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너머 (후)
군사문학 갤러리 - 런던사람님의 단편소설입니다.
텍스트 제한으로 전, 후로 나누어 올립니다.
즐거운 감상되시길 바랍니다.
* * *
1X학번 오원호와 두 학번 느린 김현은 과에서 유명했던 선남선녀 CC였다. 오원호는 내가 막 복학하여 다시 학과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가장 먼저 친해진 과 후배 무리 중 하나였다. 당시 슬슬 군대 갈 생각을 하고 있던 녀석이었는데, 오며가며 이야기를 해보면 사람이 경우 있으면서도 친근한 것이 괜찮은 놈인 것 같아 가끔 술도 함께 먹곤 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로 인기도 꽤 많은 녀석이었는데, 그가 김현을 만난 것은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술은 영 자신 없다며 온통 울상이던 신입생 현이의 흑기사를 해준 것을 인연으로 둘은 언제부턴가 과CC가 되어 있었다. 그 덕에 녀석은 남자친구 한번 사귀어본 적 없다는 현이를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꾀어내 채간 나쁜 도둑놈이라는 괘씸죄에 걸려 - 심지어 군 입대까지 앞두고 있었으니, 과모임 때마다 술게임이란 명목으로 우리는 녀석을 으레 표적으로 찍어 죽이고는 했다. 현이가 예쁘고 성격이 좋았다는 부분에서 질투 아닌 질투가 개입한 것도 컸다. 좋은 때였다. 다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즐기던.
오원호 녀석은 술버릇도 유쾌한 놈이었다. 원호는 결코 술이 약한 편이 아니었는데, 짜고치는 고스톱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녀석 옆에 소주병이 한 서너병쯤 뒹굴기 시작할 즈음이면 녀석은 ‘아, 행님. 줴가 싸~랑하는거 아시죠?’ 하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앵겨오며 2차를 강력하게 주장하곤 했다. 못 이기는 척 그를 끼고 2차로 노래방에 가서 놀다가 그가 완전히 맛이 가버리면, 우리는 그제서야 현이를 부르곤 했다. 그때마다 현이는 우리한테 빽빽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한 번을 못 나오겠다고 하는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현장에 도착하면 술기운이 잔뜩 올라 신나있는 우리를 샐쭉한 표정으로 타박해대곤 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선배들이 화장실에 원호를 데려가 토를 시키고, 여명808을 먹이고, 이를 보고하고, 현이와 함께 가위바위보에 진 우리 중 한명이 그를 업은 채 3차를 가 어묵이나 라면 따위를 사먹이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끝나면 우리는 녀석과 현이를 택시에 같이 밀어 넣고는 ‘냉동 참치지만 알아서 잘 해봐!’ 하고 현이를 놀려먹고는 했다. 그때마다 현이는 질리지도 않게 항상 머리끝까지 빨개져서는 ‘아 무슨 소리에요!!’ 하고 택시 문을 닫아주는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질러오곤 했다. 그런 그녀를 피해 낄낄 웃으며 그 길로 도망쳐나와 파장하는 것이 우리 과 모임의 의례였다. 그런 오원호는 사생활 추문 없이 행실도 좋고, 학점도 잘 챙기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예의도 발라 선후배, 동기, 심지어는 교수에게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인기 좋은 녀석이었다.
전쟁 발발 뒤로 일체의 연락이 끊긴.
* * *
“이거 어디서 났어요.”
굳은 표정으로 사내를 추궁하니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우물쭈물할 뿐이다.
“진짜 중요한 얘기에요. 이거 어디서 났어요.”
“제에가 요덕에서 으무병이었는데... 그게 21사 애드리 근춰에서 작저늘 띠다가 대전차매복조에 당해따카더라구요... 므아침 가까이 있는게 우으리여서 년락바다 갔는데... 브상자 하나가 이 븡투를 꼭 지어줌서... 꼭 K대 국제하꽈 과사에 저내달라고... 군데 그 지쿠에 즈어도 박겨포를 마자서 정시늘 잃는 바라메 그 사라마고는 헤어져씀니다... 잘 모라요...”
15사는 요덕에 가지 않았다.
이기자 출신의 재민이는 가끔 술자리에서 요덕 얘기를 꺼내곤 했다. 녀석이 좀 우울한 날일 때 술이 들어가면 그랬다. 어떻게 그의 중대가 선봉으로 요덕, 그 중에서도 용평 완전통제구역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떻게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몇몇 보안원들이 그들 대대가 들이닥치던 그 순간까지도 증거인멸을 위해 수감자들을 총살하고, 또 동시에 불태우고 있었는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재민이는 한참을 망설였다. 눈을 내리깔고 소주 서너잔을 연거푸 들이켰을까. 그제서야 재민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더랬다. 대대 본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수감자들이 ‘자치적으로’ 부역자들과 보안원들을 ‘재판’할 기회를 주었다고. 그의 대대는 수용소의 ‘교통정리’를 끝내고 후속하는 21사단에게 관리를 인계한 뒤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원호의 자대는 21사단이었음은 틀림없다. 그가 신교대에 입영하던 날 그를 배웅가기까지 했었으니까. 마치 역할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눈알이 빠져라 울던 현이와 그런 그녀를 달래며 쓴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이 생생하다.
