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정채봉 -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2021년은 작가 정채봉이 짧은 생을 마감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샘터사는 그의 20주기를 맞아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에 그가 남긴 산문시를 추가하여 개정증보판을 출간했다.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용어를 뿌리내리며 한국 문학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정채봉.
간결하고 단정한 문체, 특유의 감수성은 정채봉 문학의 특징으로 손꼽힌다.
그런 면에서 시야말로 정채봉 문학의 숨겨진 진가를 발견할 수 있는 장르일 것이다.
“대개의 사람이 쉽게 지나쳐 가는 것들 속에서 보석 같은 지혜와 진리를 발견할 줄 알았던 사람”(피천득)이었던 정채봉은 인생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많은 이의 가슴에 자신만의 ‘인장’을 남겼다.
이 시집에서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소중함, 생에 대한 갈구, 나 자신과의 관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사랑과 이별 등을 담았다.
이 시집은 생의 마지막 고비 앞에서 스러지지 않으려 했던 한 인간이자, 작가로서 정채봉이 남긴 삶의 ‘결정’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붙들고자 했던 글과 마음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서문
첫길 들기/ 슬픈 지도/ 들녘/ 생명/ 길상사/ 엄마/ 수도원에서/ 사과/ 수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벽돌 같은 사랑/ 신발/ 노을/ 빈터/ 참깨/ 나그네/ 술/ 세상사/ 통곡/ 나의 노래/ 피천득/ 어느 가을/ 화가 난 기분이 일깨워 주는 것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아기가 되고 싶어요/ 고드름/ 바보/ 샛별/중환자실에서/ 노란 손수건/ 면회 사절/ 아멘/ 눈 오는 한낮/ 내 안의 너/ 기다림/ 사랑을 위하여/ 나무의 말/ 그리움 나무/ 수혈/ 지금/ 해 질 무렵/ 그때 처음 알았다/ 별/ 생선/ 괴로운 기분이 들 때/ 인연/ 물가에 앉아서/ 물새가 되리/ 나는 내가 싫다/ 가시/ 꿈/ 바다에 갔다/ 영덕에서/ 밀물/ 해당화/ 나의 기도/ 하늘/ 공동묘지를 지나며/ 알/ 꽃밭/ 버섯/ 흰 구름/ 바다가 주는 말/ 몰랐네/ 꽃잎/ 행복/ 무지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땐 왜 몰랐을까/ 새 나이 한 살/ 더 늦기 전에/ 오늘/ 엽신/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발문 사랑과 고통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불빛 - 정호승
첫길 들기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창을 열고 푸른 하늘빛으로
눈을 씻는다.
새 신발을 사면 교회나 사찰 가는 길에
첫 발자국을 찍는다.
새 호출기나 전화의 녹음은 웃음소리로 시작한다.
새 볼펜의 첫 낙서는 ‘사랑하는’이라는 글 다음에
자기 이름을 써본다.
새 안경을 처음 쓰고는 꽃과 오랫동안 눈맞춤을 한다.
_11쪽
참깨
참깨를 털듯 나를 거꾸로 집어 들고
톡톡톡톡톡 털면
내 작은 가슴속에는 참깨처럼
소소소소소 쏟아질 그리움이 있고
살갗에 풀잎 금만 그어도 너를 향해
툭 터지고야 말
화살표를 띄운 뜨거운 피가 있다
_26쪽
별
암자에 산그리메가 둘러쌀 무렵
스님이 건네주는 찬물 한 바가지를 받았다
물을 마시다 보니 그 안에 별 하나가 있었다
작은 바가지의 물이 사라지자 별도 사라졌다
나는 간혹 사무치도록 쓸쓸할 때면
가슴에 떠오르는 별 하나를 본다
_58쪽
물새가 되리
내가 죽어서
다음 몸을 받는다면
물새가 되겠다
흙한테는 미안하지만
물에서 하루치를 벌어
하루를 사는
단순한 노동자가 되고 싶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오늘의 작은 만족에 훨훨 날며
비록
겨울날 맨발로 얼음 위를 걸으며
부리로 얼음을 쪼지만
그 누구를 원망도 시기도 하지 않는
하얀 물새가 되고 싶다
그리움이야 멀리 바라보며 피우는 꽃
강 건너 흙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나는
죽어서 다음 몸을 받는다면
기꺼이
물새가 되겠다
_64쪽
무지개
첫눈이 듣던 날
받아먹자고 입 벌리고 쫓아다녀도
하나도 입 안에 듣지 않아
울음 터뜨렸을 때
얘야,
아름다운 것은 쫓아다닐수록
잡히지 않는 것이란다
무지개처럼
한자리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어 보렴
쉽게 들어올 테니까
나이 오십이 되어
왜 그날의 할머니의 타이름이
새삼 들리는 것일까
_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