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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우에하시 나호코 - 사슴의 왕

취급주의민트초코절임
02.02
·
조회 483

알 수 없는 전염병과의 싸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용기와 연대감 


장기화된 팬데믹에 지쳐 있는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가진 힘과 공포를 익히 잘 알고 있다.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 몸을 잠식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중증의 전염병은 동시에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일상을 앗아간다. 

병이 발생하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막막함은 그러나 절망과 슬픔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까지 앗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팬데믹 속에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을 봐왔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 하나의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전에 없는 생생한 자각을 통해 전염병이 퍼진 세계를 살아나갈 용기를 얻었다.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금, 더욱 생생하고 간절하게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작품이 바로 《사슴의 왕》이다. 

장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흡입력 있는 스토리와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구현은 그 자체로도 완벽한 판타지 소설로서 존재하게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을 인식하게 하는 힘은 《사슴의 왕》에만 존재한다 볼 수 있다. 


《사슴의 왕》에서 돋보이는 것은 바로 ‘묘사’의 힘이다.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간과 인물들의 행동 및 심리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굉장히 세밀하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가 써 내려가는 숲과 마을과 인물들, 그리고 벌어지는 사건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작가는 단순히 이야기만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 속 모든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도록 서술 방식에 공을 들인다. 

때문에 소설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한 편의 아름답고 웅장한 애니메이션처럼 재생되며, 이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는 동시에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슴의 왕》의 작가 우에하시 나호코는 소설가이자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작가는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이러한 경험은 소설 속에서 소수민족의 생활과 의식, 세계관의 설정 등에 현실성을 부여하면서 사실적인 판타지를 그려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인간의 몸속 세계와 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접근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생생한 판타지 세계
 

작가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실증적인 면을 강조하는 작가의 노력은 소설 속 사건들의 현실성을 극대화한다. 

특히 《사슴의 왕》 속에서 서술하고 있는 병소(病素)에 관한 설명, 전염병의 특성과 전이 과정, 인간의 몸속 세계에 대한 고찰 등은 작가의 세심한 주의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작가는 실제 의사인 사촌 오빠의 도움을 받으며 소설 내용을 검증한다. 

그뿐 아니라 여러 생물학 서적을 읽으면서 자신이 쓰고 있는 내용들에 대한 실증적 근거를 찾는 동시에,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묘사한다.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는 ‘흑랑열’이라는 전염병이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가상의 질병이 아닌, 현실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라고 여길 수 있게 된다. 

전 세계를 뒤흔든 전염병의 위험을 경험한 바 있는 지금의 독자들은 이세계(異世界)를 더욱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성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상처받은 자들의 몸부림과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


우리는 저마다 상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상실의 대상은 크기나 가치, 기간에 상관없이 모두 우리들 가슴속에 상처를 남긴다. 

이때 생긴 상처는 잊고 있다가도 순간순간 떠오르고, 그때마다 우리는 상실한 대상과 그것이 있던, 지금은 비어 있는 공백을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 공백이 사라지거나(사라졌다고 믿거나)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 전까지는 계속 괴로울 수밖에 없다.


《사슴의 왕》을 이끌어가는 주체들도 무언가를 상실한 상처받은 자들이다. 

누구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누구는 부모와 형제를 잃었으며, 누구는 고향과 나라를 잃었고, 개중에는 이 모든 것을 다 잃은 자도 있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과 좌절은 비단 소설 속 세상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느꼈고, 느끼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각각의 등장인물의 행동에 쉽게 몰입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결코 낯설다거나 남의 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때로는 파괴적이고, 과격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그들의 감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그래서 우리는 더욱 그들에게 애정을 갖으며 빠져들게 된다.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바로 등장인물 ‘반’과 ‘유나’, ‘사에’ 세 사람의 관계다. 

상당히 이질적인 인물들이 각별한 관계로 변모해 가는 과정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반과 유나는 죽음의 시간을 견디며 함께 살아남은 ‘동지 관계’며, 반과 사에는 ‘쫓고 쫓기는 관계’다. 

그리고 남남인 유나와 사에는 여러 사건을 함께하면서 ‘모녀 관계’ 이상으로 친밀해진다. 

공통적으로 소중한 것을 상실한 ‘상처받은 자’인 세 사람은 함께하는 동안 혈연보다 더 끈끈한 관계를, 이를테면 ‘가족’과도 같은 관계를 형성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작가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는데, 이 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도식화된 가족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직시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운명공동체’와 같다는 것이다. 

