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찰스 부코스키 -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은 1969년 찰스 부코스키가 존 브라이언이 조그만 2층짜리 월세방에서 창간한 지하신문 《오픈 시티》에 14개월 동안 연재한 칼럼을 엮은 산문집이다.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은 술에 취해 거침없이 내뱉은 듯한 언어 뒤에 숨은 깊은 사유,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깨달은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어느 작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유머와 재치를 겸비한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찰스 부코스키 식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 준다.
어느 날 경마가 끝난 뒤 자리에 앉아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이라는 제목을 쓰고 맥주를 한 병 땄고, 알아서 글이 술술 풀렸다. 살짝 무딘 칼날로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후벼 파지도 않았다. 그런 건 《디 애틀랜틱 먼슬리》 칼럼에서나 필요하다. 평범하고 부주의한 잡지 기사처럼 쓴 것도 아니었다.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그냥 창가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나오는 대로 썼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쓰고 싶은 걸 썼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쓴 몇 꼭지를 건네자 대충 훑어보고는 “좋아, 신문에 넣자.”라고 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서 원고를 넘겼을 때도 읽어 보지 않은 채 내 글을 보관함에 밀어 넣고 말했다. “신문에 넣을게. 어떻게 지내?”
-서문 중에서
전 세계는 물론 《우체국》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여자들》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특유의 독자층을 형성한 작가 찰스 부코스키.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은 “애쓰지 마라(Don’t Try).”라는 유명한 묘비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여자와 술, 경마에 빠진 그의 분신이자 음탕한 늙은이 ‘헨리 치나스키’의 초석이 되는 산문집으로, 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작가를 읽을 예정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책이다.
때로는 거칠고 난해하며 음탕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을 읽고 나면, 그 헐벗은 목소리 뒤에 가려진 영혼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마음을 엿보게 될 것이다.
최근에 지성인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입을 열 때마다 주옥같은 말을 내뱉는 소중한 지성인들에게 진짜 신물이 난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속으로 계속 숨 쉴 자리를 만드는 데 이골이 난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과 떨어져 지냈으며, 지금 사람을 만나 보고 다시 내 동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더 있다. 곤충과 야자수와 후추통인데 내 동굴에 후추통을 갖다 놓을 거라 생각하니 웃겼다.
사람은 항상 배신한다.
그러니 절대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40~41p
전투복을 입은 남자가 찾아왔다. “케네디에게 일이 생겼으니 당신도 쓸 게 있겠군요.”
그는 작가가 되려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왜 자기가 쓰지 않을까? 난 항상 그들이 엉망으로 구겨 버린 종이를 주워다 작은 문학 자루에 담아 둔다. 지금은 전문가가 넘친다고 생각하며 그게 이 시대다. 전문가와 암살자의 시대. 둘 중 어느 쪽도 굳은 개똥만큼 가치가 없다. 지난번 암살 같은 일이 벌어지면 문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사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신적 사회적 이익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거창하게 들리긴 해도 그런 일이 있긴 했다는 거다. 내 말은 암살은 반인류적 위기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는 편견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뿐 아니라 타고난 자유를 빌어먹을 술집 의자에 처박아 버리는 용도로 써 버린다는 것이다.
-67~68p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을 것은 우리의 미치광이, 우리의 암살범이 우리의 현재 삶, 훌륭한 미국 전통 방식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우리 모두 겉보기엔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게 기적이다! 대신 꽤 암울하게 존재해 왔으니 우리는 있는 그대로 광기에 대해 솔직히 말해야 한다.
난 산타페에서 연설을 한 번 했고, 아니 꽤 취해 있었고, 친구가 좀 알려진 정신과 의사였는데 술을 마시는 와중에 내가 몸을 숙이고 물었다. “진, 말해 봐. 내가 미쳤어? 어서 말해 줘. 감당할 수 있어.”
그는 남은 술을 들이켠 다음 잔을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했다. “그걸 알고 싶으면 우선 돈을 내.”
