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이나연, 조민재 - 실
명선은 오랜 시간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봉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 온 베테랑이다.
유명 배우가 자신이 주문을 받아 제작한 디자이너 제품을 입고 출연한 드라마를 보는 것이 그의 큰 낙이다.
그러나 일감은 점점 줄어들고 가깝게 지내던 동료 현마저 창신동을 떠나자, 명선 역시 고민에 빠진다.
창신동에 봉제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한국전쟁 후 구제품을 떼다 파는 옷시장이 열리고,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 평화시장이었다.
평화시장이 흥성하면서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창신동 판자촌 사이로 봉제공장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한국의 의류산업과 함께 봉제골목 역시 성장했다.
그런 봉제공장의 노동 착취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 고통의 역사를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곁에는 약을 먹고 잠을 쫓으며 마감을 맞춰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어두운 작업실의 셔터가 오르고 영화가 시작되면, 실타래에서 풀려나온 것 같은 글씨체로 영화의 제목 ‘실’이 뜬다. 이나연, 조민재 감독이 공동 연출한 <실>은 봉제 노동자인 명선과 그 주변 동료들의 노동, 일상, 그리고 창신동 봉제 골목의 풍경을 담아내는 영화다. 이때 ‘실’이란 이들이 만들어 내는 옷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단어이면서, 창신동이라는 공간에서 옷 만드는 노동을 해 온 여성들의 몸과 기억을 타고 이어지는 역사를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세월의 흔적이 빼곡한 좁지만 알찬 작업실에서 명선은 갓 내린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재단하고 재봉하며 디자이너로부터 의뢰받은 옷을 만들고, 일감과 애환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떤다. 몸에 익은 동작들은 그 자체로 대체할 수 없는 리듬이 되어 영화의 세부를 채우고,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애정 어린 대화는 영화에 다정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는 실제 봉제 노동자이자 조민재 감독의 어머니인 김명선이 영화 속 인물 명선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작업에 참여한 것과 분리할 수 없는 결과일 테다. 이처럼 <실>은 실제 삶을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을 넘어 영화 만들기라는 작업 속에 그 삶의 모양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그 안에는 창신동에서 봉제 공장을 운영하다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이, 새로 공장을 차리고 생활을 이어 가는 이, 이주민으로서 오랜 시간 창신동에서 삶을 일구어 온 이의 이야기가 모두 들어 있다. 외부의 시선으로 간단히 틀 지어지지 않는 공간과 인물의 역사와 호흡을 마주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손시내 / 서울독립영화제2020 예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