죽은 아내와 아이를 향한 그리움과 마주하면서 유나를 딸로서 대하는 반과 언제나 그와 찰싹 붙어 있으려 하는 유나,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자석에 이끌리듯 함께하는 사에. 

이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가족’은 ‘타인과의 연결’이 더욱 절실해진 지금의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하면서 각자가 품고 있는 상실로 인한 상처를 내려놓게 한다.


《사슴의 왕》은 상ㆍ하권으로 구성되어 긴 호흡을 가지지만 결코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가의 세밀한 묘사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구성, 적재적소에서 터지는 유머가 마지막 책장까지 넘겨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가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허구적 상상력에만 기댄 익숙한 판타지 소설이 아닌, 잘 짜인 영화 같은 새로운 판타지 소설로 탄생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전혀 새로운, 진정한 판타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주요 등장인물 8
찬란한 잎사귀의 알 13

제1장: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1. 검은 짐승의 습격 19 | 2. 만남 33 | 3. 부뚜막 속의 아이 45 | 4. 다시 광산 밖으로 53 | 5. 안개 속의 퓨이카 65 | 6. 사랑의 의식 75

제2장: 전설 속의 끔찍한 병
1. 마신의 반려 87 | 2. 소금광산 안으로 114 | 3. 병의 내력 133 | 4. 지하수 152 | 5. 모르파 마을 161 | 6. 추적 173 | 7. 눈 속으로 사라지다 186

제3장: 순록의 마을에서
1. 겨울나기 199 | 2. 모호키 210 |3. 유나 222| 4. 초여름의 숲속에서 232 | 5. 여름의 빛 242 | 6.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금빛 252

제4장: 다시 불어오는 죽음의 숨결
1. 평화로운 매사냥 261 | 2. 검은 개들의 습격 273 | 3. 두 가지 의술 289 | 4. 아카파 왕의 처소에서 301 | 5. 발병 311 | 6. 질병과의 전쟁 323 | 7. 신약 336 | 8. 과민반응 343 | 9. 아카파의 저주 359

제5장: 눈앞에 다가온 위기
1. 들불처럼 번지는 소문 373 | 2. 반의 변화 381 | 3. 큰까마귀 396 | 4. ‘젖은 날개’를 가진 사자 406 | 5. 탕 속의 여인 423 | 6. 메아리의 주인 435 | 7. 뒤에는 내 아이 448 | 8. 불화살, 어둠을 가르다 457

제6장: 감춰진 진실을 찾아서
1. 계모와 이복누이 469 | 2. 토마소르 478 | 3. 심부의 우두머리 488 | 4. 이주지의 겨울 512 | 5. 독보리 524 | 6. 마코우칸의 고향 536

 

주요 등장인물 8

제7장: 개의 왕
1. 품어주는 여인 13 | 2. 유나를 쫓아서 21 | 3. 오판 29 | 4. 설원의 아파르 39 | 5. 신의 목소리 47 | 6. 꿈속의 방문자 56 | 7. 개의 왕 64

제8장: 변경의 민족들
1. 배후에 있던 자 75 | 2. 수비대의 불 85 | 3. ‘유스라 오마’의 고향 97 | 4. 퓨이카 ‘오라하’ 108 | 5. 자카토 기습 118 | 6. 여인을 구하다 128 | 7. 초승달과 뿔 140 | 8. 석화 부대 155

제9장: 이키미의 빛
1. 아파르의 무덤 167 | 2. 유스라 오마의 장로 180 | 3. 낫카 195 | 4. 미라르의 발병 204 | 5. 기묘한 남자 212 | 6. 늑대의 눈 222

제10장: 사람 속의 숲
1. 반과 훗사르 231 | 2. 병과 면역 247 | 3. 여우는 날뛰어도, 퓨이카는 잠든다 257 | 4. 생명 속에 숨어 있는 죽음 275 | 5. 세 사람의 여행 291

제11장: 속임수
1. 수많은 거미집 305 | 2. 스옷르와의 재회 315 | 3. 뒤바뀐 늑대 325 | 4. 가족 339 | 5. ‘킴마의 개’의 냄새 356 | 6. 토마소르와 시칸 366 | 7. 비 내리는 거리의 추적 375 | 8. 옥안내방 387 | 9. 아버지의 말씀 403 | 10. 잊고 있던 것 417 | 11. 끔찍한 가능성 425 | 12. 춤추는 사슴이여 434

