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 단편선

출판사 [현대문학]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 22번 “레이먼드 챈들러”입니다
이 시리즈는 2번 “윌리엄 포크너”와 7번 “러브크래프트”만 읽어봤었는데(18번 “브래드버리”는 사두고 처박아 두고만 있습니다),
올초에 22번을 사서 묵혀두다가 5월말부터 읽기 시작해서 오늘 마침 완독했습니다
챈들러는 항상 관심이 가던 작가였는데 단편은 접해 본 적이 없었어요
가장 유명한 장편들인 “빅슬립”이랑 “롱 굿바이”만 주구장창 읽어댔었죠
읽어보니까 단편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드보일드” 소설의 특성 상 단편이 훨씬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뿐만 아니라 “필립 말로” 이외의 다양한 성격과 외모의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그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꽤나 쏠쏠했습니다
시작도 전에 잡생각만 거듭 하다 지쳐서 행동하기를 단념하고 마는 저의 기질 탓인지
챈들러의 등장인물들은 제 오랜 “컴플렉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상황에 적확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죠
그러면서도 권모술수가 판치는 LA의 뒷골목에서,
그리고 그들의 과단성이 불러일으킨 끔찍한 소동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캐릭터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잠금장치가 풀린 22구경을 코 앞에 두고서도 “말로”는 끝까지 “말로”를 할 뿐이죠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인물들 중 특별히 제 마음에 끌렸던 이들은
<네바다 가스>의 “조니 디 루즈”와 <진주는 애물단지>의 “월터 게이지”입니다
“디 루즈”는 “키가 크고 여윈 체격에 과묵하고, 세련된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 <한 밤의 암살자(Le Samourai>에서의 알랭 들롱을 빼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중에서 그를 사랑하고 또 배신하는 “프랜신 레이”라는 인물의 평에 따르면,
“세상 누구도 그와는 핸디캡 없이 대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냉철하고 강인한 남자로 보이지만,
그는 결코 “터프가이는 아닙니다.”
오히려 내면은 “너무 부드러워서 탈인” 그런 남자죠

<진주는 애물단지>는 겉으로는 언뜻 챈들러 특유의 탐정 활극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몇몇 영화들처럼 결혼을 앞두고 갈팡질팡하는 남자의
불안한 내면을 그려낸 일종의 풍자극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유한 독신남인 월터 게이지는 어느 날 결혼을 약속한 “앨런 맥키토시”로부터
어느 할머니의 도난당한 진주 목걸이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사건을 해결하게 위해 동분서주 하는 와중에
그는 “헨리 아이켈버거”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목걸이의 주인인 할머니의 운전 기사인 헨리는 앨런이 지목한 주요용의자였죠
“굵은 금발에 목은 만화에 나오는 프로이센 군 하사처럼 굵고, 어깨는 떡 벌어지고,
손은 크고 단단하고, 젊은 시절 주먹깨나 맞아 본 험상궂은 얼굴의” 이 남자는,
입가심으로 브랜디를 몇 병씩 비워버리고 누구든 한 주먹에 때려눕히는,
한마디로 주정뱅이 건달입니다.
헨리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머리가 이상해진 탓인지, 혹은 그의 남자다운 성품에 반한 탓인지,
월터는 그와 친구가 되고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헨리의 나쁜 습관에 서서히 물들게 되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약혼녀 앨런은 게이지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연락을 두절해버리고
월터의 결혼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다가 월터가 헨리와의 우정을 단념하고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머지 단편들고 무척 흥미롭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 하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여름이 되었고 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2편
<꽃피는 소녀들의 그늘에서>를 다시 읽을 작정입니다
다 읽고나면 또 감상문 남겨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