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터법이 너무 무서운 이야기
오늘도 나는 구질거리는 10평 집을 나서 동대문 시장으로 나섰다.
자주 가는 매장이지만 사장님은 언제나 무표정하다.
나도 무표정한 얼굴로 다이에 깔린 원단 중 하나를 골라 10마를 주문한다.
내게 등을 진 채로 돈통을 뒤적이는 사장님 왈 창고에서 끊어와야하니 정오 이후에 오란다.
부자재 상가를 어슬렁거리다 지친 나는 시장 밖 카페로 간다.
평소라면 16oz를 마시겠지만 피로를 느낀 나는 20oz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는다.
몸이 으슬으슬하니 감기가 올것 같다. 얼른 원단을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뒷편 테이블에는 실습 재료를 사러 나온듯한 대학생들이 발랄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의도치는 않게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으나 퍽이나 흥미롭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떠도는 도시 괴담인데, 어두운 밤길을 지나는 자의 등 뒤로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맨 덩치 큰 사내가 나타나 혼잣말을 하다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뭐 딱히 해를 끼치지는 않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사라진다는 모양으로 좀 괄괄한 여학우 말이 그건 귀신이 아니라 용인의 인기스타 푸바오가 아니냔다. 그걸 듣고 나는 혼자 좀 웃었다가 급히 핸드폰을 보며 웃는 척을 했다.
여튼 정오가 좀 넘어 다시 낡은 시장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나는 지게꾼 아저씨와 배달 백반을 이고 진 여사님들을 피해 주문한 원단을 픽업하고 이 우중충한 건물에서 도망치듯 나선것이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곤혹스러웠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 좀 녹았던것 같은 몸이 다시 얼어붙으며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이다. 이러다간 10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는게 아니라 10리도 못가 송장을 치르게 생겼다.
버스에서 내리니 찬 공기에 머리가 좀 깨이는듯 하다. 나는 집으로 가는 대신 시장으로 향했다. 모름지기 한국인이라면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전기장판 위에 누우면 대부분의 병은 씻은듯이 낫는다. 그러나 뜨끈한 국물을 꿈꾸며 반찬가게를 둘러보니 치솟은 물가에 소름이 돋는다. 가격은 올랐으나 양은 반절이다. 가루고기가 든 값 비싼 김치찜 대신 김치를 반포기 사서 나선 뒤 정육점으로 향해 돼지 전지를 한근 산다. 이걸로는 조금 섭하니 옆에 있는 전집에서 전도 한근 샀다. 양이 좀 적은듯 하여 투정을 부려보니 고기랑 전의 근은 다른거라나. 그리고 부속 가게에서 양파 한 망과 파를 한 단 산 뒤 누워서 먹을 도나쓰도 한 다스 산것이다.
이리하여 대량의 짐을 이고 지고 걷다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다. 상가를 도느라 더워졌던 몸이 식어 다시 으스스하니 컨디션이 영 별로다. 어서 가야지… 하고 골목길을 돌아들어가는데 으슥한 전봇대 아래, 둥긋한 인영이 보인다. 나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낮에 어린 학생들이 떠들던 이야기가 생각나 섬찟하였으나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습지도 않다. 이 나이에 무슨 그런 이야기에 겁을 먹고선… 무엇보다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나. 어쩌면 진짜 동물원에서 탈주한 푸바오일지도 모른다. 그럼 사진이라도 찍으면 좋을지도 모른다.
“…10평은 33.0579제곱미터…”
딱 가로등 불빛 앞을 지나가는데, 귓가로 음산한 소리가 들린다. 너무 놀라 흠칫거리며 옆을 돌아보았으나 그 검은 인영은 딱 불빛에서 한걸음 벗어난 어둠 속에 서있을 뿐이었다.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채 양손에 검은 봉투를 잔뜩 든 나는 그 자리에서 떨 수 밖에 없었다. 곧 내 등 뒤로 으슥한 그림자가 덮쳐왔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빠르게 속삭이는 소리만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사실평이라는단위가익숙하지만단순하게3.3을곱하면아주쉽게해결될문제이지요그리고한마는91cm인데원단의단위는보통마,야드를많이쓰지요이것도미터로통일하는게참아름답다고생각됩니다그리고16온즈는473.2밀리리터,20온즈는591.5 밀리리터랍니다그리고10리라고하셨는데1리는392.727미터이니10리는대략3,927.27미터,곧4킬로미터정도가되겠군요하지만실제로는약12킬로미터정도떨어진거리가아니었나요또여기서이해할수없는건같은근이라는단위를쓰면서고기는왜600그램이고전은400그램이한근이되냐는점입니다양파한망과파한단은대체몇개씩인걸까요차라리개단위로파는게합리적이진않은지요더즌은12개입이…”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미터법의 합리성에 탄복하며 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오뱅알 곽 박사님 또 와주세요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