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빨간 루즈
때는 바야흐로 2005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제 경험담입니다.
당시 신림동은 방장님이 말씀해오신 안산 못지 않게 산적, 초적, 야적, 마적들이 판을 치는 동네였습니다.
pc방에 가려면 양말, 심하게는 팬티 안에 현금을 숨겨 약탈을 피해야 했고, 아는 선배나 형이 없다면 순순히 노략에 응해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을 뉴비인 저로서는 동네 형 하나 없이 살아남기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신림살이 중 가장 힘든 일은 학원 하원길이었습니다.

학원 봉고차에서 예닐곱시에 1번 골목 입구 앞에 하차하는데,
보시다시피 1번 골목엔 늘 초적(밤에는 야적으로 전직합니다.)들이 상주해 있었습니다.
반면 2번 골목은 어르신들이 밤낮으로 모이시며 노상보안관 역할을 해주셔서인지 늦은 밤까지도 비교적 안전한 골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적들의 눈을 피해 주로 2번 골목으로 돌아서 귀가했습니다.
(멋 모르고 집에 빨리 가기 위해 1번 골목을 이용했다 된통 털렸습니다.)
사건 당일도 봉고차에서 하차하니 골목 중간에 야적으로 전직을 앞두고 있는 무리가 보였습니다.
저는 소환 호령이 떨어지지 않게 고개를 묻고 곧장 2번 골목으로 향했습니다.
그 날 따라 골목에 아무도 계시지 않았지만 상대적인 심적 안정감을 느끼며 귀가를 하던 중,

표시한 계단에서 하얀 원피스에 무지 긴 생머리의 여성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피부도 원피스 만큼이나 흰 여성이었는데, 1층 대문에 내려 온 모습을 보니 고개를 푹 숙이고 새빨갛게 발린 입은 미소를 띄었습니다.
저와 가는 방향이 달라 엇갈려 가고 있는데 여성이 조금씩 미소가 커지며 제 쪽 대각선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 어, 부딪히겠다’
생각이 들어 어깨를 틀어 피하려 했지만 사진의 sm7 위치에서 결국 부딪히고 말았는데, 아무런 접촉감 없이 스쳐가는 겁니다.
'뭐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골목엔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스쳐간 느낌이 생생하던 중, 순간 머릿 속이 하얘져 전속력으로 집에 달려갔습니다.
그 날 밤 부모님께 일을 말씀 드렸지만 믿어주시지 않았고,
저에겐 도적들이 도사리는 1번 골목과 귀신 나오는 2번 골목만 남게 되어 투쟁 끝에 좀 더 일찍 끝나는 학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젠 도적도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지만, 이 골목을 지나다보면 이따금씩 생각이 납니다.
그 여성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p.s.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려 했던 어릴 적 습관으로 아직도 늦은 새벽에 귀가할 땐 주머니 속에 열쇠를 꼭 쥐고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