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고개

한강의 남쪽, 청계溪의 북쪽에 과천이 있다. 

과천관사의 뒤쪽으로 큰길이 나 있는데, 산 위로 오르는 길을 여우고개라 한다.

옛날 이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었는데, 

길을 가며 살펴보 니 몇 칸 초가집이 있었고, 

집 안에서는 무엇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그네가 안을 들여다보니 머리가 허연 노인이 소가죽 위에 앉아 바야흐로 나무를 깎아 소의 머리를 만들고 있었다. 

나그네가 서서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것을 만들어 어디에 쓰시렵니까?"
"쓸 데가 있소.”
이윽고 소의 머리가 완성되니 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머리 위에 한번 이어 보시지요."
또 소가죽을 집어 주면서 말하였다.

"한번 입어 보시오."
나그네는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관을 벗고서 소가죽을 머리에 쓰고 발가벗은 몸에 소가죽을 입었다. 노인이 말했다.
“벗으시오."

나그네가 그것들을 벗고자 했으나 벗겨지지 않더니 인하여 한 마리의 큰 소가 되어 버렸다.
노인은 그를 외양간에 매어 놓았다가 다음 날 타고서 시장으로 갔다. 

때는 바야흐로 농사일이 많을 때였으므로 비싼 가격으로 팔수 있었다. 나그네는 큰 소리로 저자에서 말하였다.

"나는 사람이지 소가 아니오!"

그간의 사실을 다 갖추어 말해도 물건을 사고팔려고 나온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이가 말했다.

“이 소는 집 안에다 송아지를 남겨 놓았나, 아니면 뱃속에 우황 이 들었나! 왜 이리 시끄럽게 굴지!"

노인이 높은 가격을 매겨 50단端의 베를 받고 팔면서 소를 사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 소를 끌고 무 밭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이 소는 무를 먹으 면 곧바로 죽습니다."

소를 산 사람은 그 소를 타고 가거나,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곳에 가거나, 

보습을 메고 땅을 갈았으므로 무척 피곤하여 숨을 헐떡 였는데, 

그때마다 채찍질이 가해져 그 고통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분노하여 하소연해도 주인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사물 중 최고의 영물인 인간이 본 형체를 잃고 가축으로 변하고 만 것을 스스로 비감하여 죽으려 했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그 집의 말구유는 문 가까이 있었는데, 어떤 아이가 무를 씻어 광주리에 가득 채워 가지고 문으로 들어왔다. 

나그네는 무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던 노인의 말을 생각하고 입으로 광주리를 쳐서 무를 땅에 떨어뜨린 뒤 

재빨리 몇 뿌리를 먹었는데, 먹자마자 소 머리가 스스로 떨어지고 소가죽도 스스로 떨어 져 나가 완연히 발가벗은 사람의 몸이 되었다. 

주인이 놀라 묻자 나그네는 그 일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해 주고 다시 여우고개를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는 예전의 초가집은 없고 다만 바위 아래 베 몇 필만이 있었으니, 여우고개란 이름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출처 : 유몽인의 설화집 어우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