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에 관하여
흔히 고려장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생각하지만, 저는 고려장이나 최소한 그와 비슷한 풍습이 20세기 중반까지 남아있었다고 추정합니다. 물리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해주신 옛날 이야기에서 시작하니까요.
할아버지는 경북의 한 깡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오는 동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슬레이트 지붕조차 거의 없고,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나 초라한 불량주택이 가옥의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외부와 거의 교류하지 않았던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려장이라고 말한 매장 풍습이 이 마을의 고유한 것인지, 당시 이 지방에 널리 펴져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마을 부근에선 가난한 농민들의 일반적인 장례 형태였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인이나 병자가 거의 다 죽어가면, 예를 들어 자리에 누워 일어날 가망이 없으면, 뒷산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움막을 하나 짓습니다.
흙은 구덩이 바로 옆에 쌓아둡니다. 그리고 묻힐 사람을 구덩이에 집어넣습니다. 산채로 묻어버리는 건 아닙니다. 구덩이의 깊이도 아주 깊지는 않다고 합니다.
만약 구덩이 안에서 기력을 차려 빠져나오면 다시 사는 것이고, 기력을 다 해 죽게 되면 그대로 묻히게 되는 것이지만, 전자는 거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더라도 산을 타고 내려와야 하니까요.
상주는 하루 한 번, 정말 적은 양의 먹을 것을 구덩이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며칠 가져다 놓으면, 어느 날 음식이 제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움막을 무너트립니다. 옆의 흙더미를 쌓아 낮은 봉분을 만듭니다.
제사는 간소하되 장례 절차는 민간에서 하던 대로 밟는다고 합니다.
가끔 산짐승이 구덩이를 해집어 놓기도 하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물어가는 일은 잘 없답니다. 음식 냄새에 꼬이는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신을 얕게 매장하면 뱀굴이 되기도 하고, 특히 맷돼지가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처음엔 저도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중후반, 한창 한국이 산업화 되고 있을 시기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선 그렇게 만들어진 무덤들이 많으며, 믿지 못하겠다면 데려다 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터부시하고 넘어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을에서 나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셨기에, 부모님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묻어드리진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가난한, 그래서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저런 문화를 고수했다고 합니다.
언제 고려장 문화가 사라졌는진 모르겠습니다. 아마 할아버지가 저 풍습을 본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을에 도로가 뚫리고 외부와 연결되며 살림살이가 나아진 후 없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선 저렇게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고, 그런 묫자리들이 어디 있는지 들어보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산골짜기의 능선을 오르다 나지막한 봉분을 보면 그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젠 아무도 찾지 않아 사라져가는 무덤들. 저 중에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신 무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할 때면,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걸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민속학이나 인류학적으로 탐구할 거리가 된다면, 빨리 하셔야 합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들을 알고, 또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설은 찾아볼 수 없는 흙더미에 묻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