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피케이션을 알아보자
0. 도입
몇 년 전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경리단길, 이태원, 서촌 등 다양한 지역의 삶과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요.
옾카페가 위치한 상수동 역시 젠트리피케이션된 지역입니다(사진-해럴드 경제).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 둥지 내몰림, 도시 재개발, 도심 재활성화 같은 다양한 단어가 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혼용됩니다.
이 글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하려 합니다. 사실, 이 글은 모 유튜버가 젠트리피케이션이 둥지 내몰림과 동의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둘은 분명 연관되어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1. 젠트리피케이션의 정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주, 상류층’을 뜻하는 gentry에 ‘-화하다’라는 뜻의 –fication이 합쳐진 단어로, 도시 낙후 지역 거주자와 시설의 상향 이동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 구역에서는 저소득층 원주민이 중상류층 거주자로 대체됩니다. 장기적으로 저소득층 원주민이 중상류층으로 변화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축출 또는 대체 양상을 띠고 이루어집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영국의 도심 재활성화와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저소득층 축출을 설명하기 위해 루스 글래스가 도입했습니다. 이후 크리스 햄넷, 닐 스미스 등의 학자에 의해 개념이 발전했습니다.
2.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
젠트리피케이션은 주로 도심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도시 발달 과정과 연관 있습니다.
도시화가 시작될 땐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고, 도시 공간이 확장되며 시가지가 발달합니다. 이후 교외화와 탈도시화 현상으로 도심 인구가 빠져나가고, 도시는 다핵화되며 구시가지 일부는 쇠퇴합니다. 이 쇠퇴한 구역에 저소득층이 거주하며 젠트리피케이션의 순환이 시작됩니다.
저소득층은 주로 저차서비스업 같은 도심부의 저소득 직종에 종사합니다. 이들은 교통비 지불 능력이 낮기에, 도심 근처 낙후되고 저렴한 주거지에 거주합니다.
이후 재도시화로 도심부에 인구가 재유입되면 도시 재생 또는 도시 재개발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은 ‘젠트리파이어’가 주도합니다. 젠트리파이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주도하는 사람 또는 조직으로, 중-고소득층, 예술가, 부동산업자, 도시 관료, 사업가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초기에는 재원 확보가 어려우나, 젠트리파이어에 의한 주택 리모델링, 편의시설 공급, 도시 공간의 물리적 개선이 이루어지면, 원주민은 퇴출되고 새로운 주거 및 상업 지역으로 재활성화됩니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지역의 재활성화와 이를 돕는 도시 정부의 역할, 시장에 의한 균형을 강조하는 반면, 구조주의 이론가는 원주민의 축출과 경제적 착취, 양극화 심화에 집중하며, 인간주의 이론가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장소의 고유성 상실과 장소감의 변화를 연구하고, 포스트모던 도시 이론가는 파편화-분절화된 도시(키노 자본주의)와 도시 내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차이’ 등에 관심 가지며 다양한 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P. Clay는 젠트리피케이션의 4단계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클레이의 모형은 낙후 지역의 자본 유입에 따른 변화 과정을 단계적으로 설명합니다. 1단계에는 낙후 지역에 소규모 상류층이 유입되며 변화가 시작됩니다. 2단계에서는 상류층의 이주가 늘어나고 자본 투자를 시작합니다. 3단계에서는 상류층의 이주가 본격화하고, 4단계에서는 유입된 중산층 간의 점유 경쟁이 발생하고 근린 지역 부동산 가치가 상승합니다.
3. 젠트리피케이션 이론
젠트리피케이션을 설명하는 이론에는 닐 스미스의 지대격차이론,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순환론, D. 레이의 문화적 요인이 있습니다.
닐 스미스의 ‘지대격차이론’은 정치경제적 원인에 주목했습니다. 지대격차란 한 지역의 현재 지대와 개발되었을 때 잠재 지대 사이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지대격차는 접근성과 성장 가능성이 크나 저개발된 지역에서 가장 크기에, 도심에 인접한 낙후 지역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지대격차이론은 지대격차에 의한 자본의 이동 같은 경제적 요인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대격차의 도식
한 지역에서 자본이 유출되어 다른 지역에 투입된다면, 자본이 유출된 지역은 쇠퇴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 된 지역의 지대격차는 낮아지고, 자본이 유출된 지역의 지대격차가 커지게 되겠죠. 그럼 유출된 자본이 다시 유입되어 쇠퇴한 지역이 재활성화됩니다. 이렇게 자본 유입과 유출에 따라 지대가 변화하고, 변화한 지대가 자본 유출입을 이끌며 자본이 오가는 것을 시소효과라 합니다.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순환론은 마르크스의 자본의 1차 순환을 확장한 것으로, 1차 순환에서 발생하는 자본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제시했습니다.
