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판 부정시험
옛날옛날 조선시대 성종때 신종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조부가 신숙주고 외조부가 한명회인 대단한 집안 사람인데요.
유복자로 태어나 할아버지인 신숙주에게 가르침을 받았어요.(兀兀)
진사시, 문과시, 중시에 3번 장원해서 삼괴당이라고 불리구요.
명나라에 사신행을 다녀오던 중 병이 나 향년 42세로 졸합니다.(兀兀)
벼슬은 예조참판, 대제학(추증)에 이르렀어요.
세종 10남 의창군의 딸과 결혼했는데요.(와우)
장남 신옹은 숙혜옹주와 결혼하여 성종 부마가 되었구요.
차남 신잠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현량과에 급제하였는데
기묘사화로 부친의 묘소가 있는 아차산으로 낙향해(兀兀)
시서화에 몰두해 삼절로 불리었고 퇴계 이황과 교유하였다 해요.
아무튼 신종호는 사마시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홍문관 수찬으로 관료 생활을 하던 중
1482년(성종13년) 치뤄진 알성시에 응시합니다.
시험의 주제는 개방장이 환장하는 삼국지 얘기도 들어가는데요.(헤엥헤엥)

그말인즉슨 정통이 무엇이냐는 것인데요.
신종호는 아마 뛰어난 학식으로 잘 정답을 작성 한 것 같습니다.
바로 알성시에서 4등으로 뽑힌 것인데요.
하지만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兀兀)
어째서였을까요?
고거슨 바로 글씨 때문이었습니다.
(엉망잔칭이야)

이것은 한석봉이 쓴 초서와 해서인데요.(와우)
알성시는 왕이 주관하는 전시(殿試)이기에 필기체인 초서가 아닌 해서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아무래도 왕 앞에서 필기체는 조금 그렇지요?(호달달)
그렇지만 신종호는 해서가 아닌 초서로 시험을 작성했던 것입니다.(웽웽웨웽)
물론 홍문관 관원인만큼 초서 실력도 상당해서 나쁜 글씨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습니다.(헉)
바로 초서로 작성된 답안지(시권)이 어떻게 임금 앞으로 들어가서 읽힐 수 있었냐는 것인데요.
알성시의 경우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전시에서 왕이 읽는 것은 시권의 사본 입니다.
이 과정을 역서(易書)라 하고 붉은 글씨로 배끼어서 주초, 원래 시권은 본초라고 합니다.
본초에는 응시자의 개인정보가 쓰여지는데요.
기본적으로 봉(封)이라 하여 본초의 작성자도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감추지만
더욱 확실히 방지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식으로요! (돌돌돌)
아무튼 초서로 작성되어(웽웽웽웽) 조기탈락 했어야 할 답안지가
왕 앞에서 누군가의 손을 거치어 해서로 둔갑하게 된 정황이 드러납니다. (또요요용)

그것은 바로 신종호의 형 신종흡이 개입된 정황인데요. (우우)
우리 고관대작 분들도 많이 놀라신거같아요.(많이 놀라셨죠?)
실록에선 봉한 이름을 엿보니() 신종흡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동생이 형의 대리시험을 쳐준 것으로 보입니다.(헉)
글을 많이 쓰는 관직이니 만큼 신종호의 글씨정도는 알 수 있었겠지요.
혹은 신종흡이 당시 종4품에 있어서 시험에 참여해 봉하는 과정에 개입해서
동생을 위해 답안지의 초서를 해서로 만드는데 역할을 했을 수도 있구요.
기록이 미비하여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정말 있는 집안이 더합니다.(이글이글)
(아무튼)
이후 신종호는 성종 17년 중시 장원을 해 3번쨰 장원급제를 달성하고 위에 쓰여진 대로 순탄한 벼슬생활을 이어가요.
아들이 성종의 부마가 되자 견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성종실록 편찬에도 동지사로 참여해요.
그리고 형 신종흡은 부평부사로 있던 중 탄핵을 당하였고 이후 벼슬은 풍저창 수(정4품), 내자시 정(정3품)에 이릅니다.

그럼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