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은 가벼워지고 간은 무거워지는 취미
지갑은 비어가지만 간은 차오르는 취미?
예상하셨겠지만 제 취미는 ‘술’입니다.
한국의 성인이라면 으레 그렇듯, 주정에 물 탄 초록병 쏘-주 만이 술의 전부라고 알고 지냈지만
서른 살 즈음에 한국의 전통 증류식 소주를 알게 되면서, ‘술에서도 다양한 향과 맛이 날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더랬지요
사실 술의 종류는 딱히 가리지 않는 보편적 술 애호가이지만
맥주나 와인 같은 발효주는 보관하기도 까다롭고, 마시다 보면 뭔가 혼탁하게 취하는데다, 마신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 같죠
- 다양한 향과 맛을 품고 있으면서도
- 조금만 마셔도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으며
- 대충 던져놓고 보관해도 변질되지 않고
- 마신 다음날 숙취가 적은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술인 증류주, 그 중에서도 위스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뭐든지 수집하는 취미는 결국 공간이, 부동산이 필요한 법…
그렇게 술을 모으다 보니, 보관하는 진열장이 필요해서 5단 진열장을 들여놓게 됐습니다.
셀프로 조립하고, 므찐 LED 간접조명도 셀프 시공해줬죠.
(근데 지금은 귀찮아서 안 켬)

위스키 수집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맥O란, 야마O키, 발O니 처럼 비싸기로 유명한 술을 몇 병씩 모으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뭔가 스토리가 있거나, 독특한 컨셉이 있는 술들을 모으게 되더라구요.
방장 방송에 한국 위스키 계의 상징적인 분인 조승원 기자님이 나왔을 때에도 반가워서 생방으로 보고, 원박으로 또 보고, 편집본으로도 또또 봤답니다.

실제로 다른 행사에서 조승원 기자님도 만나서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았더랬답니다!


얼마 전에 쌍베 중달님이 방문하셨을 때 무려 ‘옥토모어’를 사오신 걸 보고 경악했는데요.
옥토모어는 위스키 중에서도 매니악한 피트 위스키, 그 중에서도 향이 지독하기로 유명해서
위스키 매니아들도 큰 맘 먹고 도전할 정도로, 특유의 피트 향(요오드 빨간약 같은 향, 태운 장작 향, 눅눅한 흙 냄새)이 너무 찐하답니다.
음식으로 치면 마치 삭힌 홍어 같은 존재이거늘
쌍베 님이 침착맨 님을 암살하려고 가져온 건가 싶었습니다.

사서 먹어봤는데 한 잔 먹고선 다시 손이 안 가게 되는 무시무시한 그 술…

다시 제 취미 얘기로 돌아오면,
수집이란 것은 새로운 것을 모으다 보면 원래 박힌 것의 자리를 밀어내는 법…
마치 사놓기만 하고 플레이는 안 하는 스팀게임처럼
술을 먹어치우는 속도보다, 사서 모으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 점점 술장의 빈 자리에는 술이 꽉꽉 채워졌고
요리조리 배치해보고… 3줄 4줄로 끼워 넣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자리가 부족해서,
옆에 새로운 장을 들여놓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얼마 못 가 새로운 장도 자리가 다 차버리게 되었고…

독립해서 살고 있었던 저는,
부모님 본가에 있던 술장이 불현듯 생각 났고
새로 산 술들에 밀려나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예전 술들을 부모님 본가에 갖다놓는 효?도를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때에는 부모님 술장에서 몰래 술 빼오던 아들이
이젠 부모님 술장을 든든하게 채워드리니, 이것이 바로 효도가 아닐까요?

참고로 이렇게 술을 사제끼지만
정작 술 마시는 건 한 달에 2~3번입니다.
그래서 사 모으는 속도를 못 따라가요…
그래도 아직 간 수치는 정상이라, 오래오래 천천히 즐기려고 합니다.
그럼 비타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