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맨 TRPG 2차 창작 <무능의 모델리아> 통합본
무능의 모델리아
-1-
하늘은 맑고, 바람은 연초록이었다.
유능의 숲.
과거 '무능의 모델리아'라 불리던 자가 정착해 가꾼 숲은 이제, 그 이름처럼 능력과 무관하게 모두를 품는 곳이 되어 있었다.
높은 나무엔 새들이 노래하고, 잎사귀 사이로 해살이 춤을 추며 내려앉았다. 작은 폭포가 부드럽게 졸졸 흐르며 이끼 낀 바위를 감싸고, 그 주변에는 해바라기 크기의 노란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그 틈에서 토끼 한 마리가 풀을 뜯다가 잠시 멈춰 모델리아를 바라봤다.
“어머, 또 왔니? 이 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모델리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토끼에게 꽃잎 하나를 내밀었다. 토끼는 경계도 없이 다가와 그것을 받아 물고, 도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녀의 주위에는 작은 곤충들이 날개를 파르르 떨며 빙빙 돌고 있었고, 어깨에는 초록색 도마뱀이 늘어진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핀, 꼬리 따가워. 그렇게 자면 날 자극하는 거 알지?”
도마뱀은 꿈틀거리며 위치를 바꾸더니, 그대로 그녀의 모자를 베개 삼아 다시 잠에 들었다.
이것이 그녀의 하루였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누구도 ‘무능’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숲 속의 일상.
모델리아는 작은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10년 전과 비교해도 거의 달리지지 않았지만, 미소를 짓는 표정만큼은 더 자연스러워졌다.
“좋아, 오늘은 꿀벌 구역 꽃밭을 옮겨볼까? 꽃가루가 어제 너무 날려서... 핀도 기침했잖아.”
그녀가 들고 있던 나무 삽을 쥐려는 찰나.
‘쿵’
멀리서 땅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나무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새들이 후두둑 날아올랐다. 숲이 이토록 조용했던 적은 없었다.
“…지진인가?”
모델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폭포 아래서 무언가 검은 형체가 서전트 점프를 하며 그녀의 앞으로 뛰어왔다. 모델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검은 형체의 다리 길이를 확인했다.
“모델리아아아아아!!!”
먼저르 더 퍼스트맨, 단검을 등에 매고, 여전히 험프티 덤프티처럼 둥글둥글한 실루엣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머리보다 큰 방패를 등에 짊어진 젊은 인간 청년이 있었다. 대머리, 눈 밑의 다크서클, 이마에 왕(王) 자가 선명한...
“…왕골?”
“모델리아 누님. 10년 만인가…”
왕골은 그녀를 향해 고요한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욕 아님.”
-2-
모델리아는 갑작스러운 옛 동료들의 방문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차라도 마시고 가. 여긴 인간용이 별로 없어서… 맛은 장담 못 해.”
모델리아는 나무로 엮은 의자에 그들을 앉히고,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왔다. 하나는 민들레 뿌리로 만든 허브차, 하나는 꽃가루를 우린 달콤한 꿀꽃차.
왕골은 향만 맡고도 얼굴을 찡그렸고, 먼저르는 먼저 아무 말 없이 단숨에 마셨다.
“아직도 아무거나 잘 마시네, 너.”
“입에 들어오면 다 음식이지. 맛이 문제가 아니야. 온도와 속도가 문제지.”
먼저르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왕골은 찻잔을 한 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리아가... 움직이고 있어.”
모델리아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하늘에서 부드럽게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순간, 잊고 있던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확실해?”
그녀는 묻는 목소리를 낮췄다.
“확실해.”
먼저르가 끼어들었다.
“마리아가 3년 전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것을 알고 있어?”
모델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부터 이 일대 고블린 세력의 움직임이 이상해. 마법사 모험가들도 연달아 실종되고 있고.”
“마리아가… 그 사건들과 연관이 있다는 거야?”
왕골은 먼저르의 말을 받아 이었다.
“왕골 재단 네트워크에서 포착한 정보들이 있어.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연관이 있다는 것은 확실해.”
“…내가 필요한 일이야?”
모델리아는 속삭이듯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무능’의 이명을 달고 있는 엘프야. 내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먼저르는 그런 모델리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동료잖아.”
그 말에 모델리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하루만 고민해볼게.”
그들이 떠나는 길.
모델리아는 조용히 그들을 배웅했다. 폭포 아래 길을 지나, 햇살이 비치는 숲의 가장자리까지. 작별의 말은 없었다.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음을.
먼저르가 짧게 손을 흔들고, 왕골은 미소를 지은 뒤, 숲 밖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이었다.
“너 숙제 다 했어?”
모델리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옆집의 엘프 엄마, 금발을 질끈 묶은 채 삽을 든 채로 그녀를 부르며 아이에게 말했다.
“너 자꾸 그렇게 공부 안 하면 모델리아처럼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뱉고 나서야 모델리아가 밖에 나와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적.
“에휴 내 정신 좀 봐. 가스 불을 안끄고 나왔네.”
그녀는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모델리아의 왼쪽 눈썹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떨렸다. 핀은 모델리아의 어깨 위에서 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모델리아를 바라봤다.
“…핀.”
“응?”
“꽃밭 옮기는 건 천천히 해도 되겠지?”
“…어... 그럴걸?”
모델리아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허리춤의 단검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 참에 그 ‘무능’이라는 오해… 내가 풀어주러 가야겠어.”
-3-
다음 날 아침. 유능의 숲.
아침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무렵 모델리아는 작은 천 가방에 정성스레 꽃잎차와 자신의 무기를 챙겨 넣었다.
“핀, 너는 집 잘 지켜야 해. 이끼 밭은 너무 파헤치지 말고.”
“...씁.”
도마뱀 핀은 입에 들고 있던 민들레 줄기를 툭 내던지고 그녀의 어깨 위에서 배를 내보였다.
“에이, 뽀뽀는 안 해. 나 이제 모험 가야 된단 말이야.”
핀은 뒤집힌 채로 꿈틀거리며 뒷다리를 흔들었다. 모델리아는 작게 웃고는,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려 숲을 한 번 더 바라봤다.
“다녀올게.”
마을 경계의 돌담 너머, 왕골은 방패를 등에 짊어진 채 서 있었고, 먼저르는 마치 새벽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지면에 사선으로 꽂은 단검을 천천히 뽑고 있었다.
“기다렸지.”
모델리아가 말하자 왕골은 세모 입을 하고서 말했다.
“누님. 빨리빨리 좀 다니라니까.”
먼저르는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자, 가자. 왕골 재단 분소로. 우리와 함께할 애들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왕골 장학재단 지역 분소.