잉여 자본이 자본 시장을 통해 건조환경(built environment, 도시 건축물의 총체적 환경)에 투자되는 2차 순환, 국가기능, 사회보장제도, 기술 혁신 등에 의한 3차 순환이 일시적으로 자본의 위기를 막아준단 것을 골자로 합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미국 도시 교외화를 설명하며 2차 순환을 도입했습니다. 지금은 차별적인 도시 경관을 제공해 교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적 물질주의 소비문화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됩니다.
앞선 두 사람이 맑스주의/구조주의 관점이었다면, D. 레이의 문화적 요인은 수요와 행위자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주택 수요의 다양성, 중산층의 소비지향성, 젊은 전문가 계층의 도심 거주 선호 등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납니다. 특히 여피족, 딩크족 등 젊고 다변화되어 있으며 소비 중심 생활 패턴을 가진 고소득층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지구는 젊고 자녀가 없으며 고소득 직종에 종사하는 동성애자들에 의해 젠트리피케이션되었는데, 이는 사회적-물리적 거리를 가깝게 유지하며 일종의 엔클레이브(사회적 관계와 친밀감에 기반한 공간적 집적지)를 형성하려는 동성애 집단에 의한 문화적 요인의 젠트리피케이션입니다.
예술가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원인이 됩니다. 이들의 낮은 지대 지불 능력과 인적 자본의 외부효과로 인한 집적은 도시 낙후지역으로 집중을 유발하고, 이들로부터 창출되는 수요와 포스트모던 도시 관광객의 유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추동합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재활성화는 젠트리파이어의 약한 경제적 기반으로 인해 쉽게 변성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주도한 예술가들은 경제적 기반이 약한데, 이들이 젠트리피케이션 된 지역의 경제적 잠재력을 활용하려는 고급 소비 시설에 밀려 축출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지역은 처음 재활성화될 때의 힙한 감성을 잃고, 고급 소비 문화와 고차 서비스 및 고급 주거지로 변화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뉴욕의 소호 지구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도시 정부, 특히 기업가주의적 도시 정부는 리모델링 인센티브 제공, 규제 완화, 법률 도입, 개발업자에 유리하도록 용도구역제 개편, 토지수용권 위임 등 방법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도합니다.
이는 중-고 소득층을 유인하고 고급 상업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조세 재원을 확보하고, 낙후 지역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도시 정부의 전략입니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항상 성공하진 않고, 원주민의 거주지 문제가 발생하며, 지나치게 많은 도시 재원이 투입된다는 비판 역시 존재합니다.
4. 포스트모던 도시와 젠트리피케이션
포스트모던 도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포스트모던의 정의만큼이나 모호합니다. 에드워드 소자는 포스트모던 도시화를 20세기의 마지막 쿼터 동안 도시에서 일어난 주된 변화의 종합적인 기술이라 말합니다.
포스트포드주의(제품 다양성을 높이고 적응 속도를 빠르게 한, 재고 최소화와 생산 라인 유연화로 대표되는 생산 양식)의 발달로 인한 생산 체제의 변화, 자본과 도시의 세계화, 탈중심화와 재중심화 같은 도시 구조의 변화, 도시 계층 구성의 파편화 및 양극화, 도시의 통제 불가능성 확대와 감시 강화, 사이버 공간까지 확대되는 도시 등이 그것입니다.
포스트모던 도시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박물관화, 디즈니화, 도시마케팅 전략 등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런 전략이 모두 젠트리피케이션을 발생시키는 건 아닙니다. 디즈니화는 도시 계획 단계에 도입되기도 하고, 도시마케팅은 원주민의 고유한 자원을 활용해 축출과 배제 없는 발전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 도시에서, 위와 같은 전략은 젠트리피케이션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박물관화란 역사적 맥락을 가진 역사 건축물(로프트)이 자원으로 활용되는 젠트리피케이션 또는 관광지 개발을 의미합니다. 오래된 공장, 빈티지한 주택, 세월의 흐름이 담긴 건축물 따위가 로프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간은 여피족 같은 새로운 중간계급의 고급 소비 공간으로 변화할 잠재력을 가진 공간으로 인식되고, 문화와 자본의 결합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킵니다.