그래서 적어도 우리 중 한 사람은 미쳤다는 걸 알았다.
-75p
모든 강의 수위가 더 높아지고 팽팽하고 학교 선생들은 자로 학생들을 후려치고 벌레는 옥수수를 파먹는다. 그들은 삼발이에 밀리그램을 올리고 배가 하얗고 배가 검고 배는 배다. 남자들은 맞기 위해 얻어터지고 법원은 판결문부터 써 놓고 시작하는 곳이고 모든 과정은 그저 코미디 같다. 남자들은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끌려가서 반병신이 되거나 인간 구실을 못하게 되어 나온다. 누군가는 혁명을 꿈꾸지만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도 자신의 새 정부가 여전히 기존의 정부와 같고 기존의 정부도 마분지를 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시카고 청년들은 거대 언론의 머리를 공격하는 분명한 실수를 저질렀다. 머리를 공격하면 그들이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고, 초창기 《뉴욕타임스》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일부 판을 제외한 거대 언론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선언하는 행동을 멈출 수도 있으니까.
-92~93p
나이가 들고 보니 특히나 이 나이 대를 사는 것이 기쁘다. 별것도 아닌 인간이 그저 너무 많은 헛소리를 하는 데 지쳤다. (중략) 이 시대가 좋다. 이런 기분이 좋다. 젊은이들이 마침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이가 점점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매번 감정에 휘둘리고 그 휘둘림에 죽음을 당한다. 늙고 완고한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그들은 혁명이 매국의 방식으로 투표를 불러오리란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총알 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다. 단순히 더 현실적이고 더 인간적이 되어 쓰레기를 몰아내는 것으로 그들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영리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험프리 아니면 닉슨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차가운 똥이나 따뜻한 똥이나 다 똥이다.
-101~102p
무엇이 사람을 괴롭히는지 단정 지을 수 없다. 아주 사소한 것도 어떤 마음가짐이냐에 따라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근심/두려움/고통이 주는 피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생각에서 지워 버릴 수도 없다. 판금 조각처럼 몸에 박혀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당 25달러를 받아도 말이다. 나도 안다. 자살? 자살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 클럽에 가입하려고 시인 노조에 소속될 필요는 없다.
-145~146p
필라델피아에서 난 밑바닥이라 샌드위치 심부름 같은 일을 했다. 앞 시간 바텐더인 짐이 오전 5시 30분에 날 들여보내면, 그는 걸레질을 하고 난 7시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공짜로 술을 마셨다. 술집이 밤 2시에 문을 닫으니 잠잘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별로 한 일이 없다. 잠도 먹는 것도 다른 것도 다. 술집이 너무 낡고 오래되고 소변과 죽음의 냄새가 풍기다 보니 창녀가 시선을 끌러 들어왔을 때 우리는 특히 감동을 먹었다. 월세를 어떻게 낼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이때쯤 《포트폴리오 III》에 헨리 밀러, 로르카, 사르트르를 비롯해 다른 문인들의 작품과 나란히 내 단편소설이 실렸다. 《포트폴리오》는 10달러에 판다. 개별 페이지이며 면이 크고 각 장마다 비싼 컬러 용지에 다른 글씨체가 찍혀 있고 그림도 화려하다. 여성 편집자 커레스 크로스비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최고로 특이하고 근사한 이야기예요. 당신은 누구죠?” 그래서 나도 답장을 보냈다. “친애하는 크로스비 씨, 나도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 찰스 부코스키 드림.” 그 일 이후 글 쓰는 일을 10년 동안 그만두었다.