외벽은 푸른 벽돌로 단정히 정비되어 있었고, 현관문 위에는 ‘여기는 학문의 신성함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무기가 필요합니다.’라는 문구가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모델리아가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뛰어온 건 키가 무릎만 한 하플링 소녀였다.
“우와아아! 진짜다! 진짜 모델리아다! 진짜 모델리아!”
“…이것도 환영인 건가.”
모델리아가 중얼였다.
“릴리엔, 침착하라고 했잖아.”
문가 쪽에서 조용히 걸어온 드워프 청년, 바루크. 말은 적지만 눈썹만큼은 진지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고구마를 한입에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당신이 그 유명한 무능의 모…”
“페로, 입 안 다물래?”
릴리엔이 기겁하며 옆에 있던 인간 마법 연수생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하하, 얘는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나~? 진짜 사람 앞에서 실례가…”
“…좋아. 일단 말 걸기 전에 차 마시게 해줘.”
모델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나무로 된 탁자에 앉았다. 왕골과 먼저르는 뒷짐을 진 채,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4-
“그러니까 너네들은 수색까지만 동행한다는 거지?”
모델리아는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앞에 선 릴리엔, 바루크, 페로를 쓱 훑어보았다. 셋 다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눈빛에 ‘모험은 생각보다 무섭다’는 조짐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먼저르가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장학생들이니까. 위험해지는 건 막아야 해.”
“...그 말은 나는 위험해져도 된다는 뜻이야?”
모델리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이제 무능의 모델리아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건가.”
페로가 나직이 말했다가 바루크의 팔꿈치에 턱을 맞고 말았다.
왕골은 장검을 등에 멘 채, 낡은 지도를 펴 들고 말했다.
“우린 최근 고블린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북서쪽의 마을까지 간다. 고블린들의 수상한 움직임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이지.”
먼저르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수상한 점을 수색 및 추적하고, 단서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장학생들은 그곳에서 귀환한다. 약속이야.”
릴리엔이 살짝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모델리아 님과 오래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러자 왕골이 끼어들었다.
“너 그러다 진짜 무능해질 수도 있어. 무능도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모델리아는 의도적으로 왕골의 말을 무시했다.
“가자. 고블린이 머물렀다는 폐허, 거기서 냄새부터 맡아보자.”
왕골이 장학생들을 앞세워 움직이기 시작했고, 모델리아와 먼저르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무너진 마을을 향한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 폐허의 끝에서, 마리아의 흔적이 첫 발을 내딛고 있다는 것을.
-5-
3일 동안 그들은 함께 폐허가 된 마을로 이동했다.
중간중간 몬스터들과 조우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전투를 최대한 회피했다. 혹여나 우연히 마주친 작은 무리나 동물들은 먼저르가 먼저 나서서 처리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릴리엔이 텐션을 높이며 말했다.
“근데 모델리아 님은 도대체 무슨 마법을 쓰세요? 궁금해요! 팬으로서!”
모델리아는 흠칫했다.
“어… 노래?”
“…네?”
“노래.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기도 하고, 아군의 사기를 올려주기도 하는 그런 노래들.”
“아… 되게… 시적이다…”
페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르는 모른 척 땅을 살폈다.
그렇게 길가엔 무너진 담장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잿빛 돌들이 녹슨 철근처럼 드문드문 땅 위에 박혀 있었고, 그 사이로 시든 꽃들과 마른 피가 번져 있었다.
“이 근처가 그 마을이야.”
왕골이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고블린이 습격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도 몰라.”
“와… 여기 진짜 폐허네요.”
릴리엔은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무섭긴 한데… 뭔가 애니 같은 분위기도 있고, 마법사의 폐허라거나—”
바루크가 말했다.
“여긴 그냥 폐허고, 그냥 조용히 수색하는 게 좋을걸.”
붕괴된 석조 창고 근처에서 모델리아가 담벼락을 짚으며 말했다.
“이쪽, 조금 흐름이 이상해. 고블린 흔적이 있을지도…”
“거긴 내가 아까 먼저 살펴봤어.”
먼저르가 담백하게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없었어. 대신, 저쪽은?”
그는 모델리아가 가리킨 곳보다 정확히 45도 옆쪽을 가리켰다.
모델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음… 역시 그렇구나.”
그때, 바루크가 허리 숙인 채 한 무언가를 들고 일어섰다.
“이건… 무슨 부적이 타고 남은 조각인 것 같아요.”
불에 타다 만 양피지 조각 위에 은색 문양이 번들거렸다. 부적은 거의 바닥에 섞여 있었지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마력의 흔적이 공기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왕골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끝이 조심스레 문양을 더듬었다.
“마력이 깃들어 있어…”
왕골이 천천히 말했다. 그 뒤에 모델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고블린이 있다는 거야?”
왕골은 무언가 깨우친 듯 말했다.
“그래! 마법 부적이 있다는 거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고블린이 있다는 거야. 알아들었어? 먼저르?”
먼저르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이건 누가 고블린에게 제공한 거야. 고블린이 만들 순 없어.”
모델리아가 한 발 다가왔다.
“그럼 설마 마리아가?”
“가능성은 있어.”
먼저르가 대답했고 왕골은 끄덕였다.
“고블린이 공격 마법을 사용해 작은 시골 마을을 습격했고, 여기 사람들은 생전 처음보는 마법에 당황해 대처하지 못한 거겠지.”
그들은 이후 마을 외곽에 있던 생존 주민 몇 명과 조우했다. 대부분은 다친 가족을 치료 중이거나, 이미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갑자기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났어요.”
어린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고블린들은 여자는 납치해서 데려가고 남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잡아먹는데, 이상했어. 남자들도 끌고 가려고 하더라고.”
소년 뒤의 노파는 그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릴리엔은 그 말을 적으며 모델리아를 흘깃 바라봤다. 모델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허공을 바라봤다. 먼저르가 말했다.
“이 녀석들. 그런 것까지 눈을 떠버린 건가.”
그 말이 떨어질 즈음,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폐허 너머, 낮은 산맥 아래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냄새가 흘렀다.
-6-
일행은 장학생들은 마을에 남아 사람들을 돕고 추가 조사를 하도록 한 뒤, 고블린들의 거처를 추적했다. 이 앞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숲은 침묵하고 있었다. 나뭇잎조차 숨을 죽인 듯, 바람도 말없이 가지 끝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먼저르는 앞장서서 빽빽한 관목을 가르며 나아갔다. 마법으로 민감해진 지형을 확인하려는 듯, 손끝에서 희미한 기류가 흔들렸다. 왕골은 숲의 오른쪽 경계를 타고 돌며 덤불을 살피고 있었고, 모델리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조용하다니… 뭔가 있긴 있겠네.”
