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국지에 안나온 DLC 수춘삼반 1 : 왕릉의 난
수춘삼반이란 침국지에서는 제갈량 사후(234년) 촉한 멸망(263년) 정도만 다뤘는데
그 사이 반대 쪽 오나라 방면에서
왕릉의 난(251년) → 관구검의 난(255년) → 제갈탄의 난(257년)으로 이어지는
10년 내 같은 장소에서 무려 3번이나 반란이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수춘이란 어느 곳이냐?

지도에 표시한 대로 오나라 수도인 건업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로
막는 게 뭔지 보여줬던 장료가 지킨 합비성이 있는 양주 지역의 중심도시다.
따라서 수춘은 위나라의 대오전선의 요충지이자 군사적으로 꽤 중요한 거점이었고,
좁고 험한 지형이 막아주는 대촉전선에 비해
개활지가 많아 꽤 많은 군사와 물자를 두었는데 이게 반란의 양분이 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옛날에 원술이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으로 훗날 황제를 칭했다가 조조에게 정벌당하기도 한 땅으로써
어찌보면 유구한 전통이 있는 반역(?)의 땅이기도 하다.
- 왕릉의 난(251년) -

먼저 첫번째 반역은 바로 왕릉이 일으켰는데
사실 웅대한 꿈에 비해 제대로 된 반란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긴 하다.
왕릉은 240년 만총의 뒤를 이어서 대오전선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후
249년 고평릉 사변이 발생하며 사마씨가 권력을 잡자 조카이자 예주자사인 영호우와
사마씨의 축출 및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고 초왕 조표를 황제로 옹립할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계획을 짜던 영호우가 병사하고 지지부진 하던 와중에
251년 부하인 황화와 양홍의 밀고로 결국 사마의에게 계획이 발각되었다.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호송되던 중 왕릉은 자결을 하고 이후 그의 삼족이 멸족된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왕릉이 조조 시절부터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과 굉장히 교우가 깊었고
자연스럽게 사마의와도 친구 / 동료로 무려 40년 가까이 지낸 인물이라는 것인데

그런 인물의 모반 계획이 충격이었는지 아니면 지속된 굵직한 사건들로 인한 스트레스였는지
중달 사마의는 왕릉의 난 이후 얼마 못가서 251년에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사마의 사후, 그 권력은 장남인 사마사에게 넘어갔고

대오전선의 지휘권은 양주자사를 넘어
진동장군, 산양정후에 봉해지고 가절 도독 양주 제군사가 된 제갈탄에게 넘어갔다.
그렇다면 왜 두번째 난은 제갈탄의 난이 아닌 관구검의 난일까?
여기에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바로 사마의 사후 252년 대장군에 오른 사마사와
같은 해 손권이 죽으며 즉위한 손량이 태부로 임명한 제갈각이
동흥 전투를 벌이며 일어난다.
황제 다음 가는 권위를 누리게 된 두명의 2세대 권신들은 보다 빠른 지위 확립을 위해
업적을 쌓아야 했고 업적작 중에 제일 빠르고 확실한 게 바로 군공이었다.
마침 제갈각이 동흥에 제방을 새로 쌓으며 위협을 가했고
유인에 넘어간 사마사는 왕창, 관구검, 호준, 제갈탄 등 대오방면 모든 병력을 가용해
강릉, 무창, 동흥 3방면으로 쳐들어간다.
이때 문관인 상서 부하(傅嘏)가 둔전을 하며 장기전으로 가야한다 주장했지만
당장의 성과가 필요했던 사마사는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위나라는 오나라에게 대패를 했고
수만의 병력을 잃게 된다.
이때 잃은 병력이 촉이 한평생 북벌을 하며 위나라에 낸 피해보다 크다고 하니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될 것이다.
이에 책임을 지고 사마사는 세부적인 전략에서 제갈탄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깔끔하게 인정하면서 부하들을 문책하지 않고
동생 사마소와 함께 지위를 셀프 강등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넘어갔는데

이 와중에 제갈각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기록한 제갈탄을 진동장군에서 진남장군으로 전임시키며
관구검과 영지를 바꾸게 하여 여남으로 발령을 보내게 되니
대오전선 책임자가 제갈탄에서 관구검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후 관구검은 253년, 합비로 다시 쳐들어온
제갈각의 대군을 크게 물리치면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된다.
그렇게 255년..…
-to be continued-
다음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