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통을 견뎌낸 스님, 틱꽝득

베트남 불교 단체에 의하면 7살에 베트남 임제종(Lâm Tế tông)에 입문하여 출가했고 이후 1932년까지 수행을 거듭하다가 1932년에 안남불교회가 성립되면서 베트남 중부와 남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포교와 사찰 재건에 힘을 썼다고 한다. 이후 캄보디아로 유학 가서 상좌부 불교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에서 벗어난 후에는 남베트남에 머무르면서 사찰 재건 및 포교, 신도 교화에 힘을 쓰면서 남베트남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다.
그러나 바오다이를 내쫓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불교 탄압 정책과 독재 정치를 펴기 시작했고[2] 친인척들이 대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면서 남베트남의 형세가 다시 막장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 탄압 정책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과 베트남 곳곳에서 가톨릭을 내세워 불교 신자인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1963년 5월 8일은 부처님오신날(베삭 데이) 2527주년인 만큼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련의 축하 행사가 열렸는데 가톨릭 신자였던 응오딘지엠은 불교 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종교적인 상징을 내세우고 거리 행진하는 것은 법에 저촉된다며 부처님오신날(베삭 데이) 축하 행사를 진압할 것을 경찰에 명령했다. 당연히 진압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고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람도 발생하였다.
틱꽝득은 이에 맞서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었던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휘발유를 몸에 붓고[4]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이 특보에 호외, 속보를 타고 전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로 일파만파 전파되었다. 소신공양 당시 67세(세는나이), 법랍 47년이었다.
결국 틱꽝득은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가두 행진 1달째인 6월 11일, 미국 대사관 한복판에 가부좌를 하고 앉은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독재 정권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소신공양을 하기로 한 것. 그는 소신공양을 하기 전, 다른 승려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조이고 뒤로 넘어지면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온몸이 화염에 휩싸였음에도 끝까지 가부좌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오열하며 슬퍼했고, 시위를 막아서던 경찰들 역시 받들어 총 자세로 경의를 표했다. 결국 10여 분 뒤 틱꽝득은 뒤로 쓰러지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향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원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던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을 그때까지 지원하던 미국은 부패 정권을 돕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베트남 개입의 명분이 약해졌다. 그리고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를 탄압하며 시선을 끌던 응오딘지엠 정권에 민심은 더욱 분노해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부인이자 역시나 당시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었던 마담 누 쩐레쑤언은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해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그에 비하면 불교 지도자 놈들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중놈 하나 바베큐로 만든 것뿐인데 말입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이런 사탄도 차마 못 할 고인에 대한 모욕을 해서 베트남 국민들의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모욕 대상을 보면 당연히 어지간한 쌍욕보다도 높은 수위다. 자기 말로는 서구화에 항의하는데 미국제 가솔린을 쓰고 있으니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뭐 저런 정신나간 미친 여자가 있어?"라며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미국인들도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정신 못 차리고 불교도들의 저항을 강경하게 찍어눌렀고 8월 초 응오딘뉴가 사이공의 싸 러이 사원에 군경을 보내 짓밟아 반발심을 초래했다. 쩐레쑤언이 가사를 입었든 말든 외국인 선동자들은 모두 추방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강경진압을 옹호한 것은 물론, 이를 두고 "1955년 빙쑤옌 진압 이후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the happiest day in my life since we crushed the Bình Xuyên in 1955)"이라는 발언까지 하면서 불교 신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베트남 국민의 90%가 넘는 불교도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이게 다 빨갱이들의 준동일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졌고 이후 동생 응오딘뉴(吳廷瑈 1910~1963)와 함께 11월 2일 오전 6시에 쿠데타군에게 항복했으나 군부에게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쿠데타군이 두 형제의 안전한 출국을 보장하겠다며 호송용 육군 장갑차를 보냈고 거기에 탑승하자마자 양손을 결박한 뒤 장갑차 안에서 총살해 버렸다. 물론 군부는 그들이 탈출 중에 사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일 공개된 처형 직후의 사진은 양 손이 묶여 있고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전형적인 총살당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한편 응오딘뉴가 참혹하게 사살당할 때 당시 방미 중이던 쩐레수언은 얼른 달아나서 프랑스, 미국, 영국 같은 나라를 떠돌다가 87세였던 2011년 4월 24일 이탈리아 로마의 초라한 호텔에서 초라하게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죽을 무렵에 베트남 정부에 대해 고향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으나 베트남 정부나 여론은 "우리는 그쪽네 시체도 받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고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당신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 아직 많으니까 베트남에 오면 당신 시체도 보전 못 한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해외에서 죽어라."며
당시 종교 탄압에 맞선 저항으로서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한국처럼 민주화되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베트남 역사와 교과서에서 크게 추앙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남베트남이 멸망하고 적화통일의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에 평가절하되는 면이 있다. 실제러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에서 발표한 2022년 세계자유지수에서 한국은 83점으로 '자유국가'로 분류되고 그다지 상태가 좋지 못한 방글라데시도 '부분자유 국가'로서 39점인데 베트남은 '19점'으로서 '부자유 국가'로 선정될 정도로 타락하였다. 그렇다고 북베트남이 좋아할 리도 없다. 물론 '이이제이' 전략으로서 당시에야 남베트남을 멸망시키는 도구로서 악용할 수도 있었으나 이젠 자신들의 천국이 되었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으니 '저항의 상징'이었던 틱꽝득이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오히려 독재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처럼 종교 역시 인민들을 압제하는 수단이라고 봤고[26] '불교국가' 티베트를 지배한 중국공산당이 내세우는 명분이기도 하니 베트남 공산당 역시 종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 베트남 정권은 물론, 해외에 망명한 남베트남 출신 이민자들도 가급적 언급하기를 꺼리는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