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이윤주 - 고쳐 쓰는 마음

우울이 가르쳐준 작고 소중한 삶의 풍경들과
다친 영혼을 수선하는 나긋한 마음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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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윤주 작가 3년 만의 신작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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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면 진짜로 살아보고 싶어진다. 책 속에 존재하는 뜨거운 불이 내 안으로 옮겨붙는 기분이 든다. _안희연(시인)
조용한 내향인의 자기 돌봄 이야기인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윤주 작가가 3년 만의 신작 산문 《고쳐 쓰는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사이의 시간 동안 작가는, 중증 우울증을 진단받고 직장을 그만둔 채, 집 안에서, 정신병동에서, 동생네 집에서, 이국의 거리와 친근한 동네에서 오롯이 ‘나’를 되찾기 위한 생활에 집중한다.
《고쳐 쓰는 마음》은 우울증 치료를 계기로 삶의 벼랑에서 겨우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 한 생활인의 조용한 기록이자, 안전한 회복기, 그리고 우울과 함께 살며 읽고 쓰고 본 것들에 대한 ‘마음 일기’다.
총 4개의 부로 나뉜 50개의 글을 통해 작가는 우울증을 겪고 회복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섬세한 필치로 담아낸다.
다만, 전작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가 쓰는 시간 속에서 마음을 회복하는 이야기였다면, 《고쳐 쓰는 마음》에서는 ‘고쳐 쓰는 마음’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고쳐 쓰는 일이 만만하진 않다. 고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마음을 고치는 도중에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_본문에서
작가는 우울증으로 인한 깊은 절망과 직장 생활의 중단, 그리고 그 후의 회복 과정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낸다.
추천사를 쓴 안희연 시인은 이 책이 “이토록 솔직해도 되는 걸까 싶게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극도로 정확한 관점에서 자기 문제의 핵심을 짚어낸다”고 말한다.
사과 먹기, 산책하기, 노을 보기 등 일상의 순간들에서 발견되는 삶의 작은 조각들은 모두 다친 나를 수선하는 마음의 문장들로 섬세하게 포착된다.
나이 듦에 대한 성찰, 가족에 대한 진솔함, 사랑에 대한 고찰 등 인생의 여러 갈림길을 따라 작가는 다양하게 발자국을 옮긴다.
작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문체와 위트 있으면서도 다정한 표현들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우울’과 ‘회복’이라는 주제를 마음 편하게 읽게 해준다.
그렇기에 《고쳐 쓰는 마음》은 과거에 우울증을 겪었거나 지금 우울증을 겪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새로운 내일을 선물할 것이다.
1부 그냥 하는 마음
마흔의 문턱에서 맞이한 우울증의 폭풍.
작가는 봄꽃이 지는 계절에, 자신의 삶도 함께 시들어가는 듯했던 순간을 담담히 풀어낸다.
“모든 것, 그야말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다니던 직장, 가꾸었던 관계, 반복되던 일상, 계획한 일들, 누리고 느끼던 감정들, 생을 떠받치는 크고 작은 의지 전부가.
걸려 넘어지다, 라는 표현은 그럴 때 쓰는 것임을 경험했다.
40대의 문턱에 나는 완전히 걸려 넘어졌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삶의 밑바닥을 치는 순간의 고통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고통 속에서도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떠받치는 ‘사과’ 같은 소소한 일상의 요정을 발견한다.
차갑고 아삭한 사과의 맛은 무감각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우울의 아침에서 작가를 구원한다.
2부 삶 쪽으로
‘청수사’ 글에서 작가는 자신의 우울증 경험을 교토 여행과 교차시키며,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중얼거린 “아, 좋다”라는 문장은 “生きてて良かった(살아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주문이 된다.
남편과의 일상을 그린 ‘우리가 깜빡 생을 잊는 동안’ 글에서는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서만 발견되는 사랑의 순간을 들여다본다.
술에 취해 곤히 잠든 남편의 얼굴에서 “잠든 사람 곁에서는 잠들지 않은 사람도 순해진다”는 작은 깨달음도 얻는다.
