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님이 좋아하실 삼국지 인물이 있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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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님이 좋아하실 삼국지 인물이 있다!? (上) (한기편)

지난화 요약 :
오펜하이머와 동시대를 살아간,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저술한 과학자 조지프 니덤.
그의 책에는 놀랍게도 삼국지 등장인물 ‘한기’와 관련된 대목이 있다!
젊은 한기는 가족의 복수를 마치고 노양산에 은거해 피난민들의 수장 노릇을 하게 되는데…
3-1. 정든 남양군을 떠나
노양산의 산사람들이 산적으로 변모하기 직전
그들을 설득해 분노를 잠재우며 탁월한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준 한기.
이곳 백성들도 황건적, 저곳 백성들도 황건적으로 돌변하는 시기에
성공적으로 이빨을 까 오히려 우두머리가 되다니 실로 박수를 보낼 일입니다.
이대로 산 속에 머무르며 신선처럼 살아가는 것도 한기로서는 나쁘지도 않았겠지만,
머지않아 한기에게도 위기가 찾아오고 말지요.
우선 한기가 숨어든 노양산은 어디인지,
그리고 한기의 고향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봅시다.
한기의 고향은 남양군 도양현입니다.
노양산도 남양군 노양현에 있지요.
즉 고향을 멀리 떠나 타향살이를 한 것은 아니고, 근처에 있는 산에 들어간 것입니다. (도양현과 노양현 사이의 거리는 꽤 가깝습니다)
이 남양군이란 명칭은 방장의 침국지 시리즈에서도 전혀 나오지 않아서 좀 낯설 수 있는데요.
좀 다르게 말하면 어디쯤인지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장수와 가후가 조조에게 크게 한방 먹여준 ‘완’.


그리고 유비가 유표한테 세들어 살던 시절 제갈량을 만난 근거지이자
침국지 원소원술전에서 원소 및 후계자 봉기의 본거지(사실상 도적 소굴)이던 신야입니다.
이 두 지역은 삼고초려와 전위의 죽음 등 임팩트가 아주 강한 에피소드의 배경이기에
영공조징 조지셨다면 상당히 익숙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임상에서는 완과 신야가 인접하긴 해도, 별도의 지역처럼 다루어지는 것과 달리
이 둘 모두 남양군 소속의 현이지요.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드시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뭐야? 둘이 같은 행정구역 소속이라고? 엄청 크네? 얼마나 큰 거야?’
후한서(엄밀히 말하면 속한서)에는 후한의 인구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각 지역의 호구수를 기록해 두고 있는데요. 이것을 ‘군국지’라 합니다.
여기에 따르면 남양군의 인구는 52만 8551호,
인구는 무력 243만 9618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호적은 본격적으로 난세가 시작되기 이전의 조사에 기반했기에,
삼국지 시대에 들어서는 당연히 이것보다는 인구가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엄청난 숫자입니다.
고대 후한의 한 주도 아니고, 한 지역 인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대도시에 못지않다니 놀라운 일이죠.
남양군 인구는 2023년 7월 대구광역시(237만)보다 많고, 인천(298만)에는 못 미칩니다.
만일 시공간이 뒤틀려 후한 남양군 사람들이 통째로 현대 우리나라로 와 광역시를 이룬다면
부산과 인천의 뒤를 이어 광역시 인구 3위를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대 기준에서도 남양군의 물량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수많은 지방 군국 중에서도 인구가 제일 많은 곳이었는데,
심지어는 유주(204만)나 병주(69만), 서량(41만) 같은 어지간한 변방 주보다도 주민이 많습니다.
형주 인구가 총 626만 명이니 형주 사람의 ⅓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남양군은 행정구역상 형주로 분류되긴 하지만
형주의 북쪽 끝이기 때문에 수도권과 아주 가까웠습니다.
형주와 낙양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수도의 최신 유행을 받아들이기도 쉬운 환경이었지요.
이렇게 보면, 노양산에 피난을 온 사람들도 대단히 규모가 컸을 것이라고 짐작이 가능한데
역시 한기에게 인싸스러운 카리스마가 있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인구도 많고 지리적 요건도 훌륭하면
물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양군을 꿀꺽할 수 있는데 안 꿀꺽한다?
사실상 백성 머릿수로만 따지면 한 주를 통째로 손에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바보짓을 할 사람은 없죠.
야심가 군웅들은 냄새를 맡고 남양군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그 중 첫빠따에 해당하는 이가 바로

