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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에는 처음부터 음이 있었을까?: 갑골문과 관련한 이야기 (스압 주의)

메디나
23.01.17
·
조회 1199

우리는 어떤 글자를 볼 때, 그 글자에는 소리가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발음은 사람마다 조금씩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각 문자마다 특정한 소리가 대응한다고 생각하죠.

그렇기에 받아쓰기가 가능합니다.

 

오분순삭] "시옷이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그 녀석의 번데기θ발음 모음.zip|#무한도전 레전드 - YouTube

(사진 출처: 오분순삭 썸네일)

 

요컨대 ‘ㅅ’을 ‘th’ 발음으로 읽더라도,

(발음이 좀 이상하다고 느끼긴 하지만) ‘ㅅ’으로 표기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처음부터 그러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갑골문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상상을 하게 만듭니다.

 

본래 글자에는 의미만 있을 뿐, 그 문자에 대응하는 소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죠.

 

 

아마 갑골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갑골문 귀갑(甲骨文 龟甲)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커먼즈)

 

갑골문은 중국 (은나라라고 흔히들 하는) 상나라 시절(기원전 1200~1000년 사이),

거북이 등껍질이나 큰 동물의 뼈에 새겨진 상형 문자입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죠.

 

국가 차원에서 제사, 날씨, 농사, 전쟁, 출산, 수명 등 다양한 분야를 점치는 목적으로 거북이 등껍질과 동물 뼈를 사용했었는데,

점괘의 내용과 그 결과를 새겨 넣은 것들입니다.

 

뭔가 엄청난 의식처럼 보이지만, 조금 복잡한 동전 던지기랑 비슷합니다.

 

대충 거북이 등껍질의 오른쪽에는 대충 ‘언제 점을 치는데, 이 일은 성공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라고,

그 왼쪽에는 ‘언제 점을 치는데, 이 일은 실패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라고 각각 새깁니다.

그 다음 조그마한 구멍을 몇 군데 낸 다음, 등껍질을 굽습니다.

그리고 불에 의하여 어디로 어떻게 갈라졌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점괘의 결과를 냅니다.

그 다음 그 결과를 아래쪽에 새겨둡니다.

(지금 위에 보이는 사진 속 갑골문은 무오일에 ‘반’이라는 사람의 길흉을 점을 쳤는데, ‘길하다'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게 새겨져 있습니다.)

 

 

(사진 출처: MBC 뉴스데스크, 2019.3.20.)

여담이지만 가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구지가’가 이러한 의식을 뜻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거북이를 “불에 굽는다[燔灼]”는 게 점을 치는 의식이고,

‘喫’이라는 한자가 먹다/마시다라는 뜻도 있지만 ‘당하다/받다/겪다’라는 의미도 있는 터라,

마지막 줄 내용이 ‘널 노릇노릇하게 구워 먹겠다’가 아니라,

‘너를 점 치는 용도로 써서 점괘를 받겠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거죠.

(뭐 어쨌든 죽기 싫으면 머리를 내놔라-라는 뜻은 똑같지만요.)

 

 

여하간 저 갑골문 덕분에 상나라가 단순히 전설 상의 국가가 아니라, 실존했었음을 규명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갑골문을 토대로 5,000여 자가 정리된 상태인데,

그 가운데 1,000자 정도만이 완벽하게 해독된 상태입니다.

 

이 정리한 것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자마다 굉장히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단순히 글자체가 다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쓰는 방식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자별로 어떤 통일된 형태가 존재하지 않은 거죠.

 

대충 한국어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밥'이라는 의미의 글자가 ‘밥’뿐만 아니라, ‘맘’,' 맙', ‘빱’, ‘밤’, ‘팝’, ‘팦’처럼

발견된 갑골문마다 중구난방으로 써져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형성(形聲)’의 원리를 취한 한자가 드물며, 대부분이 ‘상형’의 원리를 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잠깐 한자의 제작 원리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자의 형성 원리는 크게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상형’입니다.

상형문자의 그 상형을 가리키는데, 사물의 형태를 본 따서 만드는 글자를 가리킵니다.

태양을 본따서 만든 ‘날 일(日)’이나, 서 있는 사람을 본 따서 만든 ‘사람 인(人)자’ 같은 한자가 대표적이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한자들은 그 문자만으로는 어떻게 읽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한자는 ‘형성(形聲)’의 원리를 따릅니다.

그러니깐 하나의 한자 안에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聲]와 뜻을 나타내는 한자[形]를 담는 거죠.

가령, ‘물을 문(問)’의 경우에는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자와 해당 한자의 소리를 나타내는 ‘문 문(門)’자를 넣어서,

대충 해당 단어만 보고 그 뜻과 소리를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든 겁니다.