이처럼 작가는 우울증으로 인해 흐려졌던 일상의 의미를 점차 다시 되찾아간다.
3부 우울할 때 쓰는 사람
3부에서는 작가의 세심한 관찰과 사색이 돋보인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 글에서는 낯선 이(노인)와의 예상치 못한 교류를 통해 우리의 선입견과, 작은 친절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사랑은 듣기’ 글에서는 사랑과 경청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듣기의 가치와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잘 들으려면 따라서 용기가 필요하다.”
“선을 넘을 용기”가.
4부 사랑의 얼굴
마지막 4부에서는 사랑, 관계, 그리고 자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생각을 느낄 수 있다.
‘이름을 닮은 사람’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사랑의 얼굴들을 찬찬히 떠올린다.
마지막 글인 ‘고유한 불행’에서 작가는 “‘우리’가 그저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하게 묶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각자가 가진 고유한 상처와 아픔이 오히려 그 사람을 더욱 빛나게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다친 마음을 버리지 않고, 나 몰라라 하지 않고, ‘고쳐 쓰자’고 말이다.
우리가 지나온 불행이 가르쳐주는 것들
《고쳐 쓰는 마음》에 있는 모든 글이 빛나지만 그중에서도 정신병동에서의 일화를 그린 ‘안 좋은 꿈은 아니고 슬픈 꿈’ 꼭지는 단연 돋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취약해진 순간으로 글의 장소를 옮기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가장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정신병동’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내면세계를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한다.
마치 잔잔한 호수 위를 걷는 것처럼 차분한 문장들은 “슬픈 일이 꼭 안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배우려고 여기에 왔다”에 이르러서 그 밑에 잠겨 있는 깊은 감정의 물결을 꺼내 보여준다.
단편소설의 주인공들 같은 다양한 정신병동의 인물들을 보며 우리는 때로는 무거워지고, 때로는 미소를 지으며, 삶의 다양한 복잡성의 층위를 엿보게 된다.
추천의 말
원고를 읽으며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놀랐다.
그건 작가가 이토록 솔직해도 되는 걸까 싶게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극도로 정확한 관점에서 자기 문제의 핵심을 짚어낸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흔을 통과하며 작가에게 찾아온 극심한 우울은 그를 걸려 넘어지게 만든 돌부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것은 돌부리가 아니라 인생의 행로를 다시 설정하게 하는 도움닫기 판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통과해 온 우울의 터널은 그만의 특수성과 고유성에 기반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작가만의 것을 넘어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삶과 엇박이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누구나 “어린 존재” 하나쯤 감추고 사니까.
그럴 때, 우울을 미화하지도 냉소하지도 않는 작가의 태도를 기억하며 “내일을 믿고 기대하고 감당하는 쪽으로” 한발 한발 따라간다면 우리도 우리 각자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진짜로 살아보고 싶어진다.
책 속에 존재하는 뜨거운 불이 내 안으로 옮겨붙는 기분이 든다.
힐링이라는 말이 지겨운가.
적당히 따뜻한 것 말고 뜨거운 이야기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펼치시기를.
