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벽의 유학자(아프다)

설제薛悌. 자는 효위孝威.
후한 말 조조의 신하. 위나라의 관리였고 유학자였습니다.
이 이름도 생소한 사람은,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거의 출연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겐 위나라는 물론이고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도 비견할 사례를 찾기 힘든 별난 캐릭터성이 있습니다.
바로 ‘문관 주제에 굵직굵직한 방어전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성과도 우수했다’이는 점입니다.
어쩌면 사마의나 정욱처럼 본인이 장군직을 갖고 군대를 지휘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가장 커리어가 특이한 축에 드는 문관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상서령까지 역임했을 만큼 거물이라면 거물이기에 더 그렇게 느껴지죠. (개인적으로는 삼국지 대체역사 소설 같은 걸 쓴다면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험한 전쟁터를 다니게 되었는가 하면 시작부터 흥미로운 이야기인데요…
연주 시절 : 조조의 혼란기
설제는 본인 열전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다른 인물들의 곁다리 기록에 의존해야 생애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진교전에 따르면, 설제는 22세 때 연주종사이자 태산태수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고작 22세의 나이에 연주 지역의 보좌관이 되고, 동시에 연주 태산군의 태수를 겸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출세한 거죠. 이 정도 청년이 태수를 맡은 사례는 상당히 드뭅니다. 제가 일일이 나이별로 정리해 본 적은 없어서 자신은 없지만, 어쩌면 삼국시대에 한한다면 최연소 기록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이례적인 인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연주의 지배자였던 인물은 연주목 조조. 조조가 파격적인 용인술의 소유자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그렇다 해도 새파란 젊은이를 보좌관으로 삼는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이런 선택을?
사서상에는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죠. ‘22세에 연주종사와 태산태수를 지냈다’고는 나왔는데 왜인지까진 안 적어뒀습니다.

어떻게든 상상력을 짜내서 전후관계를 맞춰봐야 할 때입니다. 역사학자들의 전문용어로는 똥꼬쇼라고 하지요.
다행히 같은 연주 출신으로 이 시기에 눈부신 활약을 보인 조조의 모사 정욱 덕에? 그나마 설제의 신상을 유추할 실마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욱전에 따르면, 정욱이 아직 출사하지 않고 동네 어르신으로 살던 시절에 왕도(王度)라는 사람이 황건적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현령은 반군을 막기는커녕 도망가버렸고, 정욱이 이때 민병대를 규합하여 책략을 세워 적군을 막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마 정욱의 유명세에 힘입어 알고 계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화에 등장하는 엑스트라가 중요합니다.
정욱이 현의 대호족(大姓])인 설방(薛房) 등에게 말했다. (…) 설방 등이 이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 정욱전
보시는 바와 같이 이때 정욱에게 호응해 군사를 내어준 대호족의 이름이 ‘설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한 지역에 호족이 한두 가문이 아닐 수 있고, 그 점에서 이 기록상으로도 설방 ‘등’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정욱 편을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중 설방이 대표자격으로 거론된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겠죠. 여러 호족 집안 중에 설씨 가문 파워가 가장 셌거나, 혹은 정욱에게 제일 호의적이었거나. 왕도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최고로 공을 많이 세워서일 수도 있어요.
어느 쪽이건 간에 ‘연주에 설씨 가문이 있었고, 정욱과 행동을 같이했다’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이 설방이라는 사람은 설제와 친족이었고, 조조가 연주에 들어와 정욱을 등용할 무렵 조조 편에 붙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림이 그려지죠.
외부인인 조조에게 먼저 호응한 호족이 별로 없던 것이 다른 기록들을 통해 얼추 짐작할 수 있고, 실제로도 여포가 후에 반란을 일으키며 연주가 요동친 것에서도 소급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연주의 토착 세력가들 중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이 바로 설씨 가문이었고, 그렇기에 파격적일지언정 설씨 가문의 젊은이인 설제를 발탁해 요직에 앉히는 것이 안전하다… 는 것이 조조의 계산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기까지의 추측에서 실제 사서상으로 전말이 밝혀진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파편적인 진술을 끼워맞췄을 뿐이죠. 다만, 그렇게 해서 기워 붙인 서사가 제가 보기엔 제법 자연스러우며 ‘왜 저렇게 젊은 사람이 쾌속출세했나?’ 하는 의문을 잘 설명합니다.
저는 여기까지의 뇌피셜에 만족합니다. 이런 게 또 삼국지의 매력이죠. 온전한 그림을 발굴하는 것 말입니다.
(추가적으로, 여포의 반란 때 호응했던 인물 중에 설란이라는 사람도 있었죠. 이봉과 설란 할 때 그 사람 맞습니다. 매체에서는 여포군 무장처럼 그려지지만 설란의 직책이 ‘연주 별가’라는 연주 수석보좌관이었음을 생각하면 전 설씨 집안 내에서 지역의 향방을 두고 분열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이때 만약 설제가 정욱과 설방의 방어전에 직접 참여했다면 현재 방어전 전적 통산 1회 1승.
