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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황유원 - 하얀 사슴 연못

취급주의민트초코절임
02.16
·
조회 396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영혼을 어루만지는 고요한 사색의 쉼표 
풍요의 선율로 흐르는 순정한 시의 음표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아 한층 깊어진 서정으로 현대문학상과 김현문학패를 연거푸 수상하는 등 개성적인 시세계를 탄탄하게 굳힌 황유원 시인이 네 번째 시집 『하얀 사슴 연못』을 펴냈다. 

“가식 없이 절실한 시적 정황들이 주는 무게감”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첫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2015) 이래 꾸준하게 단단한 사유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감성적 언어가 고요한 음악이 되고, 감각적 이미지가 순백의 풍경이 되는 서정의 신세계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사물)을 순수한 관념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한국적 모더니즘의 고전 반열에 오른 정지용의 『백록담』(1941)을 시집 곳곳에서 오마주해 눈길을 끈다. 

8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이 깨끗한 연못의 풍광은 “내밀함 속으로, 그리고 사물을 끼고도는 원심력의 세계 속으로, 마침내 다시 고요 속으로의 왕복운동을 거듭해 온 어떤 마음이 오래 다녀온 거리의 산물”(조강석, 해설)로 읽히는바, 경이로운 순수와 무위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끌어당긴다. 

서정시의 맑고 투명한 진경이 매혹적인 이 시집에는 현대문학상 수상작이자 표제작 「하얀 사슴 연못」을 포함하여 55편의 시를 실었다.

 

목차


제1부 ㆍ 백지 위에 실황으로
백지상태
별들의 속삭임
낮눈
밤눈
천국행 눈사람
눈사람 신비
눈사태 연주
명동대성당
불광동성당
계산동성당
길음성당
리틀 드러머 보이
백색소음
썰매와 아들
맑은 종이

 

제2부 ㆍ 틴티나불리
거울 겨울
틴티나불리
대합실의 밤
신비한 로레토 교회
돌아가셨다는 말

빵의 맛
무언어
상선약수
언중유골
겨울 거울
Summa
유리잔 영혼

 

제3부 ㆍ 하얀 사슴 연못
사슴과 유리잔
흰 종이에 물로 1
하얀 사슴 연못
에릭 사티
흰 종이에 물로 2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거울 속의 거울
워터스톤
사슴벌레
아이스크림의 황제
에스컬레이터
평화 여백
사슴 머리 여인숙에서

 

제4부 ㆍ 볼륨은 제로가 적당합니다
켜진 불
포카라
아침
작은 종들
오토리버스
담배가게 성자
air supply
2D 마음
자명종
휴관
올해 가장 시적인 사건
에어플레인 모드
아르보 패르트 센터
Z치는 물결

 

해설|조강석
시인의 말

 


삼청동 카페 이층 창밖 빈 나뭇가지에
텅 빈 말벌집 하나 매달려 있었다
벌써 다 그친 줄 알았던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불고 있었고
말벌집은 그것이 매달린 가지의 흔들림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페에선 늘 음악이 들려오고 있고
음악이 들리면 뭔가 진행되는 것 같다
침묵이 침묵을 깨뜨리며 잠시
활동하는 것도 같다
(…)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새하얀 벌떼 같았지만
말벌집이 벌들이 들어가 쉬어야 할 집 같았지만
눈은 말벌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말벌집은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에 따라
흔들리고만 있었다
여름에 왔었다면 저게 저기 있는 줄 알 수
없었겠지 헐벗은 말벌집
안에 든 저 어두컴컴한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낮눈」 부분

 

눈사람에서 사람을 빼고 남은 눈이
녹고 있는 놀이터
사람이 없어질 거란 생각보다
사람이 없으면 눈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놀이터를 더욱 적막하게 만들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눈사람은 아무 미련 없다는 거
눈사람은 녹아가면서도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의 기억을 품고 있고
이번 생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어쩌면 그런 생각만이 영영 무구하다는 거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눈과 사람의 합산
오직 사람이 만들어낸 눈사람만이
천국에 간다는 거
-「천국행 눈사람」 부분

 

한밤중에 뜨거운 물 끼얹으면
좋은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사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기분인데
기분이 꼭 생각인 것만 같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분이 꼭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눈사람이 제 몸에 뜨거운 물 끼얹어
아래로 평등하게 고이게 된 물이
잘 정리된 생각인 것만 같다
오늘 밤 사라진 육체야말로
지상 최대의 생각인 것만 같아
생각은 육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애초에 육체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주가 느끼는 기분
생각을 잘 정리해놓고 죽어야지
-「눈사람 신비」 부분

 

초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번 뎅그렁,
내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늘 나의 존재는 종소리 울려 퍼지다 희미해지는 데까지

한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번 뎅그렁,
내면에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며
내일 나의 존재는 도자기잔 속으로부터 대기 중에 울려 퍼지다
대기와 뒤섞여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뜨거운 물과 오렌지 향이 나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와
나의 전신에 퍼져나가는 이 겨울

지금 차가운 창밖으로 고개 내밀어
네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가 나의 내면
추위로 얼굴 온통 얼어붙고
너의 흰 뼛속에 스민 추위가 스미고 스미다
희미해지는 데까지가 나의 전신
희미해지다 마는 곳 너머까지가 너의 영혼
-「틴티나불리」 부분

 

참 좋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돌아가고 나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거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어디로 돌아갔는진 모르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처럼 그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몇년 사이에만 해도 정말 다들
돌아가셨다는 거
말은 가끔 씨가 되고
돌아가시다,라는 말이 있어
우리 모두
돌아갈 곳 생긴다는 거
-「돌아가셨다는 말」 부분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

어인 일일까
백록담,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

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
-「하얀 사슴 연못」 부분

 

오늘 아침
가슴에 한쪽 손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사슴 뛰는 소리 들려온다면
그건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삶을 향해 마구 돌진하고 싶다는 뜻이고
삶의 푸른 풀을 마구 뜯어대고 싶다는 뜻인데

그렇게 사슴 다 뛰쳐나가버리고 나면

마침내 홀로 남겨진
텅 빈 가슴속
고요

그 고요의 한복판에서
오늘은 문득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사슴 머리 여인숙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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