그리하여 당신이 삶의 질서를 재편하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생생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안희연(시인)
차례
서문 • 5
1부 그냥 하는 마음
마흔, 멈춤 • 17
사과의 요정 • 22
만만 • 25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가지 • 29
벽 너머에 사람이 있음 • 34
노을을 빼먹지 않으면 • 38
오억만 • 42
이름을 몰라야 사탕인 경우 • 46
그래도 힘내요 • 50
2부 삶 쪽으로
청수사 • 57
안 좋은 꿈은 아니고 슬픈 꿈 • 61
우리가 깜빡 생을 잊는 동안 • 66
돌아올게 • 70
엄마의 과거 • 71
두 고모 • 76
너의 동쪽 뺨 • 81
끙끙대기 방 • 85
달의 기분 • 90
1년 뒤의 비행기 티켓 • 94
기운을 팔아요 • 98
내 마음속에 당신이 있는 한 • 104
걱정은 선반 위에 • 108
3부 우울할 때 쓰는 사람
디지털미디어시티역 • 115
몇 가지 거짓말 • 119
쿤 • 124
빨간 코트 • 129
사랑 이야기 모임 • 134
사랑은 듣기 • 138
아이들은 언젠가 춤을 춘답니다 • 142
저녁의 시선 • 146
거기서 거기 • 148
봄은 고요하지 않다 • 150
은밀한 열광자 • 151
일기들 • 155
쑥스러워서 • 160
그 사람이 혼자 울던 밤 • 162
고독한 미식가 • 167
4부 사랑의 얼굴
개구리 놀이터 • 175
기나긴 화목을 견디는 방법 • 179
상실감 • 185
머리 땋기 • 190
이름을 닮은 사람 • 195
제이의 비행 • 199
촛불 같은 이웃 • 204
두고 온 편지 • 208
바다에 채찍질하지 않기 • 212
초대 없는 행사 • 217
한바탕 꿈이라면 • 221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 226
고유한 불행 • 230
고쳐 쓰는 일이 만만하진 않다. 고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마음을 고치는 도중에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그 풍경을 굳이 봐야 하나. 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우니까. 어떤 아름다움은 고통을 지불했을 때만 찾아오니까. 물론 적당한 고통이어야 할 것이다. 너무 큰 고통은 아름다움을 느낄 힘마저 빼앗아 버린다. 마음이 너무 크게 해지기 전에 미리미리 고쳐두는 일이 그래서 필요한 것 같다.
6~7쪽
돌아보면 이 시절 또한 찬란히 젊었구나 할 것을 알면서, 30대가 끝난 뒤 나이 듦에 대한 감각 때문에 종종 침울해진다. 얼굴의 주름이나 늘어가는 군살 따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40대라는 숫자가 주는 압력에 짓눌릴 때가 있다. 사십이라니.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는데 사십이라니. 무얼 상상하든 그와는 다른 것을 주는 인생의 법칙에 걸맞게 나의 마흔 또한 뜻밖의 형태로 다가왔다.
봄꽃이 지고 더위가 찾아올 무렵 중증 우울 에피소드가 시작됐다. 모든 것, 그야말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다니던 직장, 가꾸었던 관계, 반복되던 일상, 계획한 일들, 누리고 느끼던 감정들, 생을 떠받치는 크고 작은 의지 전부가. 걸려 넘어지다, 라는 표현은 그럴 때 쓰는 것임을 경험했다. 40대의 문턱에 나는 완전히 걸려 넘어졌다.
17쪽
겨우내 모든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맨몸을 드러낸 채 서 있던 나무들처럼.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돌아온 계절만큼 늙어 있긴 하지만. 직장도 없고 갈 데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사람은 원래 생의 절반쯤에서 길을 잃곤 한다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더라도. 중요한 건, 늦었음에도 그냥 하는 마음.
21쪽
요즘 나의 별명은 ‘오억만’이다. 딱 5억만 있으면 좋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말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다’는 게 핵심이다. 1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이 말썽일 때마다 중얼거린다. “오억만 있었어도 노트북 당장 바꿀 텐데.” 반려동물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오억만 있으면 좋겠다, 고양이 키우게” 하고, 주방에서 대파를 어슷어슷 썰다가 문득 허리를 펴고 “오 이런, 오늘도 오억이 없네” 한다.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지중해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듣고는 “오억이 생기면 나도 이탈리아에 갈 거야” 대꾸한다. 단골 국숫집이 가격을 2000원이나 올린 것을 알고 시름에 잠겼을 때도 탄식한다. “아 진짜, 내가 오억만 있었어도…….”
