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맨이 프리다 칼로 전시회에서 본 사진은 멕시코 혁명일듯
멕시코 혁명
1910년 멕시코에서 장기 집권하던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부에 대항하여 여러 세력들이 무장 투쟁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혁명이다.
프리다 칼로가 태어난 1907년에서 3년 뒤에 일어났기 때문에 전시회에서 본 사진들은 멕시코 혁명에 관한 내용 같네요.
발생 배경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60년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운 사람이었다. 디아스는 외세를 격퇴시킨 영웅 중 한 명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인 1876년부터 1911년까지를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고 한다.
디아스 대통령은 산업을 진흥하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도로, 댐, 철도와 같은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외관상으론 이런 외자 도입으로 인해 철도 부설이 진행되는 등 산업의 진흥과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반면에 빈부의 격차는 극도로 확대되었다.
디아스 정권은 근대적인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토지의 등기 제도를 추진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원주민은 원래 토지 소유란 개념이 없었고, 거의 모든 농민은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마을 공동지에서 경작했다. 디아스는 '토지제도의 근대화'란 명목으로 이러한 소유권이 애매한 토지를 정부가 접수한 후 외국 자본과 대농장주에게 매각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멕시코 농민의 대다수가 토지를 잃고 '페옹'이라 불린 농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돈을 버는 것은 대장원을 소유한 '아센다도스'(hacendados)와 같은 부유층뿐이었고, 도시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디아스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루랄레스'(Rurales)라고 하는 경찰 병력을 동원하거나 선거를 조작하는 등 독재정치를 펼쳐나갔다. 토지를 되찾기 위한 원주민들의 싸움은 정부군 및 대농장주가 고용한 사병들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때문에 디아스 정권의 인기는 점점 떨어져 갔다. 디아스의 폭정에 반대하던 마곤 형제는 1900년 반-디아스 신문인 《갱생》(Regeneración)을 펴냈다. 그러나 탄압이 심해져서 1905년 미국으로 옮겨야 했다. 또한 마곤 형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디아스가 권력을 잡고 있던 자유당(Partido Liberal)에서 갈라져 1905년 멕시코 자유당(Partido Liberal de México)을 조직했다.
노동자와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노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1906년, 미국 자본 소유이던 멕시코 북부 카나네아(Cananea) 구리 광산에서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임금 차별을 이유로 파업이 발발했는데, 디아스를 뒤에 업은 사측의 강경 진압으로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항구도시 베라크루스에서는 군인들이 파업 중이던 노동자를 총으로 쏘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디아스는 1900년에 이미 70세를 넘겼고 때문에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거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0년의 대선이 다가오면서 출마를 선언했고, 윌리엄 태프트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까지 했다.
이 때 디아스의 대항마로 북부 지주 출신의 신흥 대농장주이자 젊은 지식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등장했다. 마데로는 정치적인 수완보다는 농민 측에서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인기가 있어서 30년간 이어진 독재정치로 부패가 극에 달한 디아스 정권에 반대하는 멕시코인들 사이에서 급속히 지지를 넓혀나갔다. 그는 디아스 재선 반대 운동을 펼쳤다.
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진행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디아스 대통령은 '민주적인 선거'라는 근대국가의 체면을 집어던지고 마데로를 체포하여 투표일을 산루이스포토시 감옥에서 맞이하게 했다. 디아스는 자신이 압도적 득표로 재선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아무리 봐도 부정선거였다.
선거가 끝나고 디아스가 대통령에 재선되자, 마데로는 풀려났다. 그는 미국 텍사스로 망명하여 10월 25일에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산루이스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을 발표하여 봉기를 호소했고, 이에 따라 마데로 지지자들이 북부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로써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관련 사진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