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만해지고 싶은 인간] ep.4 호구의 삶
“저가요,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지갑도 잃어버렸는데요.”
“집에 돌아가면 바로 돈을 입금해 드릴게요, 버스요금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버스정류장에서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저런 질문을 받는다면?
22살 때 일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
목표로 했던 일출을 봤음은 물론 무박 2일의 모든 일정이 순조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한 채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티켓이 맞나?’ 티켓을 확인, ‘혹시 시간이 지난 건 아닌가?’ 시계를 확인, ‘이 승강장이 맞나?’ 승강장 확인을 반복하며 말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조금만 관찰하면 누구나 내가 몇 시에 몇 번 승강장에서 어떤 버스를 탈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기다리던 승강장에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안심하며 승강장을 향해 걸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를 멈춰 세웠다. 그 사람의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몰골은 너무 불쌍했기에 강렬했다.
소위말하는 ‘노숙자’와 다르게 불쌍했기에 느껴졌던 강렬함이었다.
‘노숙자처럼 보이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이 불쌍해 보이지?’
185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큰 키, 빼빼 마른 몸, 방금까지 울다 온 것 같은 불그스름한 눈과 눈물자국,
앙상한 볼, 며칠 다듬지 못해 샤프심처럼 자란 수염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저기요”
“네? 무슨…?”
그리고 그는 엄청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고 실제로 몸도 떨며 내게 말했다.
“저가요, 며칠 전에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지갑도 잃어버렸는데요.”
“그래서 집도 못 돌아가고, 며칠 동안 밥도 굶고 있어요”
“집에 돌아가면 바로 돈을 입금해 드릴게요”
“제/발 버스요금만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부탁드려요”
그런 그의 몰골과 떨리는 몸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듣는 불쌍한 처지는 나를 당황함과 동시에 그를 100% 동정하고 신뢰하게 만들었다.
나는 곧장 그에게 버스요금이 얼마인지 묻고 그가 대답한 3만 원(2010년도 최저시급은 4,110원)을 아무런 의심 없이 지갑에서 꺼내주었다.
그는 곧장 돈을 건네는 나의 두 손을 꼭 잡았고, 흐느끼며 연신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그렇게 돈을 챙긴 그는 집에 도착하면 곧장 빌린 돈을 갚겠다며,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내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그의 메모장에 바르게 적힌 내 번호를 확인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심지어 누군가를 도와줬다는 기쁜 마음을 품은 채로 다시금 승강장으로 향했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곧 출발했고 그렇게 나의 강릉여행은 끝이 났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진짜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흐르니 짜증이 났고 얼마 뒤 갖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 새끼 개호구새끼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그걸 믿냐 ㅋㅋㅋㅋㅋㅋ?”
친구들의 놀림과 함께 그 사람한테 남아있던 일말의 믿음이 모두 증발했다.
이제 그 사람은 지갑과 핸드폰을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기꾼’이 된 거고,
동시에 나란놈은 ‘사기꾼’한테 5분 만에 사기당한 ‘멍청한 호구’가 된 것이다.
강릉사기사건 이후로 동네 공식 호구가 된 나는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 다짐을 했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사람을 쉽게 믿고 당할 사기는 당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예를 들어 신천지 신자가 대학교 심리상담 과제를 미끼로 활용한 포섭에 낚이는 경험등이 있었다.
아, 그렇다고 완전히 사이비종교에 포섭당한 건 아니고 현장에서 햄버거를 사주거나, 커피를 사주는 정도까지만 물렸다.
긍까 딱 그 현장, 딱 그 자리, 딱 그 순간에는 그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사기피해 경험의 반복이 ‘좋은 자양분?’이 됐는지 세월이 흐른 지금은 소위 말하는 호구 잡히는 경험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작아지고 냉소적으로 변해 의심만 가득해진 건 아니다.
‘믿음이나 의심’에 단계 전에 이미 상황이나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참 ‘저렴한 비용’으로 사람 보는 방법을 학습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생각 갖지 마시길 바란다. 왜냐면 애초에 사기꾼들이 없었으면 비용과 시간소모는 물론 감정소모도 일도 없었을 일이기 때문이다.)
고맙다 강릉사기꾼아, 신천지등 각종 사이비종교 신자들아.
너희들 덕분에 교통비, 밥값, 찻값으로 저렴하게 학습했다. 슈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