42쪽
밤이 오래 흐른 뒤 다시 만만을 만났다. 내게 바짝 몸을 붙인, 정말 오랜만에 나타난 나의 만만은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문장들을 주었다. 진짜 아름다운 문장은 ‘아름다운’ 형태로 나타나기보다는 이런 식이다. “네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파국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작가는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인다고 했다. 참혹하도록 용감한 문장이 한쪽 날개가 되어주었다. 이쪽 만만과 저쪽 만만의 날개가 동시에 허공을 내리치는 순간.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편집자가 아닌 나를 승인하고 만만과의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28쪽
리베카 솔닛은 그의 책에서 캘리포니아 중북부 원주민인 윈투족의 언어를 소개한다. 윈투족의 언어에는 ‘오른팔’이라든가 ‘왼쪽 다리’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가리킬 때 오른쪽/왼쪽 개념 대신, 동서남북 방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윈투족이 산을 오를 때 모기가 그의 ‘서쪽’ 팔을 물었다면, 산을 내려올 때 그는 ‘동쪽’ 팔을 긁게 된다. 윈투족의 세계에서는 ‘나’가 기준이 되지 않는다. 고정된 것은 세상이며 자신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 한때의 것, 곁딸린 것이다. 윈투족은 길 잃을 일이 없다. 관계 맺을 세상이 있는 한. 지평선과 산등성, 해와 별, 숲과 강이 있는 한.
82-83쪽
또 이런 건 어떨까. 이번 주에 책에서 읽은, 진실보다 좋은 거짓말. 한 할머니가 일흔여덟에 노인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나이 되도록 한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게 부끄러워서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일흔다섯이라고.
그 거짓말은 오래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123쪽
올겨울 서울엔 눈이 잦다. 눈이 오면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 하늘이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는 듯.
129쪽
하지만 세상에는, 세상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들어야만 세상의 가혹함을 겨우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욕망하고, 유혹하고, 이해하고, 만지고, 가여워하고,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일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긴다. 그게 철없는 일이라면 이들은 철없는 게 맞다. 하지만 사시사철 철든 인간이란, 얼마나 지루한가.
135-136쪽
옛날 옛날 어느 봄의 한가운데. 직장에서 몇몇이 모여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격하고 일 잘하기로 유명했던, 속으로 많이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내겐 너무 까마득히 높아 보였던 한 선배가 말했다.
“나는 봄이 되면 벚꽃 만개한 밤길을, 눈부시게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걷고 싶어져.”
어제저녁에 뭐 먹었는지 말고는 다른 얘기 하는 거 아니라는 ‘직장 동료’ 사이. 어떤 욕망은 봄 햇살 속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웃으며 핀잔하는 사람들. 복잡한 의미의 탄식들. 어머머, 알고 보니 위험한 분이셨어!
선배는 웃지 않고 덧붙였다.
“나란히 걷고 싶다는 거지, 내가 뭐 지금 가정을 뒤집어엎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 주말 벚꽃이 만개했다. 고작 사나흘 정도를 위해 맹렬히 튀어 오르는 우주의 팝콘.150쪽
마흔의 어느 날, 나는 간절히 위로를 얻고 싶었고 그 위로를 책에서 구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나 음악이나 그림에서도 구하기 싫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수많은 청중 가운데 하나가 되어 내게 위로를 건네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었고 그런 위로가 힐링이라면 그걸 힐링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힐링을 원하는 나의 마음에 판관을 세우고 싶지 않았고 다만 힐링으로써 마음에 링거를 놓고 싶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그런 날도 있었다.
193쪽
남들 하는 불행은 해봐야 한다는 E선배의 단점은 가끔씩 다리를 떤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그 정도는,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고유함으로 단련해 온 인간에게 허용되는 수준의 흠일 것이다. 내 친구 P가 약속 시간에 자주 늦는 것, S가 유난히 입이 험한 것, H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종종 잊는 것도. 그들이 자기 인생의 무겁고 유일한 과제를 해나가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흠들을 나는 어느 순간, 기꺼이 양해하게 된다. 당신의 흠을 쉽게 흉볼 수 없게 된다. 당신을 잘 알지 못하는 만큼 당신에게 너그러워진다. 내가 지나온 우울, 또는 불행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232-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