-163~164p
우리는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작은 월세방에 살았다. 뒷마당에 잔디가 길게 자랐고 파리 떼가 그 사이에 숨어 알을 낳고 나와 마당에서 사방으로 날아다녔는데 4만 마리는 족히 되어 날 미치게 했다. 난 커다란 스프레이통을 사다가 하루에 1000마리씩 죽였지만 놈들은 너무 빨리 짝짓기를 했고 우리도 그랬다. 이 집에 살던 미친 사람들이 침대 주변에 선반을 가득 달고 그 위에 제라늄 화분을 쭉 늘어놓았다. 커다란 화분, 작은 화분 할 것 없이 제라늄이었다. 우리가 침대에서 섹스를 할 때 벽이 흔들리고 벽은 다시 선반을 흔들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용암이 분출할 때처럼 선반에서 화분이 떨어지려는 소리가. 그래서 난 얼른 멈췄다. “아니, 안 돼요. 멈추지 말아요. 아, 세상에, 멈추지 말아요!” 그래서 난 계속했고, 선반은 내 등, 엉덩이, 머리, 다리, 팔 쪽으로 기울어지며 화분을 던지려 했고, 그녀는 웃으며 비명을 지르고 그렇게 절정에 올랐다.
-188~189p
어느 날 밤 불이 모두 나갔을 때 침대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깨어났는데 더러운 벽에서 잤지만 정신이 말짱했다.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슬펐다. 한쪽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달빛이 비추는 쪽에 놓인 빈 와인병만 보였다. 속이 부대끼는 힘든 아침이 기다리고 있어서 침대 주변을 살피니까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어떤 여자가 나와 같이 있기로 했나 보다. 그건 사랑이고 용기다. 젠장, 누가 진짜 날 이해해 줄까? 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영혼에 엄청난 용기를 품은 사람이다. 나와 같이 있을 용기와 통찰력, 배짱을 지닌 이 달콤하고 작은 사슴을 보상으로 취하기만 하면 된다.
-221p
“음료수 하나 사도 돼요?”
“그러세요.”
그녀가 돈을 주었고 난 그녀가 음료수 상자를 열어 진지하게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작은 스툴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는 걸 구경했다. 전깃불을 통해 탄산 방울이 병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난 그녀의 몸을 쳐다보고 그녀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따뜻한 갈색 친절이 내 속을 채웠다. 주당 18달러를 받고 밤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건 외로운 일이다.
-246p
지성인이란 단순한 것을 어렵게 말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란 어려운 것을 단순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252p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나?
물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잘 모른다면 말입니다. 난 창문 너머로 길 걷는 사람들을 보는 걸 좋아합니다.
스티르코프, 자넨 겁쟁이야.
맞습니다.
자네가 생각하는 겁쟁이의 정의가 무엇인가?
맨손으로 사자와 싸우기 전에 두 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네가 생각하는 용감한 사람의 정의는 무엇인가?
사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270p
그렇게 여자와 개는 몸을 돌려 나와 내 인생, 내 두려움에서 멀어져 가며 날 향해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난 가만히 서서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난 모퉁이에 있었다. 신호가 빨강으로 바뀌었다. 난 지켜보았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 냉혹한 거리를 건넜다.
-285p
내가 절대 신경 쓰지 않는다거나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거나 절대 증오하지 않는다거나 절대 희망을 갖지 않는다거나 절대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내가 완전히 열정이나 감정이나 뭐 그런 것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방식이 아주 이상하게 달랐고 내 또래들과 반대라는 점이 낯설 뿐이다. 난 결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 같고, 그래서 그들의 선택과 내 방식 모두를 통해 얼어 버렸다.
-298p
“실례합니다.” 내가 말을 걸었다.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왔어요. 당신 눈에요.” 거짓말을 했다.
“운명은 곧 신이죠.” 그녀가 말을 받았다.
“당신이 신이에요. 당신이 내 운명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술 한잔 사도 될까요?”
“좋아요.”
우리는 바로 옆 건물의 술집으로 갔고 영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거기 있었다. 난 그녀와 대화 같은 것을 나누었고 그게 유일한 방법임을 파악했다. 그랬다. 그녀를 내 집으로 데려왔고, 그녀는 아름다운 섹스 파트너였다. 우리는 3주를 만났다. 그녀에게 청혼하자 그녀는 오랫동안 날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너무 오래 쳐다보는 바람에 그녀가 내가 한 말을 까먹었다고 생각했다.
-30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