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주의) 사도 왕랑의 아들 왕숙 : 경전 위조자?
왕랑 잔혹사
나관중이 재기발랄한 스토리텔러라는 것을 입증하는 인물은 참 많습니다. 왕랑은 그 대열의 앞자리에 설 자격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위나라의 고관을 지낸 원로대신 왕랑. 동료 재상들이던 종요, 화흠과 더불어 조비에게도 극찬을 받은 명관 중의 명관입니다. 그런데 왕랑은 오늘날 나관중의 손에서 놀아나며 끝없는 굴욕을 당하고 맙니다. 왕랑이 삼국지연의 속 비중이 거의 없는 문관들 중 손꼽힐 만큼 기괴하게 재해석된 사례라는 것을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유학 경전으로 대화하는 대신 태사자와 칼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일품이지만, 왕랑의 하이라이트는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있습니다. 북벌에 나선 제갈량과의 말싸움에서 패배해 실핏줄이 터진 나머지 고꾸라져 죽는다니. 실로 볼품없는 퇴장입니다. 이렇게 나관중은 왕랑이 포커스를 받을 겨를조차 차단하고, 제갈량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산제물로 전락시킵니다. 클템님 초대석에서 방장의 “그니까 사람을 아주 한심스럽게 만들어놨잖아”는 왕랑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연의에서 희생되는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곧 나관중이 삼국지를 피와 철의 군담소설로 재창조할 무렵, 무엇을 넣고 무엇을 빼며 어떻게 각색할지에 상당히 밝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공적인 각색 덕분에, 제갈량은 세 치 혀 변설로 역적 무리의 정통성을 논파해 심장마비에 이르게 하는 기막힌 모사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왕랑은 말싸움 졌다고 죽은 한심한 할아버지요, 제갈량의 지략과 언변을 강조하고자 투입된 일회용 경험치아이템 정도로 후세에 기억되고 맙니다. 하필 저 월드컵에서도 역할이 비슷한 하후은이랑 붙었으니 끼리끼리 논다는 게 바로 이런 거죠. 코에이는 삼국지 14용 북벌 이벤트 세트라는 기괴한 상품을 팔아먹으며 죽기 직전의 왕랑을 스틸컷으로 올려놓기까지 했으니, 왕랑은 오늘날 여러 번 죽고 있습니다.

공자가어의 수수께끼
비록 사후에 나관중이란 못된 작가의 붓놀림 탓에 흉한 꼴을 보고 만 왕랑이지만, 그는 위나라에서 손꼽히는 정계 거물이었습니다. 비참한 죽음을 맞기는커녕 천수를 누렸고, 일족인 동해 왕씨는 번성했습니다. 왕랑의 손녀인 왕원희가 사마소와 결혼해 혼맥을 이룬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지만, 오히려 그 아들인 왕숙의 전형적인 출세길도 만만찮았습니다.
왕숙은 산기황문시랑이라는 관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산기상시를 거치는데, 이런 직책들은 황제를 가까이에서 시중들며 보좌하는 자문관으로서 명문가의 자제들로 도배되는 출세 루트였습니다. 산기직이나 황문시랑을 거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두각을 드러낸 젊은이들 몇몇을 제외하곤 십중팔구 아버지가 업적을 세웠거나 아예 별도의 열전이 있는 특급 금수저들입니다. 부모 빽이 중요한 호족사회의 특성상 집안 덕을 본 귀족 관료들이 주류가 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왕숙이 맡은 자리는 가문의 영광을 과시할 만한 이들로 채워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아버지인 왕랑도 유학의 대가였던만큼, 귀족 도련님 왕숙은 유학적 교양이 필요한 자리에서 이것저것 논평하는 일을 자주 하게 됩니다.