그녀는 나뭇잎 위에 엎드려 있던 매미 껍질을 슬쩍 들춰보았다. 작게 구워진 듯 반쯤 타버린 껍질. 근처에 누군가 불을 썼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근처인 것 같아.”
왕골이 짧게 말했다. 이마에 왕 자가 땀으로 반짝였고, 손등의 미세한 흉터가 일렁이는 듯 했다.
먼저르가 다시 돌아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숨겨진 입구가 있어. 덩굴에 가려져서 잘 안 보여, 근데 안에서 나오는 공기가 달라. 오래된 동굴 특유의 곰팡이 냄새와… 피비린내.”
세 사람은 천천히 그 입구를 향해 몸을 낮췄다. 덩굴을 조심스레 걷어내자, 이끼와 뿌리로 가려져 있던 작은 암벽의 틈이 드러났다. 그 안쪽으로는 바람 한 점 없이, 적막한 공기가 무겁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일지도 모르겠네…”
모델리아가 속삭이며 레이피어를 손에 쥐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신발끈을 풀었다.
“어두운 동굴에서는 발소리 때문에 위치가 들키면 안 돼. 신발을 벗자…”
왕골이 입을 열려다 말았고, 먼저르는 그냥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델리아는 맨발로 바닥에 발을 디뎠다.
딱.
“…어?”
아래에 있던 건 부드러운 흙이 아니라, 사납게 돋아난 가시덤불이었다.
“아야!”
그녀는 그 자리에서 점프하며 비명을 질렀고, 작은 바위에 걸려 뒤로 넘어지다시피했다.
바로 그때였다.
캉, 캉캉—!
동굴 안쪽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 세 마리가 허리를 숙인 채 튀어나왔다. 짧은 창을 쥔 고블린, 녹슨 도끼를 든 고블린,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장궁을 움켜쥔 고블린. 황급히 무기를 뽑아드는 모습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침입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델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발바닥은 가시에 찔린 상태였다.
“…아,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는 거야…”
먼저르가 도끼를 뽑았다.
“어쩔 수 없군. 전투다.”
왕골도 손끝에 마법을 빛내며 조용히 말했다.
“누님, 역시 변하지 않았구나.”
-7-
그들은 바닥에 넘어져있는 모델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작고 빠르며, 얄밉게 웃는 고블린들의 울음소리가 동굴의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모델리아는 재빨리 몸을 틀어 굴렀지만, 발바닥의 통증 때문에 자세가 뒤틀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레이피어를 찔러냈다. 그러나—
“푹.”
레어피어의 끝이, 고블린의 살이 아닌 벽의 돌기둥 틈새에 정확히 박혔다.
“찌익…”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퉁’ 소리와 함께 검이 두 동강 났다.
“어… 어라…?”
모델리아가 손에 쥔 반쪽짜리 손잡이를 바라봤을 때, 먼저르가 무언가를 중얼이며 도끼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빡!”
녹슨 도끼를 들고 있던 고블린의 머리통이 마치 수박처럼 터지며 벽에 튀었다.
“첫번째 고블린은 나 먼저르 더 퍼스트맨이 처리했다!”
이어서 왕골의 손끝에서 빛이 쏟아지며 유도화살이 휘어져 날아갔다.
“빵애에요!”
활을 든 두 번째 고블린은 “끄악?” 소리를 내기도 전에 빛에 휩싸여 그대로 쓰러졌다.
“셋째는 네 몫이야. 모델리아.”
먼저르가 말했지만, 모델리아는 고블린의 창을 가까스로 피하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고블린은 살짝 당황했는지 뒤를 돌아봤고, 그 순간 먼저르가 그대로 다리를 걸고 넘어뜨려 꽁꽁 묶어버렸다.
모델리아는 헉헉거리며 땅을 짚고 앉았다. 부러진 레이피어가 손등에 닿아 무겁게 느껴졌다. 흙과 가시가 뒤섞인 바닥이 찰나의 조소처럼 발바닥을 찔렀다.
그 때, 조용히 들려온 목소리.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어떻게 백 살 넘게 살았는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왕골이었다. 그는 신나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모델리아를 비난했다.
“...”
모델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조용히 안 해?”
먼저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왕골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대꾸했다.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 내 말이 맞으니까, 내 말만 맞다고 할 수밖에 없어.”
정적이 잠시 흘렀다. 모델리아는 묵묵히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부러진 검을 들어 올리려다 말고, 그냥 옆의 수풀에 툭 던졌다.
“…새로 살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8-
어두운 동굴 안, 입구 근처에 고블린 셋이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모델리아는 묵묵히 그 앞에 앉아, 피가 고인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마리는 완전히 불에 타 그을려져 있었고, 한 마리는 머리가 둘로 쪼개져있었으며, 마지막 한 마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줄에 묶여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모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기다려.”
왕골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말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차가웠다.
“순순히 알 수 있는 정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야.”
그는 먼저르를 쳐다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리 틀어.”
먼저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긴 장대를 꺼냈다.
“오랜만이네, 이 방식.”
“끄아악! 살려줘! 뭐든 말할게!”
왕골은 주리를 틀던 손을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좋아, 우리가 묻는 것에만 대답해. 이름이 뭐야?”
고블린은 잠시 당황한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고풍.”
왕골은 그의 대답을 듣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 풍아, 주요 무리는 어디로 갔지?”
“떠났어. 본대는 더 북쪽으로, 무슨 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어!”
그 말을 들은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왕골이 다시 묻는다.
“잡혀온 사람들도 그곳으로 간건가.”
고풍은 대답한다
“그렇다.”
“그 마법사는 누구지?”
“몰라. 근데 그 인간이 마법 물건을 넘겨줬어. 피가 필요하대.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 잡아주면, 그 남자가 힘을 주는 거야…”
왕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마법사의 이름은?”
“이름은 기억 안나. 정말이야. 재성바래비투스였나, 마리아 호아키나였나 하여튼 그런 어렵고 긴 이름이었어.”
모델리아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왕골이 묻는다.
“너네도 여기 어찌 됐든 살려면 창고가 있을 거 아니야? 그 창고의 위치는 어디지?”
고풍은 두려움에 떨며 동굴 안쪽의 좁은 통로를 가리켰다.
“그쪽 막다른 길… 반쯤 무너졌는데, 안쪽에 있어. 근데 쓸만한 건 아마 다 가져갔을텐데…”
왕골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고… 고풍…”
“그래, 고풍. 넌 이제 무리로 돌아갈 수 없겠지? 배신했으니까.”
고풍은 멈칫하더니, 불쑥 말했다.
“그럼… 아예 너희 쪽으로 붙을까? 나… 도와줄 수 있어. 진짜야!”
왕골은 짧게 웃었다.
“나는 배신한 녀석은 신뢰하지 않아.”