원술입니다.
원술의 휘하에 있던 손견이 남양태수 장자를 살해한 이후,
남양은 명실공히 원술의 나와바리가 되었는데요.
이때 원술과 손견이 노양에 직접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사 유표전에 따르면 유표는 전임 형주자사가 죽는 바람에 급히 형주자사로 임명되어
형주로 부임하러 내려가야 할 처지였는데,
또한 원술이 노양현에 병사를 주둔해 길을 막으므로, 유표는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를 수 없었다. 이에 단기필마로 의성에 들어가, 남군 사람 괴월과 양양 사람 채모와 더불어 모략을 짜내었다. (이 뒤로 대충 형주의 왕 같은 존재가 되는 내용)
이렇게 원술을 피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요.
또 손견전에 따르면,
원술이 표문을 올려 손견을 행파로장군으로 삼고 예주자사를 겸임하도록 하니, 드디어 노양성에서 병사를 훈련했다.
이런 구절이 있는가 하면,
노양성에서 출발한 손견이 측근 조무가 죽는 등 우여곡절 끝에 동탁군을 대파해 화웅의 목을 베는 등 엄청나게 선전하지만,
원술이 한솥도시락을 보내주지 않자 홀로 되돌아와 설득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천만 뷰를 넘긴 침착맨 삼국지에서도 도시락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장면이었지요.
그 공간적 배경이 다름아닌 한기가 숨어있던 노양인 것입니다.
이렇듯 원술이 손견을 앞세워, 반동탁연합에서 거의 유일하게 실적을 내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위세가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났을 것인데요.
노양산은 위치상 접근성도 나쁘지 않고, 촉의 산들처럼 지세가 험하지도 않았는지
누가 노양산 안으로 도망쳐도 그냥 잡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후한 말에 장현이라는 또 다른 은거한 선비가 있었는데요.
이 사람은 사공 장온의 초빙을 거절하려 독약을 먹고 죽을 결심을 할 만큼 곤조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결국 동탁이 무기를 들고 위협하니 노양산에서 나와 억지로 초청에 응했습니다.
즉, 원술도 동탁처럼 대놓고 한기를 위협했다면 휘하에 두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이 시기 원술은 행패를 부리긴 해도 아직 아예 칭제를 하는 등의 미친 짓을 하진 않았습니다.
솔직히 섬겨볼 만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한기는 원술이 또라이라는 것을 일찍 꿰뚫어보았는지 즉시 노양산을 떠나 더 남쪽으로 도망칩니다.

ㅅㅂ…
한기는 그리하여 형주 양양으로 가게 되는데, 양양도 형주의 번화한 지역으로 인지도 있는 곳이지요.
삼국지 게임에서 항상 유표가 장악하고 있는 곳입니다.
유표도 야망이 있는 군벌이니 형주로 도망친 인재들을 설복시키고 싶었을 겁니다.
한기는 원술에 이어 유표에게도 예를 갗주어 초빙을 받지만, 이번에도 도망쳐서 더 남쪽으로 가버립니다.
두번째 목적지는 잔릉.
행정구역상 어딘지 좀 복잡한데 삼국지 14로 치면 무릉 쪽에 있습니다.
가슴이 옹졸해지는 형남 4군 마이너리그, 배도라지 형남지의 배경이 되었지요.
(썸네일에 살짝 보이는 ‘잔릉항’이 게임에 구현된 잔릉입니다)
두 권력자 밑에 있기 싫어 피신하느라 꽤 많이 내려왔습니다.