하지만 이 사내가 말하는 15사단은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요덕에 간 적이 없다.
15사단은 요덕이 아닌 평남 양덕 방향으로 진군했었다. 그 근방을 전쟁 중 지난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상당한 원호에게 봉투를 받았다고 하지만, 꾸깃꾸깃 오랫동안 간직한 듯한 모습의 봉투는 핏물 한 방울, 흙 한 톨 묻은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저 반지에만 흠집이 몇 개 가있을 뿐. 이 사내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 순간이었다. 침묵 속 불안한 듯 시선을 내리깔며 모자를 고쳐쓰는 그의 왼팔목에서 시계가 드러난 것은. 흔하디 흔한 검은색 G-Shock 시계였다.
그저 흔한 시계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심장이 철렁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로 맞아 떨어지는 느낌일까. 그의 익숙한 왼눈매가, 그의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쇳소리 나는 저음이, 그의 시계가, 그가 낚아 챈 반지가, 깨끗한 봉투 안에 담겨 펼쳐진 책상 위 그의 편지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답을.
현이는 원호가 입대할 때 검은 G-Shock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의 무사를 빌며 그의 손목에 채워주었었다. 흩어져 떠다니던 퍼즐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명확한 그림으로 맞아 떨어져나간다. 섬뜩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소름이 돋는다.
반지를 낚아 챈, 꽉 쥔 그의 오른손을 향해 나는 손을 뻗는다. 순순히 그의 손을 풀어내도록 손을 내어준 그는 시선을 피한 채 말이 없었다. 반지가 내 손으로 넘어온다.
“야, 너 오원호지.”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린다.
“나는 그 사람 모라오... 나는 모르어요... 나는 그냥 부탁 바든거에요…”
하지만 나는 보았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움찔하던 그의 어깨를. 화들짝 놀라 겁에 질린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본적이 있는, 누군가의 눈과 닮은 눈동자였다. 자위에 늪에 빠져들어 허우적이던 사춘기, 거울 속에서 자주 마주치던 나의 눈을 닮아 있었다. 자그마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방문을 망연히 응시하던 그때 거울 속 언뜻 마주친, 살구빛 조명이 드리운 나의 얼굴 속 식겁한 눈동자. 동창회 자리서 넘칠 듯 찰랑이는 소주잔에 섞어 물었던 짝사랑이자 첫사랑이었던 소녀의 근황. 그리고 그에 돌아온 그녀가 전학 가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대답. 그 말에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아 그렇구나... 진짜 안됐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한 잔 받은 소주잔에 비치던 나의 텅 빈 눈동자. 사내의 눈은 그 눈을 닮아 있었다.
심증이 확증으로 변하던 바로 그 순간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올라왔다. 뿌옇게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너 오원호지. 야 오원호 이 ㄱㅐ새끼야 오원호 맞는데 왜 맞다고 말을 못해 이 새끼야... 니가 이렇게 됐다고 내가 모른 척이라도 할 것 같았냐. 내가 그렇게 ㄱㅐ새끼로 보이더냐, 이 죽일놈아. 왜 이 꼴이 됐어... 이 새끼야...!” 하고 다그치는데 사내는 “아니이요, 아니이요... 나는 그럼 사람 모라요... 그 사람 죽어딴 마리에요...” 허겁지겁 미처 잡아챌 틈도 없이 황망히 과사무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시야를 뿌옇게 흐리는 눈물을 마구 닦아내고 다급히 따라 뛰쳐나가봐야 그는 이미 인파 속으로 몸을 숨겨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한참을 건물을 뛰어다니며 그를 찾아보다가 결국 그를 찾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뒤 과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때 하필 복도에서 마주친 후배 하나가 “형, 울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물어온다.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하품을 크게 했다 인마.” 하고 대꾸했다. 과사무실 밖 창문을 내다보았다. 마침 동 현관을 나서는 그가 보였다. 잔뜩 등을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와글거리는 인파 속을 홀로 거슬러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작고, 또 초라했다.
현이는 전쟁이 끝난지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원호를 찾다가 두 달 전 목을 매 자살했다. 육군의 ‘의병 제대’라는 통지에도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아다니던 그녀였다. 모두가 오열하던 현이의 입관식 때 그녀의 약지 손가락에는 내 손아귀 속의 것과 똑같이 생긴 반지가 하나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육신이 한 줌의 재로 화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새하얀 재가 되어 나온 현이를 보고 자지러지다 못해 정신을 놓던 그녀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기억이 하나하나 스쳐갈 수록 반지를 움켜 쥔 손아귀에도 점점 힘이 들어간다. 너무 세게 움켜잡은 탓일까, 손 어딘가가 찢어졌는지 찐득거리는 피가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피에 잠긴 반지를 그대로 손에 쥔 채,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