그리고는 손끝을 튕겼다. 빛의 궤적이 번개처럼 고풍의 이마에 꽂혔다. 유도화살. 고블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뒤로 젖히며 쓰러졌다.
모델리아는 왕골의 태도에 움찔했다. 하지만 왕골은 이미 시체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나는 사제니까, 사체는 내가 수습할게.”
먼저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어째 됐든, 우리가 죽인 생명에 대한 사죄도 해야지.”
먼저르는 동굴의 구석에 “고풍과 그 친구들을 위하여”라는 글귀를 적었다. 왕골은 세 고블린의 시신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수습하며, 낮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조렸다.
“이 모든 죽음이 마리아 호아키나의 탓이로다. 저주받을 지어다. 마리아 호아키나. 아멘. 죽을 때 고블린에게 가죽이 벗겨질 지어다. 아멘.”
모델리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손을 꽉 쥐었다.
-9-
어두운 동굴 깊숙한 곳, 고풍이 가리킨 좁은 통로를 지나자 반쯤 무너진 공간이 하나 드러났다. 희미한 푸른빛이 벽면에 스며들고 있었고, 오래된 목재 상자들과 반쯤 부서진 선반들이 무더기처럼 쌓여 있었다.
왕골이 가장 구석에 쌓여 있던 상자를 뒤집자, 그 안에는 먼지가 쌓인 채 고요히 잠들어 있던 낡은 마법서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게 뭐지?”
모델리아는 그 책을 들여다보며 뒷표지를 확인했다. 은색으로 각인된 마법진 위에 특이한 문양이 겹쳐 있었다. 마치 원 안에 또 다른 눈이 떠 있는 형상. 눈동자 아래에는 작은 이탤릭체 글씨가 적혀 있었다.
<Over Power>
그것을 본 먼저르가 약간 놀란 어투로 말했다.
“이건 마리아 호아키나가 10년 전, 그러니까 우리와 헤어진 직후에 세운 마법 연구소의 이름이야. 흔히들 줄여서 ‘옾’이라고 부르지. 마리아가 잠적한 이후 지금은 폐쇄됐지만.”
왕골은 먼저르의 말에 거들었다.
“폐쇄가 아니라 시즌 1 종료라고 불러. 어째 됐든 확실한 건 이제는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겠군.”
모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10년 전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며칠 뒤, 일행은 ‘옾’이 있던 지역으로 이동했다. 왕골 장학재단에서 기록을 찾아 전해준 좌표는 숲과 협곡이 맞닿는 경계선 근처였다. 폐허는 조용했고, 잡초가 무성한 돌담 안엔 수십 년은 된 듯한 묵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모델리아는 협곡 입구 근처를 돌며 조용히 말했다.
“무슨 소리가 들려.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다들 소리를 죽여.”
그 순간, 숲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스르르—
먼저르가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소리의 근원으로 몸을 날리듯 튀어올랐다.
잠시 후, 그가 멱살을 붙잡은 채 땅으로 찍어 누른 존재는 낡은 망토를 두른 인간이었다. 그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짧은 창이 줄로 묶여 있었다.
왕골이 다가가며 물었다.
“너, 누구야! 왜 이 폐허를 염탐하고 있지?”
“하… 들켜버렸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웃었다.
“난 도시의 범죄 길드 ‘지구멸망이 좋겠다’ 소속이야. 이런 곳에 관심 가질 사람은 딱 둘밖에 없지. 너희 같은 정리반, 아니면 우리 같은 협력자들.”
“지구멸망이 좋겠다?”
모델리아가 묻자, 그는 웃었다.
“재밌는 이름이지? 근데 그게 목표야. 범죄 길드라면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지.”
모델리아가 흠칫했다.
“마리아 호아키나와 관련된 무엇을 알고 있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벌린 그의 이 사이, 잇속에서 은빛 작은 통이 드러났다.
“멈춰!”
먼저르가 외쳤지만 늦었다. 사내는 고개를 젖히고 독약을 삼켰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지며 경련을 일으켰다.
왕골이 무릎을 꿇고 맥을 짚어봤지만, 이미 늦었다.
“…죽었어.”
먼저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왕골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이곳을 먼저 수색해보고, ‘지구멸망이 좋겠다’의 목적도 알아봐야 하겠어. 뭔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확실해.”
모델리아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망자의 자리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10-
그들이 도착한 ‘옾’의 자리에는 무너진 아치와 금이 간 석주,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가득했다.
마법 연구소였던 흔적은 이제 고요한 폐허 속의 그림자처럼 잊혀져 있었고, 그 흔적을 밟는 발소리만이 이곳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완전히 비어있어.”
먼저르는 먼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왕골은 손끝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마법 기류를 탐지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마력의 흐름도 사라진 지 오래야.”
그는 말없이 안쪽의 둥근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중앙에는 푸른빛이 거의 바래진 유리돔이 있었고, 그 둘레엔 다양한 장식물들이 붙어 있었다. 먼저르는 천천히 그중 낮게 엎드린 표범 모양의 구조물 하나를 시계 방향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상하네. 이런 기믹이면 뭔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다시 시도했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그때, 모델리아가 한쪽 벽에 걸려 있던 벽화를 바라보았다.
빛이 닿은 부분은 이미 색이 바랬고, 검은 곰팡이가 희미하게 번져 있었지만, 눈동자처럼 그려진 중심의 문양은 또렷했다.
“이 그림, 뭔가 빠진 것 같아. 뭔가 들어가야 완성되는 거 같은데…”
그녀는 손끝으로 그 문양의 윤곽을 따라 그리며 혼잣말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
그 순간, 왕골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누님. 아니에요. 딱 봐도 아니게 생겼구만.”
“그래?”
모델리아는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왕골이 무언가를 알아챈 듯 소리쳤다.
“나 알았어!”
먼저르가 고개를 들었다.
“너 반시계방향이라고 말하기만 해. 아주.”
왕골은 당연한 것을 왜 아니라는 듯이 반문했다.
“아니야?”
“지금 그런 말장난 할 때야?”
먼저르가 피곤한 표정으로 중얼였다.
“그럼 언제 해. 중요한 장면에서 해야 임팩트가 크지.”
왕골은 뻔뻔하게 대꾸하며 손을 털었다.
모델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곧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시 벽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림이 아닌, 구조 그 자체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일행은 ‘옾’에서 이렇다할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방향을 바꿔 ‘지구멸망이 좋겠다’를 수색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1-
도시의 밤은 유능의 숲과는 다른 어둠이었다. 불빛은 깜빡이고, 어두운 골목마다 누군가의 비밀이 고여 있었다.
모델리아와 먼저르, 그리고 왕골은 평범한 주점처럼 보이는 곳의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간판에는 흐릿하게 '서쪽 문 너머'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고, 창문은 얼룩으로 가려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야.”