(유표. 좀 심통난 사람처럼 묘사된 게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잔릉에서도 한기는 지역 주민들에게 경애를 받지만,
감히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한기에게 유표는 깊은 한을 품습니다.
형주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던 유표한테 찍히면 형주살이 참 고단해지겠지요?
한기는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유표의 명령을 받들어 의성현의 현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의성현은 마량과 마속 형제의 고향이기도 한데, 아마 한기가 둘을 만나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일 것 같은데도 짧게나마 연관이 있다니 인연이란 참 신비하군요.
3-2. 백 마리 말에서 물의 힘으로
한기는 유표 밑에서 반강제로 관직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잘 살다 끌려온 것인만큼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유표 사후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해버리자 조조가 형주의 이름 있는 선비들을 불러모으는데,
이때 승상부의 관리로 임명되면서 한기는 조조군에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뒤에 낙릉태수를 맡다가 감야알자(監冶謁者)라는 관직으로 옮겨 가는데,
이것이 바로 한기가 오늘날 과학기술사를 다루는 책에서도 이름을 드러내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 감야알자란 뭐하는 관직이냐.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 거의 알 방법이 없는 관직이지만 관직명을 통해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야’는 금속이나 대장간 일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금속을 만드는 학문을 야금학이라고 하지요? 그 야 자가 이겁니다.
즉 감야알자란 ‘대장간 일을 감독하는 보좌관’ 정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문과가 인문학을, 이과가 이공계 학문을 통틀어서 이르다 보니
보통 삼국지에서 ‘문관’이라고 하면 과학자보다는 행정 공무원이나 지방관 같은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이고,
실제로 과학이 오늘날처럼 세분화되어 발달한 시대가 아닌 만큼
많은 문관들이 행정업무에 종사했던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후한 말의 선비들이 관청에서 일하면서
비록 입자가속기를 만들거나 과학 이론을 구상하면서 녹봉을 받진 못했어도,
과학이나 공학, 특히 기술 분야는 행정과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관성이 큰 경우가 있는만큼
삼국지의 문관들 중에서도 과학과 관련된 일에 종사한 사람들이 간간이 보입니다.
난세에 전쟁을 하려면 길을 닦아야 하고 진지를 축성해야 하니 이 또한 과학이고,
무기와 갑옷을 정비하려면 화학적 지식이 없으면 안 되는 등, 난세에 할 일도 온통 과학 투성이입니다.
전쟁에 대비하면서 정작 과학에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요.
이런 진리는 오펜하이머 설명회에서 깔끔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즉 삼국시대에도 과학기술의 영향력은 오늘날 못지 않게 난세의 중요한 변수였고,
이 분야에서 우리한테 가장 유명한 사례가 정사에도 엄연히 기록된 제갈량의 목우유마겠지요.
그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토목, 건축, 수학 등 우리 실생활에서 중요한 연구를 거듭한 문관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기가 한 일은 실로 놀라운 공학적 쾌거라고 할 만합니다.
옛날에 대장간 일을 할 때는 말에게 풀무질을 시켰다.
매일 돌을 달구는 데에 말 백 필이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사람이 풀무질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너무 많은 노고가 들었다.
이에 한기는 길게 흐르는 물을 이용해 풀무를 돌리게 하니, 그 이익을 계산해 보니 이전의 세 배였다.
감야알자 직책을 맡은 지 칠 년이 지나자 쓸만한 물건이 충실해졌다.
(조조가) 글을 지어 그 공로에 감탄하였고, 사금도위의 관직을 더해주었는데, 대우가 구경(九卿)에 버금갔다.

괜히 일러스트에서 한기가 이것들을 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정부에서 새 연구책임자를 임명했더니, 신기술을 개량해서 단숨에 제철 생산량이 200% 증가한 셈이죠.
특히 질 좋은 철은 이 시대 전쟁의 필수품이었던 만큼, 무기를 세 배로 찍어낼 수 있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수력을 이용한다는, 간단하지만 훌륭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혁신을 이뤄냈습니다.
기존의 방식에 말 100마리 정도가 들었다고 하니 인력으로 대체했어도 100마력의 효율을 낸다고 가정하면,
단숨에 300마력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위나라의 포텐셜을 더더욱 끌어올린 위대한 기술자인 것이죠.
(틀렸으면 이과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날은 기계가 쌩쌩 돌아가는 시대이고, 다양한 연료는 물론 전기의 힘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불을 피우는 것 자체가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옛날에는 불씨를 유지하고 키우는 것 자체가 매우매우 힘든 일이었지요.
특히 대장간에서는 광석을 녹이고 광물을 제련할 수 있을 만큼 온도가 높아야 했기 때문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풀무로 바람을 발생시켜서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이었는데요.
연소가 더 활발하게 일어나 불 온도가 높아지면 더 정교한 제철 작업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민수님이 계신 침하하에서 불경스럽게시리 메소포타미아 칭찬을 하면
이집트 신들의 저주에 시달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나,
람세스 2세와 싸웠던 히타이트인들을 제철 하면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도 이미 제철 과정에서 풀무를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고 하니
‘바람을 불어넣으면 철을 수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통용된 지혜인 것이죠.

