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조현아 - 확장윤회양분세계

우리 곁에 돌연 도착한 젊은 SF 소설가 조현아의 첫 연작소설《확장윤회양분세계》가 읻다에서 출간되었다. 원인 모를 어둠에 휩싸인 전 세계,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지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워져 세상은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고 그 누구도 죽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에 찾아온 이 갑작스러운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여섯 단편의 주인공들은 돌연한 질문에 삶으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기술과 공명하고, 불교적 관점과 횡단하는 SF 소설
불교 재단 ‘연산윤회연구소’는 존재의 해탈 가능성을 연산해 보기 위해 몇천 년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가상세계로 압축한 sam4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후 한국대 대학원에 유지보수를 맡긴다. 담당자가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 석사과정생들이 시스템에 손을 대고, 설상가상으로 연구동 점검으로 정전이 된다. 이로 인해 sam4 속 세계는 밤이 와도 해가 뜨지 않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화돼 사람들은 죽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이 세계가 실은 관찰자의 창조물이었다는 다소 통념적인 ‘통 속의 뇌’ 세계관 기저에 불교적 밑바탕을 깔아둠으로써 다성적인 해석의 길을 터둔다.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으로서의 모자이크화(畫)
《확장윤회양분세계》는 앞에서 언급한 이질적인 세계관의 화학적 결합이라는 특이점을 제외하고도, 형식과 내용이 주제를 향해 합일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성취를 거둔다. 하나의 단편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다른 단편에서도 교차하여 등장한다는 점, 사건의 층위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이 소설은 마치 다양한 색면이 모여서 하나의 문양을 이루는 예술인 모자이크화를 상기시킨다. 낱낱의 조각보다 전체가 조망될 때 미적 쾌를 주는 모자이크화처럼, 〈컬러풀 루덴스〉 〈확장윤회양분세계〉 〈시장판 단독 콘서트〉 〈reboot—f〉의 인물들은 절망의 수렁에 갇힌 인물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면서, 혹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마주 잡으면서 복잡한 우주 속 상호 연결된 관계의 넉넉함을 확인한다.
끝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하나를 소개하며 마무리하겠다. 〈컬러풀 루덴스〉의 주인공 ‘박주형’은 물감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청소년 수련관으로 향한다. 어둠을 헤치고 도착한 곳에서 그는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다. 3층 교실에서 누가 불을 지핀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옥상을 목전에 두고 누가, 왜, 굳이 실내에 불을 피운 것일까? 인물들은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아마 어린아이를 둔 가족이 아이에게 색을 보여주고 싶어 불을 피운 게 아닐까요?”
세계는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던 부모가 피워낸 색의 세계를 상상하면, 우리의 마음속 한편이 뭉근한 색으로 은은히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확장윤회양분세계》 속에서 ‘색’은 단순히 물감의 안료나 조형적 요소가 아니라 항구적인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을 시각화하는 수단이자, 무엇보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공(空)의 지위에 있던 색(色)을 위상을 재조정하며 새로운 존재론을 설파한다.
차례
세계의 에필로그 • 7
취미 비전공자 • 41
시장판 단독 콘서트 • 75
사이버 인권 교육 • 101
확장윤회양분세계 • 125
컬러풀 루덴스 • 155
reboot —f • 191
작가의 말 • 217
무기력해지는 로그들을 많이 읽었습니다만 자신만의 빛을 찾은 몇몇 인물도 있었습니다. 놓았던 붓을 다시 쥐고, 아무 대가 없이 타인을 돕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어 노래하다가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고……. 절망밖에 남지 않은 세계에서도 기어이 좌절을 떨치고 일어나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38쪽
sam4에 구현된 세계는 PYAYAN이라고 칭합니다. PYAYAN 세계는 이승과 저승 간 개체의 무한한 순환을 골자로 합니다. 여러분은 한 개체를 해탈시키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할 수도 있고, 이승 영역과 저승 영역의 효율적 경영에 집중할 수도 있으며, 고립된 환경에서 사고실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sam4는 하나의 세계에 서로 다른 레이어를 여러 개 추가해 원래 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고 다양한 사고실험을 시도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110쪽
“네가 이 상황을 해결해 버리면, 그래서 너도 나도 이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야?”“이 세계가 데이터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어.”
152쪽
“어차피 세상은 사라지고 우리는 모두 죽을 텐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모습으로라도, 이 삶을 새 시대의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수많은 세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마주칠 거야. 우리가 그러길 바라니까.”
153쪽
“별빛마당은 파스텔톤으로 알록달록해요. 아마 어린아이를 둔 가족이 아이에게 색을 보여주고 싶어 불을 피운 게 아닐까요? 너무 로맨틱한 해석인가.”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없어도 태어난 아이는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전된 세계를 맞이한 아이는 정말로 색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에게 세계는 전구의 빛과 어둠으로만 나뉜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던 부모가 피워낸 불꽃일 수도 있다니.
178쪽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삭제였으며 인간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인간이 아니어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죽음이란 삶의 종착지이므로 그에 걸맞은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떠났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죽음이 그토록 가치 있는 순간임을 깨달은 사람이 삶을 함부로 대할 리 없으니까.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