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황석영 - 삼포 가는 길

한국문학의 살아 있는 거장 황석영의 중단편전집이 새로이 출간되었다.
처음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중단편전집의 체재와 표기 등을 가다듬고, 장정을 새롭게 하고, 신작 「만각 스님」까지 포함해 완전한 중단편전집으로 개비한 것이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중편 「객지」와 「한씨연대기」는 온전한 주목을 요하는 작품인 만큼 각각 독립된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로써 19세의 나이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등단작 「입석 부근」(1962)부터 가장 최근에 발표한 28년 만의 단편소설 「만각 스님」(2016)까지, 황석영 문학의 50여 년을 결정본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목차
기념사진 / 이웃 사람 / 잡초 / 삼포森浦 가는 길 / 돼지꿈 / 야근 /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 섬섬옥수 / 장사壯士의 꿈 / 초판 작가의 말 / 수록 작품 발표 지면 / 작가 연보
모든 사랑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직접 그것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_「입석 부근立石附近」
한 무더기의 작은 돌덩어리가 무슨 피를 흘려 지킬 가치가 있었겠는가. 나는 안다. 우리가 싸워 지켜낸 것은 겨우 우리들 자신의 개 같은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_「탑」
사실 전선에서의 ‘우리’라는 말로써 이루어진 여러 행위나 감정들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몰랐다. 나는 ‘우리들’ 속에 잠적해서 편안히 잠들어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_「돌아온 사람」
우리를 위압하고 공포로써 속박하는 어떤 대상이든지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의 본질을 알아챈 뒤, 훨씬 수준 높은 도전 방법을 취하면 반드시 이긴다. _「아우를 위하여」
그놈은 나한테 죽은 게 분명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죽지는 않았는지두 모르겠구, 나는 내가 찌르지 않은 것 같단 말입니다. 저 딴 나라의 전장에서 휘두른 내 총부리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웃 사람」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_「삼포森浦 가는 길」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그 여자는 부엌으로 내려서며 혼자 중얼거렸다.
“언제는 돈 있어서 살았냐, 속아서 살았지.” _「돼지꿈」
자네 아나? 한恨이란 건…… 색깔이 있다면 똑 저 모양일 걸세.
청년이 고개를 들어 그쪽을 건너다보았다. 청천 하늘을 배경으로 지나가는 맞은편 능선의 중동이가 사태로 비스듬히 잘려 있었다. 한입 베어 문 홍도紅桃처럼 단애의 속빛은 더욱 강렬했다. _「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내 살이여 되살아나라. 그래서 적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늠름한 황소의 뿔마저도 잡아 꺾고, 가을날의 잔치 속에 자랑스럽게 서보고 싶다. 햇말의 돌담과 묘심사의 새 기둥을 쓸어 만져보고 싶다. _「장사壯士의 꿈」
그가 자신을 추악하게 본 것은 그 마음이 자기를 자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래는 그의 생처럼 절대로 완전함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이 자기를 보고 까닭 없이 미워함을 두려워하기 전에, 수추는 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도록 다시 살아야 함을 느꼈다. _「가객歌客」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몰개월의 새」)
사과를 하라고, 너는 반공법에 걸린다고, 나는 끼어들기 싫다고, 너나 뒤집어쓰고 꺼지라고, 살아 있음이 싸움인 사람들에게, 이따위로 살 수는 없다는 사람들에게 빨갱이 혐의나 뒤집어씌우면서 살아갈 건가. (……) 그래 우리가 이 고통받는 상황의 주인이라는 건 안다. 그러면 그 고통의 정말 주인은 누구냐, 누구야. _「골짜기」
나는 스님의 법명이 자기에게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디 그이뿐이랴. 사람살이란 언제나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의 반복이 아니던가. _「만각 스님」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강렬한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대편 사람들과 동료 인부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그는 혼자서 다짐했다. _『객지』
드디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들판 가운데를 가르고 흘러가던 강물의 표면이 일시에 얼어버리듯 멎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개인적인 소망마저 얼어붙은 물속 깊이 가라앉아 새로운 계절을 기다리며 한없는 겨울잠에 들어갔고, 망각이 그 위에 두터운 층을 이루면서 쌓여져갔다. _『한씨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