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와 이병견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자공이 물었다.
“한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子曰, 未可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부족하구나.”
鄕人皆惡之, 何如?
“그럼 마을 주민들이 다 그를 싫어하면 어떻습니까?”
子曰 未可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부족하구나.”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마을의 착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미워함만 못하다.”
송나라 유학자 주자는 논어 자로편의 저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의론이 공평해도 각자 좋고 싫음의 기준이 다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사람은, 필시 구차하게 남의 의견마다 부합하며 아첨하는 사람일 거다.”
“반대로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는다면 좋아할 구석이 없는 사람일 거다.”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둥글게 둥글게 이야기하며 마찰이 없고 분란거리가 없는 사람을 좋게 여기지만,
사람들의 호불호는 제각기 다르고, 취향도 딴판이며, 심지어 도덕이나 윤리도 반드시 하나로만 합치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몹시 조용한 사람이라 스스로의 뜻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소신을 모두 밝히면서도 누구의 원망도 사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듭 번복된 타협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것은 둥글다고는 부를 수 있지만, 자기 의견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구차하게 반 년, 일 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타인의 뜻을 마지못해 좇는다면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자로편의 또 다른 구절에는, ‘화이부동’이라는 유명한 성어의 원전 구절도 등장합니다.
“군자는 타인과 화합하되 의견을 똑같이 하지는 않는데, 소인배는 타인과 의견을 똑같이 하면서 화합하지는 못한다.”
갈대처럼 무지성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주워 섬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보다는 소신 있게 결단하되 책임을 지는 것이 낫다고 공자는 강조해 왔습니다.
논어 공야장편에 따르면, 미생고라는 사람이 정직하기로 소문났으나 공자는 그를 꺼렸습니다.
“누가 미생고더러 정직하다고 하는가? 식초를 빌려달라고 손님이 찾아오자, 미생고는 이웃집에서 빌려다 주었다.”
유학자 정이천은 범씨의 말을 빌려 이 구절을 읽어내기를,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하는 것이 정직이라고 말했다.”
식초가 없다고 털어놓는 일에는 나름의 용기가 필요하지만,
정직한 삶을 얻고 싶다면 대단히 싼 값이 아닐까요?
말과 행동까지 구태여 이웃집에서 빌려올 필요가 없으니 더더욱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