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무더운 8월의 여름.
여느 유격 훈련이 그러하듯 우리 부대 또한 제한된 물과 열악한 천막 환경에서 유격훈련을 실시했다.
높은 기온과 습도, 설상가상으로 폭우까지 내려 우리는 흙탕물을 뒹굴며 훈련을 받아야 했다.
전투복이 젖으면 대충 벗어서 머리맡에 놓고 잠을 청했으며 아침이 되면 그 젖은 전투복을 그대로 입는 것을 반복했다.
그 결과, 우리는 더이상 군인이 아닌 무협에 나오는 중원 개방 무리와도 같은 형색이 되었다.
우리가 봉만 들고 있었다면 어디선가 황용과 곽정이 날아와 홍칠공에게 안부를 전했을 터였다.
그래도 무엇이든지 끝이 있는 법, 우리는 복귀 하루 전날을 맞이했다.
PT체조와 각종 장애물 통과 등 모든 훈련을 마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악명 높은 ‘화생방 훈련' 이었다.
후임들중에는 훈련소에서 방독면 정화통 교체만 해봤지 가스 실습은 해보지 않았다는 친구들이 넘쳐났다.
나는 공포에 질린 후임들의 얼굴을 보고 곧 다가올 대재앙에 몸을 떨었다.
“정 상병님. 화생방 정말 많이 괴롭습니까?”
분대 후임 황 일병이 내게 물어왔다. 황 일병은 일꺾으로, 항상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부산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 부산 사나이도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화생방’이라는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어..”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내 말에 황 일병의 눈동자가 그의 고향 부산 앞바다의 파도 처럼 흔들렸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다른 후임들은 서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긴장한채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나는 옆에 있던 내 맞선임 송 병장을 보았다.
그는 말출을 5일 남겨두고 유격 훈련장에 끌려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훈련 내내 석이 나가 있었다.
굳이 전역 전날에 복귀해서 후임들을 놀리고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결과였다.
‘말년은 유격 안가고 영내 대기할거라는디?’ 라며 중대장 말만 믿은 내 가엾은 맞선임 송 병장..
잠시 후. 드디어 우리 분대인 1소대 3분대의 차례가 되었다.
도축장에 온 가축 처럼 차례를 기다리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생방 훈련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화생방 훈련 실습실은 논산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하얗게 칠해놓은 금이 간 벽, 대충 올린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창고 같은 건물.
안에 들어가면 도살자가 가죽 앞치마를 두른채 우리를 보고 미소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실습실 옆에서는 앞서 차례를 마친 2소대 병사들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화생방 훈련의 증거인 땀과 눈물, 콧물 자국이 문신과도 같이 선명했다.
소대장은 장난끼 많던 평소와 달리 우리 분대 앞에서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활성탄을 얼굴에 바르면 가스가 중화되어 훨씬 덜 고통스럽다. 바를 사람은 거수하도록.”
그러나 나는 소대장의 말이 개쌉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앞서 차례를 마친 2소대 병사들중에는 내 유일한 동기인 홍 상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 상병은 동양인이 아닌 흑인으로 인종을 탈바꿈한채 내게 다가와 ‘활성탄을 절대 바르지 말라’ 는 경고를 해주었다.
이등병 때부터 열심히 공화춘과 슈넬치킨으로 배를 채우고 외박 때는 맥도날드 감자튀김을 먹여 사육한 보람이 느껴지는 때였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분대 후임 중 한 명이 소대장의 거짓말에 넘어가 거수를 했다.
평소 까불거리는 성격과 달리 형체가 없는 모든 것에 대해 겁이 많던 박 일병이 그 주인공이었다.
소대장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박 일병의 얼굴에 정성스럽게 검은 활성탄을 골고루 발라주었다.
그러자 박 일병은 인종을 탈바꿈하고 누군가의 애인을 노릴 것만 같은 만화속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곧바로 소대장은 우리에게 방독면 착용을 지시하고는 실습실로 분대를 인솔했다.
실습실에 입장하자 투광기를 켰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뿌연 연기로 가득차 시야가 가려있었다.
서로의 희미한 형체를 뒤따르며 우리는 겨우 나란히 도열했다.
소대장은 우리가 준비 된 것을 확인하고는 큰 목소리로 정화통을 해제할 것을 지시했다.
긴장한채 정화통을 돌려 해제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후임들의 격한 기침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엑!! 우웨엑!! 웩!!”
정화통이 빠진 후임들의 방독면으로 CS 가스가 침투해서 그들에게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후임들은 마치 입으로 알을 낳는 피콜로 대마왕 처럼 허리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숨을 최대한 참으려 했으나 불가항력으로 입이 벌어지며 작은 기침이 연신 튀어나왔다.
소대장은 후임들에게 다시 정화통을 연결하라고 호통을 치며 지시했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후임들은 난생 처음 겪는 CS 가스의 고통에 아비규환이 되었고 정화통은 이미 손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볼링이 쳐친지 오래였다.
소대장은 답이 없다고 느꼈는지 20초 정도가 더 흐르자 문을 열고 우리 분대를 퇴실 시켰다.
뿌연 실습실 안에서 희미한 빛이 힘겹게 뜬 눈에 들어오자 나와 후임들은 그 빛을 향해 달렸다.
그 모습은 단언컨데 일본 애니메이션 오프닝의 한 장면과도 같았으리라.
여기까지 집중해 읽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도대체 뭐가 실수라는 건지 궁금할 것이다.
지금부터 바로 그 이야기를 써내려가겠다.
후임들은 실습실 밖으로 뛰쳐나와 입에서는 침을, 코에서는 콧물을, 항문에서는 방귀를 내뿜으며 미친듯이 기침을 했다.
그래도 나는 단 한 번이지만 논산에서 경험을 해보았다고 몇 번의 큰 기침과 눈이 따끔거리는 걸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멀쩡하였다.
괴로워하는 후임들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건 얼굴에 활성탄을 바른 박 일병이었다.
박 일병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 침으로 인해 활성탄이 번지고 떡이지며 그야말로 아수라였다.
상대적으로 멀쩡했던 나는 박 일병을 딱하게 여겨 허리춤에 달려있던 수통을 꺼내 그의 얼굴에 물을 부어주었다.
박 일병은 마치 성수로 세례를 받듯 내게 연신 ‘감사합니다’ 를 외치며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그런데 급하게 얼굴을 문지르던 박 일병이 내게 물었다.
“정 상병님. 뭔가 단맛이 납니다.. 활성탄이 원래 단 맛이 나는겁니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리며 아연실색 했다.
계급이 상말이 되며 병장들을 제외하면 최고참이 된 나는 분말형 포카리 스웨트를 수통에 넣고 흔들어서 유격 훈련을 왔던 것이다.
박 일병의 얼굴에는 포카리 스웨트와 활성탄이 섞였고 그는 단맛이 난다며 연신 혀를 낼름거리면서 자신의 인중을 핥고 있었다..
“아.. 그래? 그래도 일단 사람 먹는 건 아니니까 자꾸 핥지말아봐..”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박 일병이 자신의 인중과 입가를 더이상 핥지 못하게 하는 쪽을 택했다.
부대로 복귀해서 샤워를 할 때까지 그는 자꾸만 얼굴 피부가 댕기고 끈적 거린다며 활성탄을 바른 소대장을 원망했다.
이후 박 일병은 ‘활성탄은 단맛이 난다’ 며 다른 후임들에게 지식 자랑을 하고는 했고 나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름이 외자라 특이했던 박○아.
그래도 맛있었잖아? 한 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