부친이 연의 속에서 제갈량의 호통소리에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싸늘한 시체가 된 것과 달리, 왕숙은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센 먹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사 왕랑의 예리함을 잘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왕숙은 오늘날 드라마에서도 심장마비 할아버지로 나와서 고통받는 연의 왕랑과 달리 제대로 된 논쟁을 보여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왕숙의 논쟁은 연의 왕랑의 논쟁 못지 않게 처참한 실패사례로 오랫동안 남게 됩니다. 아니, 더 심합니다. 최소한 왕랑은 삼국지 애독자들에게는 강한 임팩트를 던졌을지언정 어차피 소설 속 일일 뿐이고, 사대부들에게 뭐 이렇게 죽냐며 대대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왕숙은 ‘무슨 이유’로 인해 송나라 시대부터 적지 않은 유학자들에게 온갖 욕을 먹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유학자들은 왕숙이 키배 도중 경전을 지 멋대로 위조해서 만들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상한 논문을 제목만 딱 창조해서 참고문헌으로 넣는 등 없는 걸 있다고 속이면 당연히 연구윤리 위반입니다. 그런데 만일 유학자가 자기밖에 모르는 가상의 경전을 만들어내서 논쟁에 절찬리에 써먹다가 들킨다면? 경전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져 모두의 괘씸함을 자극할 수도 있겠죠.

그러한 오명으로 뒤덮인 것이 바로 ‘공자가어’라는 책이었습니다.
공자가어는 논어와 비슷하게 공자가 한 말과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논어에 담지 못한 기록들을 위주로 했는데, 논어가 핵심 편집이 다 된 최종 상영본이라면 공자가어는 확장개봉 감독판이라고 비유하면 아마 이해하시기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사료이자 유교의 핵심처럼 느껴지시나요? 그런데 그런 중요한 책치고 사서오경처럼 유명하지는 않다는 데서 뭔가 쎄함을 느끼시는 횐님들도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유명하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이 공자가어라는 책은 반고의 《한서》에 언급된 바 있습니다. 한서에는 예문지라는 파트가 있는데, 음악이나 서적 등 예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것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에선 27권으로 이루어진 공자가어가 유교 경전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한서는 기원후 1세기경에 쓰여졌으므로 이 시기까지 공자가어라는 이름의 책이 실존하긴 했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자가어의 정확한 내용을 아는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아서는 어떻게 책의 존재는 아는데 내용은 모르냐고 고개를 갸웃할 일이지만, 지식의 전파 속도나 인쇄 환경 등을 생각할 때 이렇게 ‘빛을 못 봐서 뒤늦게 세상에 나온 탓에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전이 등장하는 것이 결코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규모가 크고 유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도 한나라 때에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를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지요.
아무튼 공자가어라는 책의 존재는 알려졌었지만 그 내용이 널리 퍼지거나, 유명세를 타 선비들이 두루 읽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그런데 하필 이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던 경전을 ‘재발견’해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 다름아닌 왕숙이었습니다. 다른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왕숙이 갑자기 “야. 공자가어라고 들어봤지? 이게 그거야.” 하고 웬 죽간을 내미는데, 오리지널을 꿰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이게 사실인지 가짜인지 확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도 없잖아요. 메이플 하다가 “저는 님을 도우러 온 사람입니다.” 같은 꼬임을 믿었던 방장 같은 경우도 있으나, 장성한 유생이라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왕숙의 주장을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순도 100% 경전이 맞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싹 다 지어낸 말일 수도 있고, 다른 유가 경전에서 대충 끼워맞춘 디스크 조각모음 결과물일 수도 있는 거죠.
