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별 의미 없는 색칠 공부

학장실 문에 크고 굵은 글씨로 “겉옷은 벗고 들어오세요!!!”라고 쓰인 에이포 용지가 붙어 있었다. 느낌표 세 개를 보고, 두꺼운 겉옷을 급하게 벗어 근처 의자에 올려두었다. 코로 큰 숨을 들이마시고 똑똑똑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겼다. 학장실에서 “들어와”라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문고리를 비틀고 들어갔다. 안에는 병원 접수처처럼 보이는 창구가 있었고, 그 너머에 다른 또 하나의 문이 보였다. 문을 쳐다보며 창구에 다가가 “안녕하세요, 저 이리나 학장님 뵈러 왔는데요”라고 했다. 창구 책상에 앉아서 눈동자만 살짝 위로 올린 비서 타찌야나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데?”라고 물었다. 여유로운 척 웃으며 “개인적인 일이에요. 지금 자리에 계신가요?”라고 대답했다. “응, 잠깐만” 타찌야나가 바퀴 달린 의자를 드르륵 밀고는 데스크 뒤 열린 문으로 한마디를 집어넣었다. “김진본, 한국인”.
타찌야나가 끄덕이는 고개를 보고, 빈틈이 크지 않게 살짝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노크를 했고, 발을 조심스레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녕하세요, 이리나 학장님” 현재 위치는 러시아지만 내가 가진 최대한의 예를 보이기 위해 한국식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리나 학장은 타찌야나의 책상보다 두 배는 넓어 보이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학장은 보던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무테안경을 살포시 올리며, “어, 진본 무슨 일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긴장을 하지 않은 척, 미소를 짓고 “혹시 저 일정보다 빨리 시험을 치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학장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 듯 보였으나 이리나는 고요하게 “왜? 이유가 뭔데?”라고 되물었다. “제 형제가 곧 결혼식을 올립니다. 꼭 참석하고 싶어요”. 이리나는 갑자기 소리 내 웃더니 “너네는 대체 형제가 몇 명이니”라고 물었다.
알고 보니 많은 외국인 학생이 결혼식을 핑계로 정해진 일정보다 먼저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대학교 내에 두 명뿐인 한국인 중 한 명인 나도 연말에 이 소식을 들고 온 모습을 보니, 이리나 학장은 내 모습이 웃겼나 보다. 그러고는 약간 쌉쌀한 몇 마디를 더 하고, 그러면 잘 갔다 오라며 허락해 줬다. “저는 거짓말 안 해요. 사진 찍어 올게요.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함에 억울함을 살짝 발라 건넨 뒤 또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곧바로 등을 돌려, 5분 전보다는 넓어진 보폭으로 성큼성큼 학장실을 나갔다. ‘분명 수업 시간에 내 이름에 있는 ‘진’자는 ‘참 진(眞)’이라고 거짓말은 안 한다고 얘기했던 거 같은데…’, ‘이리나는 무슨 뜻이었더라, 아이린인 건 알겠는데’ 이름에 대해 생각하며 복도로 통하는 문에 다다랐을 때, 데스크에 앉아 있던 타찌야나도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리나 학장의 담당 과목은 국제 비즈니스다. 지난달 이리나 교수님이 수업 중에 칠판에 비친 막대그래프를 두들겼다. “이건 어떤 걸 보여주지?” 이리나는 학생들 말고 여전히 칠판을 쳐다보며 물었다. 강의실에는 학생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함부로 입술을 떼지 못했다. 빔프로젝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깨고, 이리나는 뒤돌아 어떤 국가가 이익을 얼마나 취하고 있는지, 무역 상위 10개 품목은 무엇인지 등등 학생들을 쳐다보며 설명했다. 마지막엔 “우리 과에서나 이 막대 보면서 이러지, 다른 학생들한테는 별 의미 없는 색칠 공부다”라고 덧붙였다. 갑자기 이리나는 내가 앉은 쪽으로 손끝을 내밀고 동양인 이름에는 제각각 뜻이 있다고 들었다며, 네 이름 뜻은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진실한 으뜸?”이라고 의역해 대답했고, 이리나는 의미가 좋다며 검지 손끝을 접고 엄지를 올렸다.
학장실 밖으로 나와서 의자에 눕혀 놓았던 패딩을 들어 입었다. 아까보다 가벼워진 듯한 패딩을 후다닥 몸에 두르고, 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을 찾아 뒤적였다. 학장실 안에서 힘주어 올렸던 입꼬리가 이번에는 알아서 귀를 향해 다가갔다. 핸드폰을 들어 올려 홈 버튼을 꾹 누르고 캘린더를 실행했다. 12월 21일에 ‘신동 결혼식 참석’을 학장실 문에 쓰인 글자보다 진하게 적었다. 연이어 카카오톡을 실행해 신동과 함께 있는 단체 카톡방에 들어갔다. 상단 공지 사항에는 신동의 모바일 청첩장이 떡하니 박혀있다. “크크크” 이번에는 미소가 아닌 웃음소리가 입안을 채웠다.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나 신동 결혼식 참석할 수 있게 됐다’라고 타이핑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장 모서리를 쳐다봤다. 말 안 하고 조용히 가는 게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채워놓은 글자를 모조리 지웠다.
2018년 12월 21일, 이리나 학장 덕분에 일정보다 빠르게 시험을 마친 나는 신동의 결혼식장에 알맞게 도착할 수 있었다. 결혼식장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한번 열렸을 때 저 멀리서 신동의 분주한 모습이 보였다. 이미 많은 사람과 악수하며 인사를 했는지 눈과 입에 힘이 어느 정도 풀린 모습이었다. 나는 신랑 한 명만 찾으면 되어서 쉽게 신동을 찾아냈지만, 반대로 신동은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는 위치여서 그런지 내가 가까이 다가갈 동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힘이 빠져있던 눈과 입은 순간적으로 힘을 받아 확장됐고, 그 입 밖으로 “뭐야, 이 새끼!”라는 말이 나왔다. 그 소리에, 주변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내가 왔다는 걸 인지했고, “크크크” 소리 내며 다 같이 웃었다.
결혼식이 시작하고,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행진 길을 신동이 한 걸음씩 채우고, 또 그의 아내가 한 걸음씩 채우다 보니 결혼식은 어느새 끝이 났다. 신동은 와준 친구들을 위해 식장 옆 가게에서 뒤풀이를 진행했고, 나를 일으켜 세우며 “러시아에서 온 친구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고 신동을 만났을 때, 신동이 아직도 자신은 “러시아에서 결혼식 축하하러 온 친구도 있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그걸 아직도 이야기하고 다닌다고?’ 싶었는데, 이리나 학장님이 했던 막대그래프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군가에 의미 없는 색칠 공부일 수 있는 그 막대가 누군가에겐 큰 의미를 가진 지표가 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신동의 결혼식은 신동이 생각하는 만큼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결혼식이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에 잠깐 귀국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동에게 먼 나라에서 누군가가 와줬다는 그 일은 좋은 기억을 쌓게 하는 일이었고, 결국 하나의 의미 있는 막대그래프가 됐다. 타인이 쌓게 될 막대그래프를 넘어서, 내가 그동안 잊고 있던 나만의 막대그래프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이리나 학장이 내 이름의 의미를 물었던 것처럼.
그럼 오늘의 에세이를 여기에서 줄입니다.
참고로 멀리서 날아갔기 때문에 축의금도 줄였습니다. 파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