왕골이 낮게 말했다.
“이런 데를 어떻게 알아낸 거야?”
모델리아가 물었다.
왕골은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 재단 1기생 중에, 마리아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가 있어.”
“스파이?”
“그래.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은밀하게 마리아를 감시하기 위해 어두운 조직에 잠입시켰지.”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술집 안은 시끄러웠다. 마치 평범한 술집 같은 분위기. 하지만 낯선 인물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각자의 잔을 앞에 두고 웅크리고 있었다.
왕골은 맥주잔을 들고 바 뒤에 서 있는 주인에게 다가갔다.
“거미는 오늘도 열심히 집을 짓네.”
그는 자연스럽게 암호를 던졌다.
주인은 컵을 닦던 손을 멈추고는 왕골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리고는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숨만 쉰다.”
왕골은 태연하게 다음 문장을 읊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면”
그 다음 문장은 주인과 왕골이 동시에 말했다.
“쌓여있는 설거지를 안 해도 될 텐데”
작은 문이 바닥 뒤쪽에 열렸다.
지하실은 벽돌과 촛불, 그리고 싸늘한 공기로 가득했다. 일행은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끝에, 후드에 얼굴을 감춘 한 남자가 있었다.
왕골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레카르도.”
남자는 후드를 벗었다.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빛.
“왕골. 네가 있다는 것은…”
왕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들이 먼저르 형님과 모델리아 누님이야.”
왕골은 모델리아와 먼저르에게도 그를 소개해주었다.
“레카르도야. 왕골 장학 재단 1기생. 그리고 마리아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조직에 투입된 스파이.”
레카르도는 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름 오랫동안 조직에 몸을 담구면서 신뢰를 얻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스는 자신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자신의 꿍꿍이가 새나가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
“무엇을?”
모델리아가 묻자, 레카르도가 조용히 대답했다.
“몰라. 다만 최근 주변 작은 마을의 사람들, 그리고 이 일대 마법사 모험가들의 실종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정적.
왕골은 주먹을 쥐며 물었다.
“지금 너네 보스는 어디에 있지?”
레카르도는 책상 위에 작은 두루마리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여기야. 지금 보스는 도시 동쪽 빈민가, 오래전 폐쇄된 공동 우물 근처의 지하 저장고를 아지트로 쓰고 있어. 비밀스럽게 숨겨진 입구라 일반인들은 찾을 수 없어.”
왕골이 그것을 받아들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에 대한 정보는 없어?”
레카르도는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벨라드. 50대 정도의 전사이자 도적이야.”
“똥캐네?”
레카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레벨이 꽤 높아. 만만하게 보면 안될거야.”
“그러면 너는…?”
레카르도는 고개를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여기까지만 할게. 이 이상은 위험해. 이미 내가 너무 많이 안다는 사실도 문제고, 보스는 냄새가 예민한 사람이거든.”
“너 혼자 괜찮겠어?”
모델리아가 물었지만, 레카르도는 등을 돌려 지하 통로 끝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모든 일이 끝나면 나이키 앞에서 만나자.”
-12-
도시의 동쪽, 빈민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낡은 건물. 쓰러져가는 굴뚝과 조악하게 덧댄 판자들이 그곳의 허름함을 대변했다. 일행은 두루마리에 적힌 좌표를 따라, 오래된 지하창고의 입구를 찾았다.
“이거 열 수 있을까?”
모델리아가 철문을 만지며 말했다. 문의 표면은 문양 하나 없이 매끈했고, 손잡이도, 자물쇠도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왕골은 마법을 써보려 했지만, 철문의 금속 자체가 마력을 차단하는 성질을 가진 듯 반응이 없었다.
“안쪽에 마법 차폐막이 걸려 있어. 아무 마법도 통하지 않아.”
“정면돌파는 불가네.”
먼저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둑꾸러미에서 여러 가지 도구를 꺼내놓고는 이것저것 시도해봤지만 무엇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30분쯤 지났다. 먼저르는 답답한 듯 중얼이며 문 옆의 벽에 손을 짚었다. 그 순간—
“철컥.”
작은 기계음과 함께, 벽의 일부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즉시 그에게로 향했다.
“지금 뭐 했어?”
왕골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난 그냥 기대 있었을 뿐인데…”
먼저르가 손을 짚은 부분의 벽이 작게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그 부분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엎드린 표범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눈에는 작은 흑요석이 박혀 있었고, 표범의 발톱이 문을 여는 기제처럼 살짝 돌출되어 있었다.
“엎드린 표범? 이거 본 적이 있는데?”
모델리아가 놀란 눈으로 중얼였다.
“누님. 아니라니까요.”
왕골이 비꼬듯 말했다.
“너는 조용히 해. 아냐, 내가 누나니까 참아야지.”
모델리아는 소심하게 받아쳤다.
그 사이 먼저르는 입구를 향해 천천히 몸을 숙이며 말했다.
“그럼, 한 번 들어가볼까. 진짜 지옥은 여기부터일지도 모르니까.”
-13-
도시의 숨겨진 지하창고 안, 차가운 공기가 일행의 피부를 베듯 스쳐 지나갔다. 먼저르가 벽을 밀어 열었던 통로는 오래된 기계음과 함께 닫히고, 어둠 속에 그들은 고요히 서 있었다.
모델리아는 조용히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가 이상했다. 방향이 하나가 아니었다.
“여기… 바람 소리가 달라. 이쪽에 뭐가 있어.”
그녀가 낮게 속삭이자마자,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조심해!”
휙—
눈 깜짝할 새, 날렵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검은 가면, 회색 두건,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망토. 그의 손에는 짧지만 무겁고 강철로 된 곡검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너가 ‘지구멸망이 좋겠다’의 보스 벨라드냐?”
“들켰나. 하지만 상관없지. 어차피 너희는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을 테니까. 목적을 이루기 전까진 죽을 수 없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벨라드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달려 먼저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먼저르는 익숙한 듯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 더미를 집어 그에게 던졌다.
‘촹!’
구슬이 흩어지며 순식간에 운신을 방해하는 지대가 펼쳐졌다. 벨라드는 움찔하며 균형을 잃었다.
“지금이야!”
모델리아가 달려들었다. 손에는 새롭게 장만한 레이피어가 들려 있었고, 그녀는 벨라드의 측면을 노리려 했다. 하지만.
“꺄악!”
모델리아는 미끄럼 구슬에 미끄러져 그대로 넘어졌다.
“진짜 한결같다. 한결같아. 커델리아 누님. 그냥 귀만 떼서 저 주면 안되요?”
왕골이 중얼였고, 그와 동시에 방패를 내려 찍으며 외쳤다.
“나와라! 철질여골타!”
