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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가엘 파유 - 나의 작은 나라

취급주의민트초코절임
24.12.19
·
조회 291

1992년, 가브리엘은 열 살이고 부줌부라에서 르완다인 어머니, 프랑스인 아버지, 동생 아나와 함께 살고 있다. 구석구석을 꿰고 있는 동네를 누비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가브리엘에게 삶은 〈평소 그대로, 전에 늘 그랬던 대로, 앞으로도 그대로이길 바라는 대로〉이다. 그러나 부룬디에 내전과 학살의 피바람이 불면서 먼 동네 이야기로만 알았던 일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일상은 서서히 산산조각 난다.

 

고향을 떠나오고 20년이 지난 뒤, 가브리엘은 잃어버린 세계를 돌아보며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건져 글 속에 되살려 내고자 한다. 파유는 『나의 작은 나라』를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거리의 레몬 향기, 부겐빌레아가 심긴 거리를 따라 걷는 저녁 산책, 구멍 난 모기장을 치고 자는 오후의 낮잠, 맥주 상자에 앉아 나누는 시시한 대화, 폭풍 치는 날의 흰개미……. 내가 이 소설을 쓴 것은 우리가 존재했었다고, 우리만의 단순한 삶, 우리만의 반복되는 일상, 변치 않기를 바랐던 행복이 있었으나 결국은 곳곳으로 보내져 망명자, 난민, 이민자가 되고 말았다고 세계에 외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외침은 곳곳에서 전쟁과 집단 학살이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지금을 살아가는 독자를 향해 울리며 저마다의 생활, 관계, 성격, 추억, 기호를 지닌 채 또렷이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사람들을 상상하고 알아보도록 이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책은 〈잠자는 정령〉이어서, 때로 알 수 없는 힘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나의 작은 나라』는 그런 힘이 있는 소설이다.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한 장소의 지형에, 환경의 굴곡진 윤곽에 육체적으로 녹아든다는 뜻이다. 여기선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다만 지나갈 뿐이다.
- 11면

 

그 모든 일 전, 내가 하려는 이야기와 그 밖의 일들 이전은 행복이었고, 스스로에게 행복이라고 설명하지 않는 삶이었다. 삶은 평소 그대로, 전에 늘 그랬던 대로, 앞으로도 그대로이길 바라는 대로였다. 평온하고 달콤한 잠, 귓전에 맴도는 모기 없는, 내 머리를 양철판처럼 두드려 대게 된 빗발치는 질문들 없는 잠. 행복했던 시절, 누가 내게 〈잘 지내?〉 물으면 나는 언제나 〈잘 지내지!〉 하고 대답했다. 단박에. 행복이란 건 깊이 생각할 일이 없다. 내가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 건 나중 일이다.
- 19면

 

우리는 나머지 수확물을 가지고 폴크스바겐 콤비로 돌아와 망고를 포식했다. 게걸스러운 잔치였다. 과즙이 턱, 뺨, 팔, 옷, 발에 흘러내렸다. 윤기 흐르는 열매를 빨고, 베어 물고, 발라 먹었다. 껍질 안쪽을 싹싹 긁고, 훑고, 씻었다. 잇새에 섬유질 많은 과육이 남았다. 배가 차고, 과즙과 과육을 질리게 먹어 숨이 가쁘고 배가 불룩해지자 우리 다섯은 폴크스바겐 콤비의 먼지투성이 좌석에 푹 기대 고개를 뒤로 떨구었다. 손은 먼지투성이고, 손톱은 시커멓고, 웃음은 헤프고, 마음은 달콤했다. 망고 사냥꾼들의 휴식이었다.
- 92면

 

아기에게 지어 주는 이름처럼 이 〈편〉은 태어날 때 정해지고 영원히 우리에게 따라붙었다. 후투 혹은 투치. 한쪽이냐 다른 쪽이냐였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였다. 전쟁은 우리가 부탁하지 않아도 언제나 알아서 우리에게 적을 찾아 준다. 중립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 역사를 지고 태어났다. 역사는 내 안에 흘렀다. 나는 거기 속했다.
- 163~164면

 

나이 든 학교 수위가 와서 우리를 수영장에서 쫓아냈다. 우리는 젖은 옷을 챙겨 숨이 막히도록 웃으며 알몸으로 달아났다. 택시 기사 역시 벌레처럼 발가벗고 차에 올라타는 우리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빗속에 밤이 내렸다. 차는 전조등을 밝히고 키리리 동네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천천히 내려갔다. 밖을 보려면 팬티로 유리창을 문질러 김을 없애야 했다. 부줌부라는 지금 빛의 농장, 평원의 어둠을 빛내는 반딧불의 밭이었다. (......) 그토록 자유롭고, 살아 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치되었으며, 서로 같은 혈관으로 이어지고, 같은 관능적인 액체가 혈관에 흐르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 192~193면

 

우리가 싸우는 동안 멀리 언덕 지대에서 AMX-10 장갑차의 발포음이 들렸다. 시간이 가면서 나는 우리를 둘러싼 전쟁의 음악적 영향력 가운데서 그 음을 알아듣는 법을 배웠다. 어떤 밤이면 총기 소리가 새들의 노랫소리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외침과 뒤섞였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 까맣게 잊고 그 기묘한 음의 세계가 아름답다고 여길 때도 있었다.
- 226면

 

집단 학살은 출렁이는 시커먼 기름띠이고 거기서 익사하지 않은 자들은 평생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채 산다.
- 228면

 

황혼에서 새벽까지 동네에 폭발음이 울렸다. 밤은 언덕들 위로 짙은 연기를 피워 올리는 화재의 빛으로 붉게 빛났다. 우리는 자동 화기의 일제 사격과 탁탁거리는 소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굳이 복도에 나가 자지도 않았다. 침대에 누워 하늘을 날아가는 예광탄의 장관에 감탄할 수 있었다. 다른 때, 다른 장소에서였다면 별똥별을 보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 242면

 

눈송이는 만물의 표면에 섬세하게 내려앉아 한없이 멀리까지 뒤덮고, 세상을 그 절대적인 새하얀색으로 적셔. 상아로 된 우리의 심장 속까지. 더 이상 천국도 지옥도 없어. 내일 개들은 짖지 않을 거야. 화산들은 잠을 잘 거야. 사람들은 백지 표를 던질 거야. 웨딩드레스를 입은 우리의 유령들이 거리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거야. 우리는 불멸이 될 거야.
- 256~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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