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국사를 연구할때 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참고하는 이유
'일본서기'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은 있으신가요?
일본서기(日本書紀 *1)란 8세기에 일본 황실이 황실의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쓴 사서(역사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있죠.
임나일본부설, 역사에 관심이 없으셔도 한번쯤 들어보셨을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입니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었다는 이 주장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합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왕후라는 인물이 대군을 이끌고 삼한을 정벌하고 이중 임나(* 2)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세워 지배했다고 하죠.
현재는 고고학적 발굴과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추가 연구와 노력 끝에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에서도 폐기되고 그 존재가 부정되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이를 주장하며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일이죠. 한국 주류사학계에서는 백제, 가야 혹은 그전에 있던 삼한(마한, 변한, 진한)을 연구할때도 바로 이 일본서기를 참고하기도 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이는 일본서기가 어느정도는 정확한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나라는 고대사를 연구하고 싶어도 목독/목간 하나에 학계가 뒤집히기도 할 정도로 사료들이 정말 부족해서 교차검증을 통해 일본서기의 내용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럼 일본서기의 정확한 내용은 어떤게 있을까요? 대표적인 예시가 무령왕 관련 기록입니다.
<무령왕 표준영정>
백제의 제25대 어라하(왕)인 무령왕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장수왕에 의해 한강 유역을 뺏기고 일시적으로 멸망 직전까지 갔던 혼란스러운 백제를 안정시키고 중흥기로 이끈 명군입니다. 백제 후기의 왕이기에 무령왕은 삼국사기에도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무령왕(武寧王)의 이름은 사마(斯摩) 혹은 융(隆)이며 백제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키가 8척에 눈매가 인자하고 너그럽게 생겨 민심이 그를 따랐다. 501년에 동성왕이 백가에게 암살되자 왕위에 올랐다. [중략] 523년 5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무령(武寧)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장 '무령왕본기' 中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백제의 24대 왕이던 동성왕의 아들이며 본명은 융 혹은 사마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출생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기에 자세한 나이는 알수 없습니다.
일본서기에도 무령왕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다음 기록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무령왕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유랴쿠 5년(461년) 6월 1일에 개로왕의 임신한 부인이 두달 전 개로왕이 염려하던대로 츠쿠시국의 카카라시마(各羅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아이의 이름은 세마 혹은 사마(島)라 하였다. 동행하였던 개로왕의 아우 부여곤지가 아이를 배에 태워 본국인 백제로 돌려보내니 이 아이가 훗날의 무령왕(武寧王)이다. 그리하여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주도 혹은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 일본서기 제14권 유랴쿠텐노 中
“부레츠 4년(502년)에 백제의 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귀족)이 드디어 동성왕을 제거하고 세마를 왕으로 세우니 그를 무령왕(武寧王)이라고 한다.”
- 일본서기 제16권 부레츠텐노 中
“케이타이 17년(523년) 여름 5월, 백제 무령왕이 죽었다.”
- 일본서기 제17권 케이타이텐노 中
일본서기에선 무령왕의 사망과 즉위일에 대한 내용은 삼국사기와 동일하지만 무령왕은 461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이 ‘세마’ 혹은 ‘사마’인 것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정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서술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선 무령왕의 아버지는 동성왕이라 기록되었으나 일본서기에선 개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무령왕은 아버지가 두 사람입니다….헉!
어머니가 두 명인 말딸에 이은 아버지가 두 명인 백제왕...은 그럴리가 없고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동시기의 기록이 존재한다는건 두 기록중 하나는 잘못된 정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취사를 해야겠죠?
하지만 교차검증할만한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계는 골머리를 앓던중...
1971년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게 됩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게...
바로 기적적으로 충남 공주에서 이 기록의 주인공인 무령왕의 무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겁니다.
비록 발굴과정은 한국 고고학계에 영원한 흑역사로 남았지만 동시에 한국 고고학계에 세기의 발견을 꼽는다면 반드시 언급되는 유적이죠.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미스터리를 해결해줄 지석이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지석의 서문은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동대장군이신 백제 사마왕께선 나이가 62세 되시는 계묘년(523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은 계묘년(癸卯年)인 523년에 62세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를 역으로 환산해본다면 무령왕이 461년에 태어났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또한 이 계산대로라면 501년 즉위 당시 무령왕의 나이는 마흔(40세)이기에 36세에 사망한 동성왕의 아들이 될수 없습니다.
즉 정리하자면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정확했던겁니다.
그럼 왜 무령왕은 자기보다 4살이나 어린 사람의 아들로 삼국사기에 기록된걸까요?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학자들은 이를 '무령왕이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록상으론 선왕의 아들로 등록했는데 훗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이를 오독한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3)
이와 비슷하게 두 기록이 상충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맞붙은 카데시 전투죠.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 부조등의 기록에선 람세스 2세가 적군인 히타이트의 기습에 신으로 변해 히타이트군을 학살했다는 신화적인 내용이 써있습니다.
하지만 히타이트의 점토판 기록들이 훗날 발견되면서 람세스 2세가 기습을 받아 이집트는 주요부대가 전멸했지만 뒤늦게 도착한 구원군 덕분에 큰 피해를 입은 히타이트는 요새로 돌아가 농성했고 결국 람세스 2세는 공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는 진실을 두 자료의 교차검증을 통해 추정할수 있습니다.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에서 묘사된 카데시 전투>
하지만 이집트의 기록도 모두 허구는 아니였습니다. 자세한 부대들의 편제와 전투 상황에 대한 기록들은 히타이트측 기록과 대부분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분명 허구적이도 말도 안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령왕의 출생기록과 같이 정확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엄격한 교차검증을 통해 극소수의 검증된 사료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일본서기를 인용했다고 해서 잘못된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최소한의 교차검증/팩트체크조차 안되는 위서(예: 환단x기)를 인용하는 것이 훨씬 위험한 일인겁니다.
<각주 추가 설명>
[* 1: 일본에는 일본서기 외에도 고사기(古事記)라는 역사책이 또 있습니다. 이 두권의 역사책을 묶어 일본에선 기기(記記)라고 부릅니다. 이자나기, 이자나미, 스사노오, 아마테라스, 츠쿠요미등 일본 황실의 신들은 전부 이 책들에서 첫 언급되기 때문에 이 신화들을 기기신화라고 부릅니다.]
[* 2: 임나일본부란 용어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이 쌓였습니다만 사실 '임나'라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도 쓰였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에서도 임나가라, 임나가량이라는 지명이 언급되며 이 임나는 오늘날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금관국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 3: 신편 한국사와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등에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실 무령왕의 친아버지는 개로왕의 형제이자 일본의 사절로 파견된 부여곤지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부여곤지는 동성왕의 아버지여서 이 가설이 맞다면 동성왕과 무령왕은 이복형제가 됩니다.]
<자료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s://db.history.go.kr/
동북아역사넷 - http://contents.nahf.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