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쇼펜하우어 소품집)
송년회가 엎어진 덕에 사놓고 미루던 책을 읽었습니다.
춥고 뒤숭숭한 연말에 조용한 시간 보내서 좋았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행복’과 ‘인생’에 대해, 저서 “소품과 부록” 중 소품집을 그대로 옮긴 책입니다.
건강, 체력, 아름다움, 기질과 성정, 도덕적 특성, 지능 등 개인의 본질,
재산과 물질의 형태로 인식하는 개인의 소유물,
타인이 보는 나, 타인의 시선으로 내가 인식하는 허울, 명예, 지위, 평판 등 개인의 외면,
이 세 가지 분류로 인간 삶의 저변을 규정하고, 그 중 행복한 인생에 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고하며 풀어나가는 내용입니다.
추천을 담아, 아래 목차에 각 장의 내용을 암시할 만한 문구(다소 편집)를 더해서 소개합니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박제헌 옮김 / 페이지2북스
서문
Ⅰ. 기본 분류
인간은 무엇으로 분류되는가
…인생도 이와 같다. 지위와 재산이 개인적 역할에 차이를 만들지만, 그 역할이 내적인 행복이나 즐거움을 좌우하진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이면에는 고통과 빈곤에 시달리는 가여운 인간이 숨어있다.
…대다수 사람은 우리의 소유물이나 외면에 따라 결정되는 운명만을 고려하는 데 그친다. 물론 (그) 운명은 나아질 수 있다. 한편 내면이 풍요로운 자는 바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멍청이는 끝까지 멍청이로, 바보는 끝까지 바보로 남는다.
Ⅱ. 개인의 본질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자질을 이미 타고났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일은 인격의 색채를 덧입히고 있다.
…그러므로 고상한 성격과 뛰어난 지능, 낙천적 기질과 쾌활한 마음, 강인하고 튼튼한 몸, 즉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자신의 건강을 제물 삼아 이득, 승진, 지식, 명예 나아가 성적 충동과 순간의 향락을 맞바꾸는 짓은 어리석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에게 줘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많을수록, 향락의 원천을 자신 안에서 찾을수록 행복해진다.
Ⅲ. 개인의 소유물
소유로 얻는 행복은 상대적이다.
…그런가 하면 재산이 적은 사람보다 백배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가 부족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달성할 수 있는 각자의 영역이 있다. 이 영역 내에 있는 어떤 대상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행복해진다. 하지만 곤란한 일이 생겨 목표한 대상을 얻을 가망성이 사라지면 불행해진다. 즉,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대상은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Ⅳ. 개인의 외면
칭찬을 갈망할수록 파괴당하기 쉽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아주 빈약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의 걱정과 두려움의 절반은 타인에 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모든 자존심, 체면, 완고함은 그 종류와 범위가 다르다 해도 걱정과 집착에 토대를 두고 있다.
…자신이 우월한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고하고 내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만이 진정한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자부심은 이미 자기를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반면에 허영심은 타인의 호평을 근거로 자신을 높이 평가하려 한다.
Ⅴ. 권고와 격언
- 1. 일반적인 것
- 2.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 3.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 4. 세상사와 운명을 대하는 태도
(5장은 많은 주제가 이어지는 방식이어서 그 중 발췌)
…인간과 관련한 일이나 사건은 완전히 별개이며, 순서도 없고, 서로 관련도 없고, 공통점도 없이 무작위로 일어난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근심은 이에 걸맞게 두서가 없어야 한다.
…생각의 서랍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하나를 열 때는 다른 서랍들이 닫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무겁게 짓누르는 근심이 현재 누리는 작은 향락을 방해하거나 평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신중한 태도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을 넉넉하게 가져야 한다. 신중하면 손해와 상실을 막을 수 있고, 관용을 베풀면 논쟁과 다툼을 피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자는 자연이 만든 본성이 그러하다면 어떤 개성도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 개성이 아무리 최악이거나 한심하거나 우스꽝스러워도 상관없다. 최악의 상황에는 ‘그런 괴이한 존재도 세상에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Ⅵ. 나이의 차이에 대하여
…자기 나이에 맞는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나이에 맞는 온갖 불행을 겪는다. (볼테르 인용)
우리 인생은 결국 크고 작은 진폭으로 고통과 지루함을 오가는 움직임이라고 합니다.
고통과 지루함의 이중 대립 관계, 빈곤과 결핍이 고통을 낳고 안전과 과잉이 지루함을 낳는 비참함을 막는 것은 오직 고등한 정신의 풍요로움이고요.
다만 철학자가 아닌 현실의 소시민이 취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기에, 외재적 현상과 분리할 수 있는 본인만의 세계로서 취미생활을 가지면 그 시늉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동전 수집 같은 거 해도 좋은데, 예술과 과학에 애호가 수준으로 몰두하며 위안을 찾으래요. (궤도님이 말씀하신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사명감과 약간 이어짐)
뭔가 전체적으로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같은 본인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인간군상들을 보며 호되게 내려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쭈굴쭈굴 읽었는데요.
나의 행복을 주관한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쥐뿔도 없는 것들을 살살 벗겨내는 과정,
특히 후반부의 권고와 격언이 성경의 잠언처럼 나열되며 전반부 내용을 삶의 태도로 엮어내는 과정이 기억에 남아 두고두고 다시 읽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저자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도 읽지 않았고
사실 철학서는 고등학생 때 ‘소피의 세계’ 중도하차한 후로 접한 바가 없거든요.
본서 역시 문화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소품집이라서 그런지 각 장의 주제의식을 쉽게 던져주고 그 뒤에 논리적 구조와 용어적 해석을 빌드업하는 식이어서
맥락 안에서 그 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친절한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딴에는 다소 편협한, 현대적 시선과 맞지 않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약간은 있었는데요.
책을 그래그래 하며 마구 수용하던 와중 그 덕에 머리가 차가워졌고
내 주관을 섞어가면서 더 능동적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런 부분 외에는 내 핫바지 가치관보다 훨씬 견고해서, 결국 그래그래 하면서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