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 EVE 스토리 듣고 필받아서 써보았음
EVE (가제)
<프롤로그>
바야흐로, 녹음이 깊어지는 5월. 봄의 자취가 사라지고 뜨거움이 엄습해오는 계절에 나는 태어났다. 이것은 축하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했고, 실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숭고한. 사랑의 결실인 생명이 태어나는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이질적인 분위기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름은 루카, 향년 15년+10개월. 나는 그렇게 태어났고, 또한 만들어졌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늘어졌다. 해는 좀처럼 하늘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떨어지는 순간까지 노을이라는 이름의 미련을 남기며 어떻게 해서든 이 하늘에 조금이나마 더 남고 싶어 목숨을 거는 듯해 보였다.
부질없는 아우성. 시간을 넘기는 단순한 작업들은 이미 마친지 오래이나, 나는 무엇인지 아쉬움이 남은 사람처럼 그저 반복적으로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떨어져 가는 해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찬란히 빛나며 죽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결국엔 내일 또다시 떠서 언제나처럼 삶을 영위해간다. 이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얼마나 무료한 삶이랴.
창밖에 까마귀 한 마리가 거슬리게 울면서 날아간다. 의외로 생각보다 크고 시꺼멓게 생겨 을씨년스럽게 생긴 까마귀를 몇 마리의 까치들이 쫓아간다. 쟤네는 아무것도 없는 이 도시에서 뭘 먹고 살까? 벌레조차 안 보이는 이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필연, 쓰레기를 뒤져야 할 것이다. 세상은 먹을 벌레조차 없게 삭막해졌고, 혹은 그런 벌레만도 못한 인생도 있는 것이다.
그날은 내 생일이다. 생일-이었다. 생일-일 것이다. 아마 그렇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나에게 그런 것을 알려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 법적인 생일은 알고 있다. 150527 주민등록에 적혀있는 생년월이 앞자리가 내가 태어나는 날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생일’ 날 생(生)자에, 날 일(日)자를 쓴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났다는 날에 큰 의미를 둔다. 그저 지나가는 365일 중에, 태어나야만 한다면 거칠 수밖에 없는 필연적으로 불특정한 하루를 사람들은 축하해준다. 왜 그럴까? 왜 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세상에 태어난 무의지적인 하루를 서로 기뻐하는 것일까. 속이 쓰리다. 분명 점심을 거른 탓일 것이다.
돌아가는 길, 나는 중학교 때 선생님을 만났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알려준. 유일한, 쓰라린 존재다. 그는 나를 해처럼 밝은 얼굴로 반겼다. 그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것을 공부하는지, 무엇을 배우는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등등 그리고 이따금 자기의 생각에 내가 어떤 진로를 가야 하는지 이에 대해서 묻곤 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예약한 식당으로 걸어가며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선생님은 반짝이는 눈으로 끊임없이 나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을이 유난히 선명한 날이었다. 한강 한 가운데 찬란히 걸린 노을은 여느 때처럼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걸 질기게 거부했다. 머리를 강바닥에 길게 느리우고있는 태양을 보며 무심코, 오늘 처음으로 문장을 내뱉었다.
‘선생님, 저는 천재가 아닌가 봐요.’
앞서 걸으며 신나서 이야기하던 선생님은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루카, 그게 무슨 소리니? 너처럼 똑똑한 학생은 없단다! 최소한 너는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학생들보다 뛰어났어. 요즘 연구가 잘 안 풀리니?’
그는 걱정인지 불안인지 모를 눈으로 나를 관찰하며 말했다.
‘저 그냥 다시 학교로 돌아갈까 봐요.’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이 무너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눈 속에서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시선을 보게 되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니, 루카! 너는 분명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릴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너희 부모님께 받은 유전과 네 재능을 생각하면 부모님처럼, 아니 더 큰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속이 쓰린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혐오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아무래도 우리 교수님께 연락을 한번 드려야겠어, 이제 15살인 애한테 너무 지루한 과제만 시키시는 게 아닌지 말이야.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니 고리타분한 면이 있으셔서 그렇지...’
다시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걸어가며, 당황스러운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뒤로한 채 나는 비로소 마주하고야 말았다. 내가 행복해지는 일을. 내가 바라는 것을.
[풍덩-]
소리와 함께 내게 행복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