방패의 표면이 붉게 빛나며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왕골의 뒤에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보이는 듯 했다. 벨라드는 왕골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왕골에게 돌진했다.
슉—!
벨라드의 곡검이 왕골의 옆구리를 깊게 베어냈다.
“큭…!”
왕골이 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동시에 철질여골타 역시 벨라드의 복부에 강한 타격을 주었다.
모델리아는 겨우 일어나 레이피어를 들고 공격하려 했지만, 공격이 빗나가는 순간 레이피어는 손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져버렸다.
‘쨍—’
검은 벽을 튕기듯 굴러 떨어졌다.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벨라드. 모델리아는 다른 무기를 꺼낼 틈도 없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백덤블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뒤에서 날아든 그림자 하나.
먼저르였다. 그는 순식간에 벨라드의 후방으로 숨어들어, 그의 등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게 도적이야.”
먼저르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왕골은 피를 흘리면서 손에서 빛을 모으더니 벨라드에게 마법을 발사했다.
“빵애에요!!”
벨라드는 둘의 연계 공격에 그대로 비틀거리다 쓰러졌고, 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왕골은 상처를 손으로 짚은 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우리 파티 아무래도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 같아.”
먼저르는 서전트 점프를 하며 왕골에게 다가갔다.
“왕골, 넌 항상 풀피여야만 해.”
모델리아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 검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됐어.”
-14-
전투가 끝난 뒤, 숨죽인 방 안에는 벨라드의 피비린내와, 왕골의 피가 섞인 마법진의 잔열만이 남아 있었다.
모델리아는 바닥에 앉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만히 떨리는 음성은 방 안을 채우며, 일행의 상처에 작게나마 치유의 기운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잔하게,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모두의 체온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 어디 없나
가만히 놔두다간 끊임없이 덧나
사랑도 사람도 너무나도 겁나
혼자인 게 무서워 난 잊혀질까 두려워
왕골은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숨을 골랐고, 먼저르는 포션을 나눠준 뒤 쏟아진 미끄럼 구슬을 주워담았다.
“그러고 보니 먼저르 형님. 어떻게 서전트 점프를 이렇게 잘하게 됐어요?”
왕골에 말에 먼저르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20시간 동안 연습했거든.”
모델리아는 입술을 다문 채, 손끝을 조용히 자신의 검 위에 얹었다. 아직 부러지지 않은, 그러나 흔들리는 검. 그때였다.
“…잠깐.”
갑자기 모델리아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 구조물, 나 전에 본 적 있어… 옾에서도.”
왕골이 고개를 돌렸다. “뭐?”
“벨라드의 거처 입구. 그 엎드린 표범 모양… 그거, 옾 안쪽 벽화에도 있었어.”
먼저르가 팔을 털며 일어났다. “잠깐… 그 말은…”
모델리아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계 방향으로만 돌렸어. 혹시 방향이… 반대였던 거라면?”
순간,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먼저르가 깼다.
“벨라드의 주머니, 아직 제대로 안 뒤졌지.”
그는 피가 마른 벨라드의 시체를 향해 다가가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작은 은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반지에는 희미하게 ‘O.P.’라는 글자와 표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옾의 인장…?”
모델리아는 얼른 그것을 받아들고 가방에서 기억해 둔 종이 조각을 꺼냈다. 옾 벽화에 새겨져 있던 중심부의 빈 자리, 정원형 홈이 있었다.
“이거야… 여기에 딱 맞아.”
일행은 다시 ‘옾’의 폐허로 향했다. 그곳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긴장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모델리아는 중심의 구조물 앞에 섰고, 반지를 홈에 끼운 뒤, 장식 구조물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찰칵— 차르르륵—
작은 진동과 함께 바닥 아래에서 움직이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중앙의 돔이 천천히 회전하며, 그 아래로 새로운 계단이 드러났다.
왕골은 손가락으로 먼저르를 가리켰다.
“거봐, 내가 반시계라고 했잖아.”
“너무 유치해서 설마 정답일 줄 몰랐는데.”
먼저르는 한숨을 쉬며 검을 쥐었다.
“가자. 이제 진짜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야.”
그 아래로, 숨겨졌던 마리아의 은신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5-
차가운 바람이 지하로부터 스며 나왔다. 일행은 반시계 방향으로 열린 구조물의 입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돌계단은 눅눅했고, 오래된 피비린내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촛불은 없었지만, 희미한 붉은 빛이 벽에 걸린 마법진 양피지에서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 줄지어 놓인 유리병 속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신체 조각들이 보존되어 있었고, 뼈를 가공한 듯한 구조물들이 천장과 바닥을 엮고 있었다. 그 모든 분위기가, 단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실험. 혹은, 의식.
왕골은 등을 떨며 말했다.
“먼저르 형님. 형님이 먼저 한 번 가보세요.”
그 말에 모델리아가 끼어들었다.
“너가 좀 가봐.”
그러자 왕골은 대답했다.
“무셔.”
촘—촘—촘.
그때, 안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렸고, 일행은 말없이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그는 ‘마리아’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과거의 그와는 달랐다. 삐쩍 마른 모습은 여전했지만 마치 누군가의 가죽을 꿰맨 듯, 얼굴은 표정 없이 윤곽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피부의 일부는 실제 살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봉합된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야.”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묘하게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먼저르, 왕골, 모델리아. 다 모였네.”
먼저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마리아?”
“무슨 말이야?”
먼저르는 말했다.
“이 섬뜩한 연구실… 여기만 봐도 너가 선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마리아는 천천히 손을 펼쳤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마력의 흐름이 미세하게 번쩍였다.
“사실 잘 모르겠어. 내가 하는 게 나쁜 짓인지, 좋은 짓인지조차. 소설 같은 것도 그렇잖아? 어느 정도 쓰다보면 이게 좋은 작품인지, 나쁜 작품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단 말이야? 그냥 너무 멀리 와버린거지. 판단하려면 밖에서 봐야 하는데, 내 삶이 되버리면 밖에서 보게 될 수 없으니까.”
그의 말에 먼저르는 일갈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네 꿍꿍이를 밝혀!”
마리아는 허공에 손을 뻗고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약했어. 달리기도 느리고, 체력도 약하고, 힘도 없었지. 근데 하필 태어난 곳이 전사 가문이라 모두가 그걸 알면서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더욱 매질하더군. 나는 마법에 재능이 있었는데.”
모델리아는 마리아의 말을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모두가 내가 가진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약하다고 괴롭히고, 놀리고, 무시하고. 결국 내가 돈을 벌어오자 반기는 척. 하지만 그것도 겉으로만 그렇고 속은 변하지 않았더군. 앞에서는 꼬리나 흔드는 주제에, 뒤에서는 욕하고.”
그때, 왕골이 끼어들었다.
