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 저격하고 성공한 독립운동가
죄송합니다 어제 자료가 한가지가 남아서 안쓰려고하다가 그래도 한가지 남은 인물있어서요
그래도 범죄사건이나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정말 마지막 일 것 같습니다
글 안쓴다고 큰소리 뻥뻥치고 글쓰는 것을 보면 참 저도 한심하네요 자료를 못봐서요
다시한번 심기를불편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꼭! 알아야할 독립운동가 이야기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영웅이라는 뮤지컬을 본적이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안중근의사의 이야기를 하려고합니다 안중근의사하면 떠오르는게 무엇이라고생각하십니까?
대부분 안중근 의사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안중근의사 의 총이 생각이납니다
본관은 순흥 이며 아명은 안응칠 인데 아명인 동시에 자 이기도 합니다. 자서전에 따르면 가슴과 배에 걸쳐 점 7개가 있었던 까닭에 자를 응칠로 하였다고 합니다.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습니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도 성 토마스를 종도 성 도마로 음차했기 때문에 현재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도마라고 호칭합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 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 박영효의 장학생 이 좌절되자 7살의 안중근, 일가 친척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로 이주하여 은둔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종 2품- 정현석과 해주 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유명합니다. 다만 안중근의사 본인은 체포 직후부터, 이 일을 의거가 아니라 김두성의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안중근의사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습니다.
안중근의사 거사를 함께한 항일운동 동지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의사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합니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라면 어차피 티가 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 정치에서 절대적 존재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중에 그만큼 그곳에서 주변의 수행인물이 많을 수 있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자거우 역에,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에 매복했습니다. 하지만 차이자거우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역에 정차했습니다.
안중근의사는 새벽 일찍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승강장에 있는 하얼빈역사 입구 옆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가 도착하기 직전에 다방의 밖으로 나와 다방 출구 바로 앞에 있던 일본인 환영단에 접근하여 본인도 환영단인 척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차가 도착한 후, 9시 30분에 이토 히로부미가 수행단과 열차 밖으로 나오고 환영단이 환호하자, 가만히 응시하며 목표를 포착한 뒤, 바로 튀어나가서 주저없이 품속의 권총을 꺼내 수차례 쏴버렸습니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에 성공한 후, 유동하 의사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만세를 외쳤다는데, 이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조를 나눌 때 차이자거우에 우덕순, 조도선, 하얼빈에 안중근의사 와 유동하 선생로 나누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거사 당시 다른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기 쉽진 않은데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정황이 이렇습니다. 일단 우덕순선생 조는 역 구내 숙소에서 새벽부터 대기하다가 조도선이 역 매점 주인에게 일본의 대신(이토)이 온다는 것 때문에 러시아 군대의 경비가 철통같아 나갈 수가 없다는 소식을 전했고, 우덕순선생은 거사를 포기하고 대기 중이었습니다. 또는 이를 수상히 여긴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감금 상태였습니다.
유동하선생은 통역과 두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이때 뒤늦게 안중근의사와 합류했거나 처음부터 안중근의사을 보조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였습니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습니다.
열차 도착이 9시 30분쯤의 아침 시간이고, 혹한으로 유명한 하얼빈은 10월 말만 되어도 가을은 커녕 한겨울 날씨에 가까워서 한국의 12월만큼 엄청나게 춥기 때문에, 일본도 아닌 만주에서 여러 상황상 시간이나 날씨 모두 일본인이 자발적으로 많이 모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람이 모이지 않을까봐 이토의 명예를 위해 영사관 측에서 일부러 많은 환영단용 하얼빈 일본인들을 미리 모으려고 이전부터 추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때는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 히로부미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 히로부미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의사 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확인한 후 권총으로 3발을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 저격했습니다.
첫발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두발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마지막 세발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합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승강장에서 우측 대각선으로 직진하고 있었는데, 그 오른쪽 뒷쪽의 환영단 자리에 서 있던 안중근이 대각선 방향에서 달려가 총으로 직격한 것입니다.
사건 현장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 X자 형태로 이동하고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위치상 이토 히로부미가 환영단 쪽으로 몸을 틀고 있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저격이었는데, 실제로 그쪽으로 몸을 틀었기에 오른쪽 신체부위를 정확히 저격하여 사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중국 하얼빈역 승강장에 가면,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가 서 있던 자리가 표지석으로 표시되어 있어 어떤 각도에서 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에 각각 1발씩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됩니다. 여기서 이 한 발을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안 의사는 당시 자결할 생각이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다. 총알 한 발을 남긴 것은 이미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중근의사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즉시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당한 지 30분 만에 사망했고, 일본 정부는 이토의 장례를 국장으로 후하게 치러줬으며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죽인 죄로 법정에서 일본판사가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가 한말중 유명한 말이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 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을 따른 러시아측 행정명령에 따라 러시아 검찰 조사 도중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거쳐 뤼순 에 있는 일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됩니다
뤼순감옥에 있으면서 안중근의사는 우리나라가 어떻게야 좋아질까? 생각하면서
감옥에서 많은걱정과 대한민국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안중근의사에게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조마리아여사의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 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하여 안중근의사도 어머니께 편지 전상서를 보냅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 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법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마지막 안중근 의사의 유언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PR
오랜만에 글을 써보니 약간 당황스럽기도하고 조금 불편한 맘도 없지않아있습니다 사실 여러분들도 제글에대해 불편한점도있겠지만 오늘만큼은 뒤에서 욕해주시고 그냥 부질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어떠한 나쁜말도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다시 안중근 의사로 넘어가서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독립운동가들은
많이있습니다 제가 중요한자료만 가져와서 이해안되는분이 많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 반성하고 또반성해야합니다 그당시에 우리는 곁에없었지만 같이 아파하고 같이 나라의 힘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의사의 유언을 우리가 지키지못하는것은 잘 압니다 남들은 살기바쁘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역사에대해서는
모르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어린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모른다는말이 나올정도로 역사에대한 지식을 그냥넘어가는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그저 저의 느낌은 글을 쓸때 고뇌하고 생각하면서 느낀데로 쓰는것같습니다 하지만 밑에글에 말했다싶이
마지막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은 이렇게했지만 저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잘압니다 제가 말한건데 그 말을 못지켜서 죄송합니다
이제 정말 제가 있는자료가 마지막입니다 정말 글을 보면서 댓글도 달고 같이 웃으면서 지낼께요
제글이 아쉽다면 제가 예전 사건 사고 범죄 납치 미제사건등 글 보면서 추리도하고 친구들과 의견도 내보고
그리고 제가 이런 프로파일러의 종사자는아니지만 제 글이 저렴한것은 잘압니다 그냥 취미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제가 한가지있습니다 현제도 안중근의사의 유해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유력한 후보지는 뤼순감옥 근처있는데로 추정되고있습니다 혹시 거기에 땅을 파보면되지않나라고 물어본다면 유해가있는땅을 파면 불법이라고 중국당국이 말했습니다
방법은 한가지있습니다 중국과 대한민국의 합이입니다
오늘도 제 마지막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건 사고 범죄보단 우리가 꼭알아야할
독립운동가 이야기해봤습니다 더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알고싶다면
인터넷검색이나 나무위키에 제 내용보다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