 

그렇기에 한자에 익숙한 사람들은 모르는 한자가 있더라도,

대충 그 모양을 보고 이런 식으로 읽을 것이며 대충 이런 종류의 의미겠구나-하고 그 음과 뜻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고대 문자인만큼, 상형의 원리를 취한 단어가 많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글자마다 버전이 다양하고, 상형의 원리를 취해서 소리를 추측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과연 저 시대 사람들은 저 글자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글자를 ‘의사소통’ 수단 내지는 무언가를 기록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당연히 그 글자를 읽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기에 저 시대 사람들도 저 글자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상나라 시대에는 저 글자들은 순전히 점을 치는 행위로'만' 사용했습니다.

무언가를 기록하고 전달하거나,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닌 거죠.

그러한 용도로 저 글자를 사용한 것은 상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주나라 때부터 입니다.

주나라 시대에 들어와서야, 저 문자들을 가지고 무언가 기념할 일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죠.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저 문자들은 소리가 없고 뜻만 있는, ‘기호’에 가까운 형태일 가능성입니다.

일종의 이모티콘과 같은 것이죠.

해당 이모티콘을 보고 어떤 뜻인지 파악을 하지만, 그것을 소리내어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실제로 저 문자를 사용한 것은 왕이나 신관과 같은 소수의 특권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점을 통하여 하늘의 뜻을 묻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것인만큼, 저 글자들은 ‘신성한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어쩌면 ‘감히’ 그것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혹은, 어쩌면 소리를 붙여서 읽어야 한다는 상상을 할 수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각 한자별로 음이 생긴 것은 그러한 문자를 기록용이자, 의사소통용으로도 사용하기 시작한 후대의 일일지도 모르죠.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실제로는 입증 자체가 불가능한 내용에 가깝죠.

어쩌면 저 시기에도 의사소통의 용도나 기록용으로 글자를 사용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발굴되지 않았거나, 나무와 같이 땅에 묻히면 썩기 쉬운 소재를 이용했기에 유실되었거나,

혹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모조리 불타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르죠.

 

다만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선사시대 동굴 벽화를 생각해본다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커먼즈)

 

동굴 벽화와 같은 형태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로 넘어가는, 일종의 과도기를 보여주는 흔적일지도 모르죠.

 

 

(주1) 해당 분야 전공자가 아닌 터라,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2) 이 글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이토 마레시(齋藤希史)의 『한자세계의 지평(漢字世界の地平)』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해당 도서는 한국에서는 ‘한자권의 성립’이라는 제목으로 2018년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댓글
똥아니고요치읓입니다
23.01.17
너무 흥미로운 글이잖슴~ 즉시 침하하
메디나 글쓴이
23.01.17
감사합니다:-)
여행민수
23.01.17
훈독과 음독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아닐까요
메디나 글쓴이
23.01.17
그건 확실히 중국과 한국/일본 간의 언어권이 달랐기에 발생한, 소위 '한자 문명권'의 특징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물론 라틴어 문화권이든 한자 문화권이든 아랍어 문화권이든 간에 근대 이전에는 글자를 쓰는 행위가 자신이 말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행위였고, 라틴어, 한자, 아랍어와 같은 특정 문자로 사실상 번역해서 적는 행위였던 만큼, 글자로 쓴 단어의 의미와 소리가 구분되었는 게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냉이된장국
23.01.17
흥미로운 접근이네요, 말소리가 먼저 생기고 이후에 표기법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만... 상형문자만 고려한다면 인간 언어의 문법 체계를 설명하기가 어려울거에요. 촘스키는 생성문법을 주장하면서 모든 인간에게는 타고난 언어 능력이 있다는 보편문법 (universal grammar)을 주장하기도 했었죠. 언어 공부는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메디나 글쓴이
23.01.17
저도 기본적으로 말소리가 먼저 생기고 표기법이 생겼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다만 말소리를 옮겨 적기 위해서 글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제의 의식을 위하여 일련의 기호들을 '발명'했었는데, 그것들이 기록 수단으로 '발견'되어서 사용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랄까요. 상나라에서는 제의용으로 쓰던 갑골문을, 주나라에서는 기록용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지만요. 사이토 마레시의 저서에서도 그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서, 굉장히 흥미롭더라구요.... 언어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확실히 재미있긴 한 거 같아요.
냉이된장국
23.01.17
오, 본문에 언급된 '한자세계의 지평' 이라는 책인가요?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배워갑니다 감사해요!!!
@메디나
윤치빗따이
23.01.17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네요.
고대의 문자들이 처음 생겨날 때는 단순한 기호였을 수도 있겠군요.
오니솝터
23.01.18
’아햏햏‘은 갑골문자의 부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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