아무튼 조조의 이 선택은 일단 최악의 실패를 낳진 않은 듯 보입니다.
정욱이 또 따로 기병을 보내 창정진(倉亭津)의 나룻길을 끊게 하니, 진궁이 여기에 이르렀으나 건너지 못했다.
정욱이 동아현에 이르르자, 동아현령 조지(棗祗)가 이미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독려하여 성에 웅거하여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또 연주 종사(從事) 설제(薛悌)가 정욱과 같이 힘모아 모의하여 마침내 세 성을 완전히 보전하며 태조를 기다렸다. 태조가 돌아와 정욱의 손을 잡으며
“그대의 힘이 없었다면 난 돌아갈 곳이 없었을 것이오”
라 했다. 이에 표를 올려 정욱을 동평(東平) 상(相)으로 삼고, 범현에 주둔토록 했다.
- 정욱전
설제는 연주가 통째로 조조에게 반기를 든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욱과 함께 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서 포커스를 받는 쪽은 정욱이지만, 당시 상황이 엄청나게 어려웠으니만큼 방비에 참여한 당사자인 설제 역시 공로를 나누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방어전 통산 전적 2전 2승.
또, 직접적인 전투라고 하긴 뭣합니다만, 설제가 맡았던 ‘태산태수’라는 직책 말인데요. 여기서 연주 태산군이 어떤 곳이었냐면…
하비의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으고 천자(天子)를 자칭했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그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현, 비(費)현을 차지하고 임성(任城)을 공략했다.
- 무제기
→ 서주대효도 직전 태산군의 살벌한 풍경. 태산은 연주 맨 동쪽에 붙어서 서주와 인접해 있는 경계 지대인데요. 그만큼 서주목 도겸이 조조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방을 주고받을 무렵 태산군은 적습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서주에 있던 조숭이 피신하다가 거쳐간 곳도 태산군. 기록에 따라 사소한 차이가 보이나 조숭이 죽은 곳도 태산군인데, 이 때문에 설제의 전임 태산태수로 보이는 인물인 응소는 조조의 보복을 피해 원소에게 망명하기도 합니다.
즉, 조조에겐 아버지 무덤자리도 있고 도적들은 넘쳐나고 여러모로 위태로웠던 지역.
태조가 말했다.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
- 무제기
→ 조조가 여포의 허장성세를 간파하는 대목이지만, 여기서 일단 여포군에게 ‘태산의 길이 끊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태산 사람들 입장에선 비상사태도 이런 비상사태가 없었겠습니다.

(장패)
아마 태산군 출신의 산적, 이때는 여포와 협력하고 있었을 장패 같은 인물들이 태산군을 괴롭히고 있었겠지요.
이보다 더 후대의 일이지만 태산은 산이 험하고 바다와 인접해 있어 순 도적 소굴이라는 언급(여건전), 아마 설제의 후임 태수로 추측되는 양무가 막 부임해왔을 시점에 도적의 영향력이 아직 상당했다는 기록(양무전) 등을 보면 태산군은 불운하게도 지리적 입지상 줘털리는 포지션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 시기 설제가 동군을 수비하기에도 바빴을 것이니 태산의 방어에 공을 세웠을 것 같진 않지만, 만일 태산태수 경력을 여기까지 어거지로 끌어올 수 있다면(가령 재점령 후 다시 업무를 봤다던가) 현재 통산 방어전 승률 3전 3승.
그 뒤로 설제는 한동안 기록이 비는데, 진교전에 따르면 태조가 기주를 원정하러 떠났을 때 장사(일종의 임시권한대행 정도로 이해하시면 편합니다)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즉 관도대전 기간 동안 본거지인 허도 일대의 업무를 명목상 대리했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관도대전 전후 허도 인근이 공격받은 적이 있었으니 이것도 어거지로 치면 4전 4승까지 잡을 수 있겠지만, 역시 그건 무리 같아서 빼겠습니다.
그 후, 한동안 역시 기록이 없던 설제에게 또 한 번 역대급 위기가 찾아오는데…
그 성의 주임원사님, 행정부 수장으로
침국지로 끊임없이 담금질이 완료된 여러분은 아마 이 문구가 익숙하실 것입니다.
장료, 이전은 나가서 싸우고 악진은 수비하라.
료라이라이 타임이죠. 합비에서 손권의 10만 병력을 저지한 장료의 용맹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조조가 준 꾀주머니에 따라, 장료 악진 이전 세 장군이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명장면… 실로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사실 정사 원문에는 사람이 한 명 더 들어갑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손권이 오면 장료, 이전 장군은 출전하고 악진 장군은 수비하고 호군(護軍-호군 설제)은 싸움에 참여하지 마시오.”

그렇습니다. 설제는 조조가 죽을 뻔한 연주에서 살아돌아와서, 장료가 죽을 뻔한 합비에 재배치된 것입니다.