“시끄럽고, 결론부터 말해!”
그리고 그런 왕골을 본 마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한 거지. 강한 몸이 될 수 없다면, 강한 몸을 빼앗겠다고.”
정적이 흘렀다.
모델리아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리아의 뒤편, 거대한 마법진 안에 사슬로 묶인 인물이 있었다. 그 청년은 아직 기절해 있었지만,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시감이 피어올랐다. 마리아와 너무 닮은 이목구비. 하지만 얼굴만 닮았을 뿐, 그의 몸은 우람한 근육질이었다.
“그건… 네 형제야?”
모델리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마리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실험. 내 영혼을 완전히 옮기기 위한, 가장 완벽한 그릇. 내 혈육이자, 나의 또 다른 가능성.”
왕골이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섰다.
“네 형제를 실험체로 삼겠다고? 넌 정말…”
마리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어. 영혼 전이 마법은 준비할 게 생각보다 많더라고. 많은 사람들의 피, 거대한 마력, 그리고…”
먼저르가 말을 끊었다.
“혈연 관계가 있는 몸이어야 한다는 건가.”
“그래. 연구를 하면서 알았지. 영혼은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라, 생판 남이면 오래 유지할 수 없더라고. 그래서 나를 가장 괴롭혔고, 가장 무시했던 형제를 제물로 삼기로 했지.”
“어쩐지 예전부터 계속 남의 가죽 뒤집어쓰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모델리아는 마리아의 말에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손끝은 검 위에 천천히 얹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없이, 그저 하나의 질문만 맴돌고 있었다.
“마리아는 잘못을 한 게 아니라 잘못을 하도록 내몰렸을 뿐이 아닐까?”
-16-
모델리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고, 왕골과 먼저르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짧은 침묵을 먼저르가 깼다.
“네 사정은 알겠어, 마리아. 그럴 수도 있지. 약하게 태어난 게 죄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삶을 짓밟을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야.”
왕골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방패를 든 그의 팔엔 여전히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넌 강한 몸을 얻고 싶어서, 누군가를 희생시켰지. 네 형제고, 마법사들이고, 무고한 마을 사람들까지.”
모델리아도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정의의 사도들이여. 너희는 감옥에 갇힌 자들을 구하러 왔나?”
먼저르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야?”
“물론이지. 감옥에 잘 가둬뒀어. 오늘 밤 의식에 사용할 예정이었지. 그런데 너희가 나타났네. 아슬아슬하게.”
그의 말에 왕골이 낮게 으르렁였다.
“어떻게든 너를 막아야겠군.”
마리아는 손끝에서 마력을 일으켰다. 그의 뒤편, 벽에 새겨진 마법진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날 막아보든가.”
붉은 바람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고, 사슬에 매달린 청년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전투의 기운이 방 안을 뒤덮었다.
-17-
마리아의 손이 허공을 그었다.
“또염화살”
촤악!
그의 손끝에서 검붉은 빛이 뻗어나가며, 화살 형태로 응축된 마법이 왕골을 향해 날아갔다.
왕골은 순식간에 방패를 들어 화염화살을 막았다. 폭발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벽을 할퀴며 번졌다.
바로 그때였다.
사방에서 기괴한 비명이 울렸다. 실험실 곳곳에 숨어있던 고블린들이 ‘끼악!’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철제 장창, 단검, 해골 마스크를 쓰고 일제히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고블린들이 안 보인다 했더니, 숨어있던 건가!”
먼저르가 주머니에서 익숙한 구슬을 쥐고 말했다. 그는 바닥에 미끄럼 구슬을 뿌려 고블린 무리의 중심을 붕괴시켰다. 수많은 고블린들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와르르 쓰러졌다.
왕골은 방패를 높이 들어 마리아의 두 번째 화살을 다시 막았다. 뼛속까지 울리는 진동이 그의 팔을 타고 흐른다.
“먼저르 형님! 뭐라도 좀 해봐!”
그 와중에도 모델리아는 검을 들려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마리아의 뒤, 벽에 사슬로 매달린 형제를 향해 있었다.
맨몸에 가까운 그는, 마치 쓰러질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마리아와 닮은 이목구비. 하지만 너무도 다른 근육질의 몸, 그리고 생기를 잃은 눈동자.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지.”
모델리아는 결심한 듯 뛰어들었다. 고블린 하나가 그녀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그녀는 가볍게 공중제비를 돌며 피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법진을 피하며 형제에게 다가가 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정신차려!”
“누구…?”
“난 모델리아라고 해. 너를 도와주려 왔어!”
“당신이 그 유명한 ‘무능’인가. 내 이름은 마리아 피닉수아. 근데 자꾸 머리카락이 흘러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군. 혹시 핀 있어?”
청년이 흐릿하게 중얼이자, 모델리아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응, 있어. 일단 먼저 풀어줄게.”
뒤에서는 여전히 고블린과 마리아의 마법이 얽히며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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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 무리가 포위망을 좁혀왔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창끝이 공기를 가르고, 실험실 안은 순식간에 전장으로 변했다.
왕골은 방패를 높이 들어 외쳤다.
“나와라, 철질여골타!”
방패의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붉은색의 거대한 수호형이 소환되었다. 그 존재는 방패와 함께 적들의 공세를 막으며 벽처럼 자리 잡았다.
“누님, 왼쪽 막아!”
왕골의 목소리에 모델리아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촤악!’
검은 허공을 가르며 적의 몸에는 닿지 않았다.
“으으, 왜 안 맞아…”
모델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연이어 움직였지만, 검격은 계속 빗나갔다. 뒤에서는 왕골이 고블린 무리를 상대하며 점점 지쳐갔고, 피가 묻은 얼굴로 외쳤다.
“먼저르 형님! 형님은 뭐하고 있어요?”
공중.
“하하하!”
먼저르는 허공에 매달린 듯 둥둥 떠 있었다. 마리아가 펼친 비행 마법 안에 갇혀, 도끼를 휘두를 틈도 없이 무력화된 상태였다. 먼저르는 품 속에 있는 것을 이것저것 집어 던져봤지만 그 공격은 크게 유효하지는 않았다.
남은 건 왕골과 모델리아뿐. 모델리아가 풀어준 피닉수아는 어디갔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는 실험대 위에서 조용히 웃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가 뚝, 떨어졌다.
“모델리아.”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파티는… 사실상 3인 팟이었어. 네가 있는 건 숫자 맞추기용. 딜은 안 나와. 컨트롤도 안 돼. 결국, 내가 빠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지.”
모델리아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검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검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있었지만,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자신감은 없었다.
왕골은 쓰러져가며 외쳤다.