게다가 한서 예문지에는 27권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왕숙의 것은 정작 10권 44편이었기에 진실은 더욱 깊은 미궁 속으로 빠졌습니다. 27권이 10권이 된다니 진짜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가짜란 법은 없다는 게 환장할 노릇입니다. 마치 오늘날 같은 시리즈 소설을 출판하더라도, 출판사에 따라 1권짜리를 상하권 나눠서 발매하거나 10권짜리를 5권짜리로 줄인다던가, 혹은 잘게 나눠서 권수를 늘릴 수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렇게 되면 판본은 바뀌어도 내용 자체에는 차이가 없죠. 왕숙의 것도 이런 케이스일 수 있습니다. 결국 ‘10권이니까 사기임’ 하고 명백히 진위를 가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왕숙의 공자가어는 명목상 전한 때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공자의 후손이었던 공안국(孔安國)의 작품인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공안국이 남긴 서문’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들이 남긴 자료가 우여곡절 끝에 전해져 왔고 그걸 공안국 자신이 편집한 버전이 공자가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형편좋게 맞다고 치고 넘어갈 유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공안국이 남긴 서문인 척하는 왕숙이 남긴 서문’일 수도 있잖슴~

왕숙의 생전에 이미 공자가어는 뜨거운 감자였던 것 같습니다. 삼국지 시대를 다룬 창작물에서 유학자들은 자주 통편집되지만 이들이 저마다 학풍을 세우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과정은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스승의 학맥을 이은 제자가 충실한 변호인이 되어 논쟁을 벌이는 것도 자주 있는 일입니다. 왕숙도 이런 논담에 낍니다. 하필 그 상대는 후한의 슈퍼스타 훈고학자 정현(鄭玄)의 후학이었던 마소(馬昭)라는 학자였습니다.
선빵은 왕숙이 날렸습니다. 왕숙은 고전을 근거로 들며, 정현은 이러이러한 고전의 내용을 보지 못했기에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재수없는 공격이죠. 스승이 틀렸다는 비난을 받았으니 마소도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 왕숙이 든 고전에 공자가어도 끼어 있었습니다. 마소는 받아쳤습니다.
“흥. 공자가어는 왕숙이 보태서 만든 위작인데 정현 어르신께서 못 본 게 당연하지!”
위진남북조 이후로도 공자가어는 왕숙이 내놓은 버전으로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후대의 학자들도 갑자기 이런 중요한 책이 왕숙 개인의 손에서 툭 튀어나왔다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이미 송나라 때부터 의혹은 꽤 체계화된 상태였습니다. 고증학 열풍이 분 청나라 때는 공자가어가 진퉁이라고 보는 순진한 유학자가 더 드물었습니다. 청 말기에 태어나 중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고힐강(1893~1980)이라는 학자는 공자가어에 일말의 가치도 없다고 평가절하했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된 논쟁
거의 천 년 넘게 왕숙의 위작임이 확실시되던 공자가어의 위상이 급변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의 열기가 사그라듦에 따라 한때 사실상 올스톱되었던 발굴 작업도 점차 활기를 되찾아가던 때였습니다. 세기의 대발견인 진시황릉의 발굴도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1973년 허베이성에서 출토된 하북산 죽간 가운데 공자가어와 상당히 비슷한 것이 끼어 있었고, 1977년 합비의 고장 안후이성에서도 공자가어와 밀접한 내용이 담긴 죽간이 흙 위로 나옴에 따라 새로운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왕숙이 이런 실제 공자가어를 참고해서 자기 판본을 내놓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영역이라 왕숙이 과연 어디까지 카피 앤 페이스트를 감행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역사학자들과 유교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해서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빼박 위작이라는 소리를 천 년 넘게 들어온 왕숙 입장에선 그나마 반등의 기회가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왕숙은 아무런 위조 없이 자기 발견을 학계에 보고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오히려 카피 앤 페이스트의 증좌가 더 뚜렷해져서 욕을 더 먹을지도 모릅니다. 왕숙이 핍박받은 대학자였는지 옹졸한 위조범이었는지 아직은 아무도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애굽민수님 출연 방송에서도 알 수 있듯, 역사는 매번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 어떻게 새로운 것이 발굴되어 학설이 바뀔지 알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릉의 불길도 잦아든 지 오래이고 오장원에는 이미 별이 졌지만, 삼국지 속 전쟁과 달리 학자들의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이름도 낯선 왕숙이라는 삼국지 등장인물이 경전을 위조했네 마네 하는 문제에서조차, 후세인들은 수천 가지의 끝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아버지인 왕랑도 마찬가지고요. 왕랑과 왕숙도 이런데 유관장이나 조조 같은 인물들은 오죽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침국지 같은 샘물이 무한히 솟아오르는 삼국지를 여전히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삼국지는 완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완결되지 않았으며, 결코 완결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