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이 사람을 다루었던 방법
칭기즈 칸의 인재 중용은 매우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이상하게도 사준사구처럼, 가족보다 자기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구들을 더 중시하거나, 적이었다 아군이 된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편이었다. 물론 칭기즈 칸의 혈통이나 아군이 낮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통일전쟁 과정에서 자무카와 다른 적들이 칭기즈 칸 가문을 얼마나 조롱했던지 적인 귀족들에게는 혹독한 편이었다.
칭기즈 칸은 일생에 걸쳐 가문이나 부족보다는 스스로 얻은 ‘인재’를 믿는 편이었다.
실제로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그를 자주 배신하였고, 자무카와 벌인 13익의 전투 당시 본인 직계가 아닌 친족으로 이루어진 익들은 대다수가 항복하였다. 또한 함께 고생했던 친동생 카사르조차 반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서 견제했던 적이 있을 정도이다.
반면 태무진에게 친형 벡테르가 살해되었던 이복동생 벨구테이는 어찌보면 친형의 원수인데도 단 한 번도 불온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기에 태무진에게 신뢰받았다. 혈연 없이 맺어진 관계는 끈끈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고생했던 경험에서 나온 건진 몰라도 칭기즈 칸은 Give&Take 이상의 충성을 부하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전황이 불리하면 도망쳐라”가 몽골 제국의 정식 군율 중 하나였을 정도.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았다.
그 당시까지 초원은 우두머리가 모든 걸 가지는 독식체제로, 그런 와중에 군주들 중 칭기즈칸 처럼 Give&Take 원칙을 따른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부하들 가운데 배신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칭기즈 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가 물을 가리키면 물에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불에 뛰어들었다” 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배신에 대한 뼈아픈 경험(칭기즈칸은 어린시절 자신의 일족들에게 배신을 당했었다.) 때문에 나온 Give&Take 정신은 칭기즈 칸 자신도 철저히 지켜서, 먼저 요구하지 않은 신하의 단독행동이더라도 자신에게 충성을 보였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는 보상을 수여했다.
신하들의 의욕이 높았던 것은 당연지사. 이 때문에 가족보다 다른 사람을 더 믿는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