“누님… 뭐라도 좀 해봐요…”
모델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 앞의 지옥.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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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리아는 무너져가는 왕골의 외침을 들으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주변은 혼란이었다. 먼저르는 허공에 매달린 채 빠져나오지 못했고, 왕골은 마법과 고블린들의 공세 속에서 피를 흘리며 버티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모델리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 도망치는 데는 익숙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엔 너무도 부족한 손.
“…그래.”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할 줄 아는 게 없어. 검도 제대로 못 쓰고, 마법도 시원찮고, 체력도 약하고, 발목은 잘 삐고, 겁도 많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끝까지 맑았다.
“그래서 무능의 모델리아라는 이명까지 얻게 됐지.”
마리아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모델리아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은 떨리고, 발은 여전히 가시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를 받아들일 수 있어.”
그 순간, 마법진의 중심부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리아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진, 아니—연구소 지하 전체의 공기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마리아.”
모델리아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마법은 강할지 몰라도… 나보다 약한 사람이야.”
쿵—
모델리아가 말을 마치자 마법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안의 중심부가 붉은색에서 회색으로, 점점 먹먹하게 번져갔다. 벽을 타고 이어졌던 마법진의 선들이 빠르게 무너지고, 의식의 중추였던 돔형 장치가 뚜렷한 파열음을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마리아가 주춤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지면 전체가 떨리며, 위쪽에서 바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지하가 무너진다!”
왕골이 소리쳤고, 먼저르는 하늘에 붕 떠 있던 채로 중심을 잃으며 아래로 쿵 떨어졌다. 고블린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고, 일부는 떨어지는 파편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모델리아는 몸을 돌려 출입구로 향했다.
“도망쳐야 해!”
먼저르는 곧장 일어서서 마리아의 뒤로 뛰어들어 그를 붙잡았다. 중간중간 건물의 커다란 잔해들이 먼저르를 덮쳤지만, 먼저르는 멀쩡한 듯 보였다.
“이게 썬디다스 갑옷의 힘이다!”
왕골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방패를 들어 무너지는 천장을 막았다.
“전원 탈출해! 지금이야!”
거대한 진동과 함께, ‘옾’의 지하 연구소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델리아는 무너져가는 잔해 속에서 과거 ‘라우엘’을 습격했던 고블린을 발견했다. 모델리아는 빠져나가기 직전에 그 고블린을 향해 레이피어를 던졌다. 하지만 그 직후 천장에서 커다란 잔해가 떨어져 모델리아의 눈 앞을 가렸다. 모델리아는 자신의 공격이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20-
무너진 ‘옾’의 근처. ‘옾’의 주변 바닥은 붕괴되어 일부가 꺼져 있었고, 사방은 먼지와 파편,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그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모델리아와 왕골, 그리고 마리아를 붙잡고 함께 탈출한 먼저르는 아직도 헐떡이고 있었다.
마리아는 벽에 기대어 무릎을 꿇은 채, 피투성이가 된 채로 숨을 헐떡였다. 그의 눈빛에는 체념과 슬픔, 그리고 묘한 해방감이 얽혀 있었다.
먼저르는 말없이 도끼를 꺼냈다. 그 손끝에선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마리아 앞으로 다가가, 칼날을 들어올렸다.
모델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 돼.”
먼저르는 고개를 돌렸다.
“왜? 넌 직접 봤잖아. 이 자식이 무고한 사람을 얼마나 희생시켰는지. 자기 형제까지 제물로 삼으려 했다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똑같은 방식으로 끝을 낸다면, 그건 우리가 그와 다르지 않다는 뜻이야.”
왕골도 조용히 끼어들었다.
“나는 사제야. 그는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좋겠어. 게다가 아직 사건의 모든 진상을 알지도 못하고.”
모델리아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넌, 완전해지고 싶었다고 했지. 약한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고 싶었겠지.”
마리아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말라 있었고, 숨소리는 끊기듯 이어졌다.
“난… 약한 나를 죽이고 싶었어. 내 안의, 나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없애고 싶었어.”
그는 피로 물든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이겼네… 내가 틀렸던 거겠지.”
그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왕골은 마법으로 마리아의 손목을 묶으며 말했다.
“정의는 복수가 아니야. 너는 살아서 대가를 치러야 해. 우리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결말이지.”
먼저르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리며 도끼를 거두었다.
“네가 납치한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모델리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다만 감옥은 훨씬 더 지하라 직접적인 피해는 없겠지.”
-21-
그 직후, 먼지와 잔해가 여전히 바람결에 흩날리는 황량한 벌판 위에서 왕골은 조용히 통신 마법을 통해 자신의 장학재단 네트워크에 구조 명령을 내렸다.
“‘옾’의 지하실에 갇힌 생존자들 다수. 생체 상태는 불확실. 동원 가능한 모든 인원을 투입해.”
명령이 떨어지자, 연달아 도착한 구조 마법사들과 장학생들은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잔해를 들어올리고, 치료 마법이 여기저기 번쩍였다. 모델리아는 먼저르, 왕골과 함께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구조를 도왔다.
먼저르는 서전트 점프를 해가며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왕골은 자신의 광역 치유 마법을 통해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델리아는 자신의 예민한 귀를 이용해 잔해 속에 사람이 있는지 파악했다.
바위 아래에 깔린 소년을 발견하고, 팔을 다친 채 흐느끼던 드워프 여성을 발견하며, 모델리아는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끝났어요.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울음을 터뜨린 사람들도 있었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 모든 혼란의 중심에 있던 마리아 호아키나는, 마법 억제 수갑을 찬 채 구속되었다. 마리아는 기사단의 심문을 받을 것이며, 행위에 대한 판단은 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모델리아는 그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며칠 뒤.
유능의 숲. 해가 천천히 지는 시간.
그 숲 속의 평화로운 구릉지 위, 오래된 나무 아래, 모델리아는 다시 돌아와 있었다. 한 손에는 흙이 묻은 가위, 다른 손에는 허브 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여전히 도마뱀 핀이 누워 자고 있었다.
“모델리아 님 돌아오셨어요?”
숲 근처를 지나던 엘프 소녀가 부리나케 달려와 말했다. 모델리아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응. 다녀왔어. 조금… 정신없는 여행이었네.”
그 소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마리아 호아키나를 쓰러뜨렸다는 그 모델리아… 진짜 모델리아 님 맞죠?”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들 이야기해요. ‘무능의 모델리아’가 해냈다고. 대도서관에도 기록이 올라갔대요!”
모델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무능의 모델리아… 그래, 그 말. 다시 들을 줄이야.”
그리고 이젠 그 말의 뜻이 바뀌었다는 걸 안다.
그건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 무능한 모델리아도 그걸 해냈다.”
“무능하다는 건 못한다는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녀는 가위를 들어, 햇빛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민들레 줄기를 잘랐다. 부드럽게,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