에드워드 랠프는 박물관화가 무장소화를 조장하는 타자지향적 장소 양산이라 비판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은데,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디즈니화란 디즈니랜드적인 사회의 변화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소비에서의 획일화, 현실 문제에서의 도피, 미국 중산층 문화의 제공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대규모 자본 유입에 의한 전위적이고 환상적인 경관 제공이 디즈니화의 공간적 특징입니다. 디즈니화는 박물관화와 반대로 역사-문화 자산이 부족하나 넓은 토지를 이용할 수 있고 자본 유입이 용이한 곳에서 잘 이루어집니다.
디즈니화의 전형으로 대형 소핑몰(사진-연합뉴스)
디즈니월드에서 시작된 디즈니화는 대형 고급 쇼핑센터나 방어적인 벙커 건축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도시마케팅은 말 그대로 도시의 이미지 제작과 그것의 홍보에 관한 전략입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나, 메가 이벤트를 통한 것과 빌바오 효과에 의한 것이 대표적이며, 때로 둘은 함께 이루어집니다.
메가 이벤트란 도시에서 일어나는 크고 기념비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한국에서는 88올림픽이 대표적입니다. 도시의 메가 이벤트는 도시의 이미지를 바꾸거나 홍보할 수 있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거나 문제시되는 도시 공간을 변화할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
바르셀로나의 도시 재생이 메가 이벤트의 덕을 본 사례입니다. 침체한 도시 경제를 부흥하고자 소수의 도시 엘리트 주도로 관광 개발을 시작했고,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 완벽히 성공한 것이죠. 이는 기존 자원의 개발, 가우디로 대표되는 역사적 건축물의 박물관화, 메가 이벤트 개최 등 다양한 전략이 성공적으로 수행된 사례로도 꼽힙니다.
빌바오 효과란 건축물이 도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나 효과로, 스페인의 쇠퇴한 철강 도시 빌바오가 프랑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통해 예술 도시로 변화하며 재활성화된 데서 시작합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사진-ARTMAJEUR)
주로 스타 건축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 건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때 건축물은 하나의 작품으로 랜드마크가 됩니다. 이를 통해 도시는 기존의 성격을 버리고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탈바꿈합니다.
5.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
젠트리피케이션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합니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낙후 지역에 자본이 유입되어 재활성화되고, 원주민과 이주민이 모두 이익을 보는, 자본 흐름에 따른 자연스럽고 ‘더 나아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도시 정부 역시 서비스 비용을 줄이고 세수를 확보하며 도시를 물리적-사회적으로 ‘개선’한다고 여겨지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리처드 플로리다에 따르면, 낙후 지역의 건축물과 경관 개선은 도시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쟁력 창출의 원천으로서 도시의 자생성을 확보하는 전략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 된 지역에 유입되는 인적 자본은 지역의 혁신과 창조성에 직접적으로 영향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저소득 원주민을 배제하고 궁극적으로 지역에서 퇴출하는, 자본에 의한 부정의한 도시 개발로 받아들여집니다. 자본은 단기적 이익에 이끌려 지역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파괴해 획일화된 상업 공간으로 바꾸어놓고, 지역 주민은 축출되어 더 나쁜 환경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리적 축출이 없더라도, 사회적 네트워크와 신뢰의 파괴로 인한 사회적 자본 축소, 적정 가격 주택의 부재, 적절한 수준의 활용 가능 자원의 상실 등 젠트리피케이션에 따른 이차적 요인으로 생활 기반을 잃고 거주지에서 쫓겨나는 ‘둥지 내몰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 지리학은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 인간의 내재적-주관적 장소를 탐구합니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삶의 공간이자 실재적 의미를 가진 활동이 일어나는 유의미한 장소를 파괴해 무의미한 공간으로 재편하는 과정입니다.
위에서 말했듯, 에드워드 랠프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무장소화를 조장하는 타자지향적 장소 양산이라 비판했습니다. 무장소화란 장소의 본래 의미가 사라지거나 퇴색하는 것을, 타자지향적 장소란 장소의 진정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장소를 바라보는 타자가 중심이 된 장소를 의미합니다. 랠프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해 원주민이 대체되고 유의미한 장소가 재건축 또는 리모델링으로 사라지며 배태성 없는 타자가 장소를 점유하는 걸 비판했습니다. 그렇게 진정성이 사라진 장소를 가짜 장소라 하고, 대표적인 가짜 장소가 디즈니랜드입니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장소감의 상실이 아니라 장소성의 변화라 주장합니다. 장소가 가진 의미가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혼종적이고 향락적인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봅니다. 한 장소에도 다양한 장소 경험이 있을 수 있고, 개인은 경험적 렌즈를 통해 장소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