당시 설제가 담당하던 호군이라는 직위는 여러 장수를 감독하고 인사권을 행사하는 일종의 고급 군무원입니다. 보기보다 매우 중요한 직책입니다. 합비 같은 최중요 전선에서 호군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전장 상황과 장수들의 사정에 빠삭한 문관이라는 소리입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통산 방어전 전적 4전 4승.
‘코에이 게임에서 통솔력 높은 문관’ 하면 생각나는 정욱이나 순유 같은 조조군 인재들조차, 여포 반란 시절의 연주와 손권 침공 당시 합비에 둘 다 있진 않았습니다.
아아… 해냈구나 설제.
‘싸움에 참여하지 말라’는 조조의 서신 내용을 토대로 설제의 공로가 없다고도 주장할 수야 있지만, 당연히 주임원사가 공성전에 군대 이끌고 직접 나가는 게 이상한 행동인데다가, 조조의 명령을 관리로서 대리하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설제가 성 안에 있지 않으면 지휘계통이 무너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직접 싸움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오나라 대군이 쳐들어와서 다들 사기 최저치 찍는 시국에 자기 자리 지키며 문관 노릇 하는 것 역시 당연히 공로입니다. 이걸로 2관왕 수비왕 문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후 설제는…
문제(조비)가 조서를 내리며 명했다.
"설제는 여러 학문에 박학한 관리이고, 왕사와 극가는 순리에 맞춰 일처리를 잘하는 관리이다. 이 세 사람에게 각각 관내후의 지위를 하사하니, 그 근면함을 발휘해 보답하도록 하여라.
- 왕사전
그동안 일을 열심히 한 보상으로, 조비에게 찬사를 받으며 제후에 오르기도 합니다. 조비 대에 상서령으로 특급 승진해 대신으로서의 존재감이 커진 진교가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으니, 설제의 입지도 따라서 커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거기서 더 하나, 만년에 그에게 주어진 업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면…
이 무렵 군사(軍師) 두습(杜襲), 독군(督軍) 설제(薛悌)가 모두 말하길, 내년에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隴右-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기산(祁山)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攻城)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野戰)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隴東)에서일 것이고 농서(隴西)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제갈량은 노성(鹵城)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점거하고 물을 끊고 두텁게 포위했다.
- 진서 선제기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제갈량의 북벌까지 보다니.
제갈량이 쳐들어올 무렵(4차 북벌. 장합이 죽은 다음 해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가 독군이라는 직책에서 북벌 방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군이란 군을 감독한다는 의미인데 이 직임의 실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당시 대장군군사였던 두습도 촉 방면 참모진으로서는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던 것을 보면 설제 역시 아직도 군무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중역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이로써 설제는 여포, 손권, 제갈량과 모두 직간접적으로 맞서며 수비 측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삼국지 유일의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단 이때만큼은, 제갈량이 내년에도 쳐들어올 거라는 예측이 빗나가고 사마의라는 걸출한 사령관의 반대의견이 들어맞았으니 늘그막에 오판을 한 셈이지요. 세월이란… (진서 선제기의 저 기록, 나아가 4차 북벌의 전말에 대해서는 사료 간에 상충되는 지점이 있어 논란이 되는데, 적어도 ‘독군 설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배제할 만한 논란은 아니고 제가 잘 모르는 영역이기도 해 생략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때로부터 약 6년 뒤, 친구였던 상서령 진교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되기도 합니다(진교는 237년 사도가 되어 삼공에 오름). 한때 순욱이 역임하며 ‘순령군’으로 불린 바 있던 그 상서령 벼슬이죠. 후한 ~ 위나라 대 관제에서 행정을 관할하는 실권직입니다.
비록 설제가 어떤 관직을 최종적으로 역임했는지까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만해도 충분히 노고가 짐작이 되고, 고생 끝에 생의 말엽에는 관운을 누렸다고도 할 수 있겠죠?
약 50년에 가깝게(혹은 그 이상) 조조 세력에서 일하며 결국 사실상 행정부의 수장이 된 말년.
어쩐지 순수한 문관이라기보다는 군사 실무에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된 모습을 보였는데, 위나라에 명장도 많고 명관리도 많으나 설제만큼 양 분야를 오가며 활약한 인물은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드라마틱하게 살다 간 재밌는 사람이며, 활약 연대도 긴데다 주요 활약 순간들이 인상적이어서 창작의 주인공으로도 손색이 없을 법합니다.
전란의 시대에 이렇게 험한 곳을 오간 불운한 문관,
그마저도 기록의 부재로 조명을 거의 받지 못하는 신세지만,
이 사람은 삼국지라는 우물의 틈새 속에서 빛을 건져 올리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그리고 그렇게 발견해내는 모습이 여느 유명인사들 못지 않게 건실하고 찬란했음을 보여 주는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저 너머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 숨쉬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