수도 적어지면서 힙합이 알려진 것 만큼 열매가 맺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약속의 장소’에서 ‘그 날이 오면’ 만나자고 했던 우리 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3줄요약
- 힙합은 젊은 게 맞다.
- 젊은 애들이 요새 힙합 안 좋아한다.
- 늙은 사람들도 힙합 좋아할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