그러나 선풍기나 에어컨도 없던 시대에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규모가 큰 대장간에서는 어지간한 풀무 바람으로는 택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렇듯 백 필에 달하는 말이나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할 정도로 거대한 풀무를 이용했던 모양인데,
원나라 때 과학자 왕정이 편찬한 《농서》에는 위 사진처럼 물레방아를 이용한 풀무가 실려 있습니다.
아마 이런 장치의 원형을 한기가 설계한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그것이 사실이면 한기의 발명은 위나라 때에 잠깐 쓰고 그친 것이 아니라 후대의 기술자들에게도 영감을 준 것 같습니다.
백성의 삶이 더욱 개선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기에 이 수력 풀무 기술은 앞서 소개했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어요.
중국 과학사 책에 나오는 삼국지 인물이라니, 후대의 인정을 멋지게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기 이전에도 물로 풀무를 돌린다는 발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광무제의 신하였던 두시(杜詩)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입니다.
두시는 반란 진압에도 공헌하고 내정에도 밝았던 훌륭한 신하였는데,
후한서 두시전에 따르면
물로 작동하는 풀무를 만들어 농기구를 제작하니, 힘은 적게 들면서 결과물은 많아졌고 백성들은 이를 편리하게 여겼다.
라는 구절이 있어, 원조집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기의 시대에도 말이나 사람의 힘으로 풀무를 돌리고 있었으니만큼
두시의 수력 풀무는 삼국지 시대에는 이미 잊힌 기술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과학사에서는 물론 최초가 중요하지만,
최초 못지않게 옛 기술을 다시 살려내어 대중화시킨 과학자의 공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점은 두시가 수력 풀무를 만든 때가 남양태수 부임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바로 그 인구 많은 남양군, 즉 한기의 고향이지요.
비록 시간이 흘러 두시의 풀무 실물이 더 이상 전해내려오지 않게 되었음에도
‘옛날에 우리 고장을 다스린 청백리가 물의 힘으로 돌아가는 풀무를 만들었다더라’
하는 소문 정도는 남아있지 않았을까요?
어릴 적 듣던 옛날이야기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한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풀무를 실제로 만들어내고 흡족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큰바위 얼굴(매직박님 말고)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고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과학자와 그의 발명이 때로 잊혀질지언정
언젠가는 세상이 진가를 알아주는 날도 오고,
기술이 후대로 계승되어 인류에게 크게 기여하는 미래도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오펜하이머의 애국심도 한때 미국의 의심을 샀으며, 그 결과 오펜하이머 개인으로서는 불행한 결말을 맞았지만,
놀란 같은 저명한 감독의 손에서 영화로 재탄생되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삶에 힘들고 고된 부분이 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보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은 과학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조비가 즉위하고 한기는 의성정후에 봉해져 제후가 되었으며, 태상을 맡거나 남향정후에 다시 봉해지는 등 상당한 우대를 받습니다.
이때 낙양이 다시 수도가 되었는데, 한기는 낙양의 천도 후에도 활약합니다.

동탁이 낙양에 불을 지르고 튄 이래 낙양은 이전의 화려함을 잃어버렸고,
헌제는 허도에 모셔졌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수도인 상황.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원소군의 옛 중심지였던 업을 얻은 뒤로
업의 입지가 나름 괜찮았기에 사실상의 수도로 쓰이기 시작합니다.
연의에서의 동작대 활쏘기 장면이나, 삼국지 조꾸조꾸 게임에서 구장으로 나오는 것 등에서 업성의 중심적 역할을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조비가 천도를 해놓고도, 정작 종묘의 위패마저 다 업에 있었기 때문에 수도로서의 위엄이 도저히 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기가 맡고 있던 태상이라는 직책은 국가의 의례를 주관하는 고위직으로, 의전 전문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낙양에 종묘가 건립되고 기존의 제사가 폐지되는 등
한기의 주도로 낙양은 예법을 다시 갖추어 비로소 수도의 가오가 살게 됩니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한 뒤, 한기는 병으로 사직을 청하지만 조예는 이런 조서를 내립니다.
"태중대부 한기는 자신의 덕을 잘 갈고닦았으며, 뜻과 절개는 고결하다.
나이가 80이 넘어도 도리를 굳세게 지킨다니 그야말로 흠결 없이 마음이 두텁구나.
늙을수록 아름다움이 더해지니, 한기를 사도로 임명한다."
한기는 노령에 이르러 삼공의 일원이자 관료의 정점, 사도까지 승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얄궂게도, 전임 사도였던 진교가 사도에 임명된 지 겨우 한 달 만에 사망한 바 있었는데
한기도 봄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장례를 절검하게 치르려고 했으며,
심지어 죽기 전 조예에게 올린 상소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살아서는 백성을 이롭게 하였는데, 정작 죽어서 백성을 해롭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조예는 한기의 유언을 존중해, 한기의 상을 치르면서 낙양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노역을 전가하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후한 말에 일찍이 없었거나, 혹은 잊혀졌던 기술을 발견한 공학자이면서
조정에서 사도의 직책까지 역임한 위나라의 명신 한기.
그는 비록 삼국지 14 속에선 한자리수의 통솔과 무력을 받았으며
우리에게도 존재감이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훌륭한 과학자는 반드시 쓸쓸히 남지 않고 업적을 인정받기 마련이며
고결한 뜻은 후대까지 전해 내려온다는 것을 그의 인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짧은 사료로 한기의 마음가짐이나 수력 풀무의 원리를 다 파악하기란 어렵지만,
그가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는 데 과학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과학이라는 관점… 좀 낭만적일지도?
이상으로 침국지 마이너 인물열전 한기 편을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참고 :
이문규(2017), 동아시아 전통 과학의 발견과 그 영향
테리 레이놀즈(1988), Stronger than a hundred men : a history of the vertical water wheel(너무 옛날 책이라 못 찾고 구글 미리보기로만 확인. 이 제목이 완전 한기의 업적 그 자체인데 정말 거기서 따왔는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