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를 산 지 꽤 오래됐는데 읽기를 미루기만 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챕터별로 나누어 보름 동안 읽어보았다. 

  이 책을 완독하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은 『종의 기원』을 완독한 후 얻은 생물학적 배경지식이었다. 다윈주의를 기반으로 서술된 이 책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집단이나 개체가 아닌 ‘유전자’임을 강조한다. 생물학적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도킨스의 주장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흐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더 많은 생물학적 지식을 갖추고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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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던 인간중심적 사고를 반성하게 만든다. 인간 역시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이라는 법칙 아래 존재하며, 유전자를 미래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설계된 하나의 생존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선택한다고 믿지만, 이러한 믿음조차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생존 전략일 수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인간 존재에 대한 겸손과 성찰을 요구한다. 거대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 인간은 그저 또 하나의 생명체일 뿐임을 다시금 인지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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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킨스는 인간의 주관적 의식이 유전자가 프로그래밍한 컴퓨터인 뇌의 시뮬레이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시뮬레이션이 자체 모형을 포함할 정도로 정교해졌을 때, 의식이라는 진화의 정점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그들의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의 정점’이라는 설명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인간만 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단언하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지구의 생명체와 그에 대한 진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의 의식이 진정으로 유전자의 명령에서 자유로운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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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유전자 관점의 진화론을 설명하면서 유전자가 왜 자연선택의 단위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개체나 집단은 선택의 단위가 될 수 없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특히 개미와 벌과 같은 사회적 곤충의 생태에 대한 내용은 기억에 남는다. 그들의 유전적 메커니즘은 그들이 왜 사회적 곤충으로 살도록 설계되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또한 기생생물에 관한 사례는 새롭게 다가왔다. 기생생물의 생존 전략에 따라 숙주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때로는 공생하며 진화적으로 통합되는 과정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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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자연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다룬 게임이론과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SS,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일 것이다. 이를 통해 이기적인 유전자, 즉 생존(번식)만을 목표로 하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인 우리(모든 생명체)가 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결국 이타적 행위도 이기적 목적(생존)을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혈연 관계에 있는 개체에게 좀 더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지, 그리고 유전적 근연도가 멀어도 주변 개체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지(TFT, tit-for-tat) 등에 대한 논의는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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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점은 두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제3자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문을 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7장 가족계획, 8장 세대 간 전쟁, 9장 암수 전쟁의 내용은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가정, 연애, 결혼 등의 사례를 떠올리게 했고, 이를 생물학적으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한, 11장에서 논의된 밈이라는 새로운 자기복제자에 대한 내용은 매우 참신했다. 다만 밈의 근거로 든 종교, 맹신, 독신주의 같은 사례는 나에게는 다소 추상적이고 애매하게 느껴졌다. 개념은 흥미로웠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밈을 설명하는 데 충분히 명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전자가 마치 의도가 있는 것처럼 표현된 것이 단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비유일 뿐 실제로 유전자에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밈도 마찬가지로 의도가 없겠지만, 인간의 뇌를 거치는 복제자라는 점에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유전자보다 훨씬 애매하게 다가왔다.

  다음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우리 몸에 존재하는 유전자, 즉 DNA의 존재는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 뇌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뇌조차 유전자가 개발한 컴퓨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살짝 충격을 받았다. 이후로는 생명체가 살아서 활동하는 모든 것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에 경중이 없다”는 가르침은 어쩌면 모든 생명체의 조상(원시 수프 속 유전자들)이 같다는 것을 알고 나온 말이 아닐까 하는 허황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진정한 수행을 하고 싶다면 과학을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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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염색체를 한 권의 책으로, 유전자(DNA)를 각 권의 페이지로 비유했다. 이 비유는 처음에는 잘 와닿지 않았지만, 책의 에필로그에서 언급된 ‘죽은 자의 유전자 책’ 부분을 보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도킨스는 "생명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단지 이타성이나 이기성의 진화를 밝힐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과거 또한 밝힐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생명의 유전자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과거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역사서와 같다. 유전자는 단순한 생명체의 설계도가 아니라, 오랜 진화의 흔적과 우리 조상들의 선택을 담고 있는 기록물인 것이다. 유전자라는 책 속에는 단순한 생존과 번식의 원리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 생명체의 기원,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자연의 메시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연구가 앞으로 어떤 놀라운 과거를 밝혀낼지 기대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러한 발견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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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으로, 리처드 도킨스는 마지막 장에서 자신의 역작인 『확장된 표현형』을 언급하며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이기적 유전자』가 새로운 시각과 지식을 열어준 만큼, 『확장된 표현형』도 그 이상을 기대하게 만든다.

(원래는 『코스모스』까지 읽으려 했지만, 이 책이라도 완독하고 후기를 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