제12장: 사슴의 왕
1. 끈을 조종하는 자 445 | 2. 오타와르 의술의 미래 451 | 3. 의술사의 무기 460 | 4. 저녁노을 빛 466 | 5. 감이 뛰어난 아이 476 | 6. 오크바 주목을 가진 자를 무찌르라 483 | 7. 머나먼 들판으로 493 | 8. 어우러져 가는 사람들 501

초록의 빛 513
작가 후기 518 | 역자 후기 523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병마의 씨앗을 몸속에 숨기고 살아간단다. 그것에 지지 않으면 계속 살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할아버지는 한숨 쉬듯 말했다.
“모두, 그렇단다.” p.15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날 밤 이후의 변화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두려운데, 몸속에서는 기묘한 쾌감이 펄떡인다. 근질근질한 열기가 피부로 퍼져나간다.
얇은 막이 한 꺼풀, 벗겨질 것만 같다.
이것이 벗겨지면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나비가 젖은 날개를 활짝 펼치듯이, 아름답고 새로운 자신이 고개를 내미는 게 아닐까……. p.77

 

“이 병은 과거에 육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저의 고국, 고대 오타와르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이 역병입니다.” 요타르의 얼굴이 밀랍처럼 새하얘졌다.
“……약은?”
요타르의 힘없는 질문에 홋사르는 고개를 저었다. p.105

 

유령이 무서운 이유는 붙잡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잖아? 유령에게 몸이 있고 붙잡을 수 있다면 분명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겠지. 병도 마찬가지야. 실체를 붙잡을 수 있다면 대처할 방법도 찾을 수 있어. p.135

 

병에 걸려 죽는 자도 있고 사는 자도 있다고 했지만, 아직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병은 나라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의술사입니다. 병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살아가겠다고 맹세한 몸입니다. p.151

 

오래 살 수 있는 생명과 이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생명.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 어린 아들이 어째서 그렇게 허망하게 떠났어야 했나. 병은 어째서 그 아이와 아내를 선택했나…….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부조리한 이 세상에 숨 막히는 분노를 느꼈다.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가슴을 후비는 분노 와 슬픔은 죽는 날까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배 속이 뻥 뚫린 듯한 이 허무함도. p.250

 

성을 지키는 병사만 해도 파수병, 궁병, 공병이 있듯 저희 몸속에는 다양한 역할을 맡은 병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병소 역시 그것이 독인지, 독이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는 형태를 띠고 있는 건 아닙니다. 처음 보는 상대가 적인지 아닌지 구분하기란 어렵지 않습니까? 때문에 몸속에 처음 들어오는 병소의 경우, 그것이 적이라는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적에 대처할 수 있는 무기를 병사들에게 주어 싸움에 임하게 해야 합니다.”
요타르가 신음했다.
“그렇군요. 다시 말해 독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혼쭐을 내서 저항할 힘을 빼앗은 적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이 녀석이 적이다, 하고 병사들에게 알리는 과정입니까?”
“그렇습니다.”
홋사르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p.290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하염없이 움직이는 육체. 감정을 느끼고 사고하는 자신과 별개의 생물인 것처럼, 그 가 잠든 사이에도 하염없이 움직이는 조직…….
깊은 잠에 빠진 소년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의 육체는 지금 목숨을 붙잡아두기 위한 필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다.
육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p.337~338

 

흐르는 눈물도 닦지 않은 채, 반은 흐느껴 울었다. 오랫동안 울고 싶었다.
정처 없는 비탄 속을 하염없이 걸어왔다. 타향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음속에서 가족과 살던 고향에의 갈망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나뭇가지에서 떨어져버린 잎이다. 흐르고 흘러서 마침내 대해(大海)로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그걸 알면서도 비탄과 갈망은 사라질 줄 모른다. p.70

 

굳이 생각할 새도 없이 감각이 돌아와 반은 적당한 발판을 반사적으로 찾아내면서 달려가는 오라하의 움직임에 맞추어 섬세하게 체중을 이동시키며 오라하를 몰았다.
바로 이거다. 이 속도, 이 소리, 이 진동. 이 모든 것을 사랑해왔다.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게 뿔을 뒤로 젖힌 퓨이카의 양쪽 뿔 사이에 턱을 대자 그의 시야가 퓨이카의 시야와 하나가 되었다.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냄새를 맡고, 함께 바람을 맞으며 한 몸이 되어 달려간다. p.113

 

사람의 몸 안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생물이 살고 있고, 그것들이 보금자리인 인간의 육체를 존재하게 한다는 사실은 ‘제국을 살리고, 스스로도 살라’라는 표어를 가슴속 지침으로 삼아온 오타와르 인들에게는 실로 유쾌한 발견이었다.
나라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타와르 인들은 미세한 생물처럼 여러 나라에 파고들고, 흩어져, 그 나라들을 풍요롭게 살려왔다. p.170~171

 

“어째서 병에 걸리고, 또 병이 낫는지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네. 하지만 우리는 그 인과의 단서를 찾아내는 걸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걸세. 거기에는 반드시 알아낼 수 있는 뭔가가 있으니까.” p.249~250

 

밋밋하게 생긴 츠오르 청년들, 북방 오키 민족의 청년들…… 지금까지의 삶 속에서는 거의 인연이 없는 아득한 타인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를 지금 이렇게 걸어 다니고 있다. 그리고 서로 미소를 나누고 있다.
등을 붙잡아주는 키야의 도움을 받아 울타리로 기어 올라가 바, 바, 하고 손을 흔드는 유나의 함박웃음, 키야의 푸근한 미소, 토마와 모키 일행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아, 가족이 저기 있구나. p.389

 

오판은 병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병은 신과 비슷한 얼굴을 갖고 있다. 언제 걸리는지도, 어째서 걸리는지도 알 수 없고, 살아나지 못하는 자와 살아나는 자의 경계도 확실치 않은, 마치 제 손에서 멀리 떠난 일종의 신의 손바닥에 그려진 운명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초연히 받아들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발버둥 치는 일이야말로 ‘생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p.440

 

육체는 스스로 죽어 사라지는 부분이 있어야 비로소 지금의 이런 형태를 이룬다. 생물의 몸에는 그 생명이 시작된 순간부터 삶뿐 아니라 죽음 역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p.473

 

자신의 몸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무언가가 병과 싸우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지탱해주고 있다고 생각하자 뭔가 엄청난 것이 그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 기분이었다. p.255

 

육체도, 나라도 한 덩어리의 존재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잡다한 작은 생명이 한데 모여 각각의 삶을 살면서 어느덧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의 커다란 생명을 이어주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태초에 신들이 그 손가락으로 자아냈을 그런 거대한 섭리 속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또 사라져간다. p.390

 

“적 앞에 홀로 뛰쳐나가 도발하는 사슴은 하늘로부터 그럴 수 있는 몸과 마음을 받은 사슴이다. 재능이란 잔혹한 것이다. 때로는 그 것을 가진 자를 사지로 내몬다. 그런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천수를 누렸을 텐데, 얼마나 가련한 녀석이냐. 그렇게 말씀하셨어.” p.415

 

“우리는 몸속에 무수한 생명을 키우고 있다네. 아니, 키운다는 표현은 좋지 않군. 무수히 많은 작은 생명들이 살고 있고, 그것이 모 여서 사람을 이루는 걸 게야. 숲이라고 말한 건 그런 뜻이라네. 숲 속에는 짐승도 있고 벌레도 있지. 풀도 나고 이끼도 나고, 새도 있어. 숲속에 있는 무수한 생명들은 때로 나쁜 짓도 한다네. 벌레가 먹으면 나무는 죽지. 하지만 숲에는 새도 있어서 벌레를 잡아먹어 주고, 배설물은 비옥한 흙을 만들어주잖나……. 그런 식으로 많은 생명들이 살고, 그렇게 ‘숲’이 살아 있는 것 아니겠나?” p.447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병마의 씨앗을 몸속에 숨기고 살아간다.’ 생명 속에는 반드시 죽음이 숨어 있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가녀린 생명의 끈이 끊어 지지 않도록 열심히 이어붙이면서.’
태어나서 사라지는 순간까지의 시간을 슬픔과 기쁨으로 채워가 면서. 때로 타인에게 손을 뻗고, 때로는 자신도 타인의 따스한 손길 에 구원을 받으며 생명의 끈을 자아내는 것이다.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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